WELCOME TO ZANCHI! · 신촌을 사랑하고, 추억하고,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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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2021 · 09 · 21

321. 날씨는 덥고 노래는 좋아서

Editor 보라

날씨는 덥고 노래는 좋아서

 

아니, 가을이라 하지 않았어? 비도 엄청 왔고, 덥기도 무지 더웠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고. 그럼 가을이 와야 되는 거 아니야? 왜 대체 최고 기온은 30도고 햇빛은 또 왜 이렇게 강한거야.

나뭇잎 색도 변하고, 예쁘고 얇은 긴팔 니트 입고, 선선하게 바람도 불어야 가을인데…

 

아무래도 가을이 오고 있다가 여름한테 져서 일단 후퇴한게 틀림없다. 아니면 낮-밤으로 밀당하고 있거나.

 

어우 얄미워

 

신촌을 막 걸었다. 이 더위에 굳이 입은 가디건 때문인지, 망한 앞머리 때문인지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혔지만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아직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기에.

시작은 신촌역 1번 출구였다. 2번 출구로 나갔어야 했는데 그냥 1번으로 나가고 싶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랴. 악세사리 가게로 유명하지만 옷에 더 눈이 가는 ‘시공간(時空間)’ 한 번 쓰-윽 둘러 봐주고 창천문화공원으로 걸었다. 제일 먼저 날 반겨준 건 마스크 착용 안내문 속의 웃고 있는 아이였다. 

 

웃고 있는게 괜히 보기 싫었다. 

 

브레이크 타임 시간대라 그런지 잠깐 쉬러 나오신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잠시 앉아있었는데, 이럴수가. 정말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또 걸었다. 신촌 술집 거리 쪽에 가본 사람이라면 야구 사격장을 모를 수가 없다. 나도 수백, 에이 그건 심했다. 그래 수십 번은 봤던 야구 사격장이었는데 오늘은 좀 달라 보였다. <최선의 삶>을 본 후에 봐서 그런지. 왠지 영화 속의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가출한 강이(방민아 역)와 소영이(한성민 역), 아름이(심달기 역)가 눈 앞에서 아른거렸다. 저마다의 이유로 함께 가출해 당시엔 그 모든게 최선이라 생각하고 행동하며 어려운 18세를 보낸 아이들이 쉽게 잊혀질 거 같지는 않았다. 그 아이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어떻게 살고 있을까?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곳인데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애들아, 행복했으면 좋겠어.

 

아, 백종원 선생님 또 가게 오픈하시더라. 이름은 ‘리춘시장’이고 중화요리주점인데 원래 있던건가..? 난 처음 봤다. 이 선생님 정말 열일하시네. 체인점을 몇 개나 만드시려는건지.

“저도 하나만 주세요. 그냥 가게 하나면 충분한데…”

 

그나저나 맛있겠네.

 

그렇게 백종원 선생님 세 명을 마주쳐 한마디 건네고 (일방적인 대화였지만) 또 발걸음을 계속했다. 

신촌의 소리를 듣고자 노래를 듣지 않았는데, 갑자기 백예린 앨범 ‘선물’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헤드셋을 꼈다. 수록곡 중에도 특히 ‘antifreeze‘는 완벽하게 어울렸다. 

 

안티프리즈Antifreeze-백예린

 

-Antifreeze 가사 중-

우리 둘은 얼어붙지 않을 거야

바다 속의 모래까지 녹일 거야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

얼어붙은 아스팔트 도로 위로

너와 나의 세대가 마지막이면 어떡해

또 다른 빙하기가 찾아오면 어떡해

 

노래를 틀자 내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예뻐 보였다. 노래 속 가사처럼 신촌 길거리의 꽃들은 얼어붙을 생각이 없어 보였고 사람들의 얼굴엔 절망은커녕 행복만이 가득했다. 도무지 수그러들 생각이 없어 보이는 햇빛을 보며 절대 빙하기가 찾아오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도 잠시 했다. 

 

신촌을 더욱 반짝이게 해주는

 

그래, 그랬지. 원래 신촌은 그랬다. 항상 사람으로 바글바글 했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투성이였다. 위드코로나로 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마스크로 눈 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는 건 어려워졌고 이젠 마스크 벗는 걸 부끄러워하는 사람도 있다더라. 

*달로 떠나는 여행보다 지구로의 귀환이 더 어렵듯이 코로나19 이전 시절로 돌아가는 건 더 어렵고 한참 걸릴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슬퍼졌다.

 

마지막으로 친구를 만나 귀신이 나온다는 걸로 유명한 신촌 메가박스에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를 보러 갔다. 상영하는 곳 몇 안 남았다는데 때마침 신촌에서 하고 있었다.

2시간 30분 정도 되는 긴 러닝타임 중 30분은 잤다. 영화가 끝나고 이게 뭐가 재밌다는 거냐고 한참을 조잘조잘 대다가 눈 앞의 타코야끼 포장마차에서 타코야끼를 사고는 또 다시 조잘조잘

 

*’달로 떠나는 여행과 지구로의 귀환’ 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인용했습니다.

 

너무나 귀여운

 

그래도 영화가 어이없어서 웃기다며, 재밌는 부분은 몇 개 있었다며 열띤 토론을 하다가 헤어졌다. 휴학생의 권리로 평일 낮에 노래 들으며 산책하고 수업 끝난 친구를 기다리는 건 상상했던 것만큼 행복한 일이었다. 어떻게 알찬 휴학 생활을 보낼지 고민하는 건 또 다시 나중으로 미뤘지만 에라 모르겠다. 일단 영화나 실컷 보고 생각하기로 했다.

밤에는 확실히 가을이 여름을 이긴 거 같았다.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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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잔치의 시선으로 신촌의 장면과 사람, 장소를 기록합니다.

COMMENTS

댓글 1

  1. 수잔
    수잔 2021.11.03 14:51

    보라님.. 글 너무 멋진데요? 사격장을 보고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오른 것도 보라님의 색이 묻어나는 것 같아요.. 백종원가게 부분도 정말 너무 웃기고 취향저격이네요 ㅎㅎ 다음 글 또 기대할께요! 잘 읽었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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