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플릭 온 커피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로맨스 영화를 묻는다면 저는 <비포 선라이즈>를 꼽겠습니다. 열차 안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 주인공. 그들은 비엔나에서 내려 걸으며 다음 날 동이 틀 때까지 끝없이 이야기를 나눕니다. 조금씩 솔직해지고 깊어가는 대화. 입술과 입술이 맞닿듯이. 언젠가 이런 식으로 사랑에 빠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랑 얘기는 뜬구름처럼 느껴지던 저에게 생경한 감각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이유로 말의 힘을 믿습니다. 꼭 사랑이 아니더라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를 소리 내어 공유하는 일. 때로는 진이 빠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상대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상대의 세계를 이해하면서 쌓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새로운 유대와 취향과 관점이 새로운 나를 만들었음을 느낄 때 문득 고마워지곤 합니다. 사실 소심하고 무심한 성격이라 늘 먼저 다가와주는 그들이 아니라면 혼자서는 어려운 일일 것임을 알기에.

신촌 명물거리 한편에 자리잡은 플릭 온 커피가 유독 특별하게 느껴지는 점도 이러한 맥락에서입니다. 카페가 문을 열었던 지난 6월의 어느 날. 한산하던 매장에 발을 디디면서 갤러리 같은 공간 구조와 샤프한 인상의 사장님께 약간은 압도되었던 것도 같습니다. 평소처럼 주문을 마치고 조용히 기다리던 차에 사장님께서 먼저 말을 걸어주셔서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원두와 기계에 관해서 열정적으로 이것저것 알려주시는 모습에서 커피에 대한 열정이 예사롭지 않은 분이라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신촌에 이런 인스타그램 감성의 공간이 들어서다니 멋지다는 제 말에 웃으시며 “글쎄요… 저는 그래도 커피로 인정받게 된다면 좋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던 사장님. 그렇게 예정보다 한참 긴 시간을 머물렀던 첫 방문이었습니다.

이후에 듣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장님의 경력은 스무살 갓 성인이 되던 시절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커피를 배우기 위해서 무작정 엔제리너스 매장에 취직을 했다가, 당시의 프랜차이즈 매장에서 배울 수 있는 내용에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홍대의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에 찾아가셨다는데요. 그곳에서 월급은 받지 않으면서 일을 도우며 커피를 얻어마시는 식객 생활을 하셨고, 이후 군대에 다녀와 카페 창업을 준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터닝 포인트가 된 장소는 서교동의 레이크 커피바. 여러 번 방문 끝에 그곳의 사장님과 말을 트게 되신 뒤 그분에게 카페 창업의 이모저모를 전수받으셨다고 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두 카페 공간의 선과 색감에서 형제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준비되어있는 원두는 콜롬비아 엘 파라디이소 핑크 버번입니다. 복숭아, 살구와 구아바 같은 느낌에 끝맛에서는 망고도 살짝 느껴져요. 질감이 크리미하기도 해서 저는 그 옛날 바이오 캔디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준비되어있는 여러가지 메뉴 중 브루 커피에 대해 물어보신다면 이런 식으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원두의 경우 약간의 가격 차이를 두고 싱글 오리진과 스페셜 싱글 오리진이 따로 준비되는데, 저는 언젠가 그냥 싱글 오리진을 주문했다가 서비스로 받은 스페셜 싱글 오리진에 눈이 번쩍 뜨인 뒤부터 늘 그쪽에 더 눈이 가고는 합니다. 이렇게 커피를 정해도 사장님의 설명은 끝나지 않는데요. 원두 그라인딩을 마친 뒤 그대로의 냄새를 맡게 해주시고, 커피를 내어주실 때에도 다시 한번 컵노트를 짚어주시는 점이 세심하게 느껴집니다. 마치 칵테일 바 바텐더의 서빙을 경험하는 듯한 인상을 준달까요. 드립 커피의 맛도 정말 명확하게 설명해주신 그대로라 갈때마다 커피의 신세계를 경험하는 기분입니다.


이외에도 아메리카노와 라떼 등 에스프레소 베이스 커피들과 시그니처 음료인 그랑누아, 디저트로는 티라미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특히나 발로나 초콜릿이 듬뿍 들어가 초콜릿의 진한 풍미가 일품인 그랑누아가 인기이고, 클래식한 스타일의 티라미수도 시트를 적신 커피부터 남다른 맛이 나는 메뉴였습니다.

“아, 태연님 오셨어요? 굉장히 금방 다시 찾아주셨네요!”
한참 자리에 머무르다보면 커피를 내리는 곳 바로 앞 바 좌석 뿐만 아니라 길게 뻗어있는 나머지 좌석들까지 모두 사장님이 자연스럽게 오고가며 이야기를 건네실 수 있도록 되어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손님 한분한분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시면서, 본인이 사랑하는 커피에 대해 설명해주시는 사장님의 모습을 보다보면 저 또한 그 열정을 얻어가는 기분이 듭니다. 원래 커피를 좋아하고 열심히 찾아마시는 편이지만, 이곳에 들리고 나서부터 보다 다양한 원두를 고르고 애써서 커피를 내려보는 제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네요. 좋은 공간과 맛있는 메뉴들을 넘어, 의미 있는 소통과 배움의 시간이 있는 멋진 장소입니다.


잠시 <비포 선라이즈>로 돌아가보면, 영화 후반부에서 제시와 셀린느는 카페에 앉아 조금 이상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서로에게 얘기하는 대신 각자의 친구들과 상대방에 대해 통화하는 척 하면서. “그때 그 말 때문에 그는 나를 정신나간 여자로 볼거야”, “똑똑한 그녀에게 나는 바보같이 비치겠지”, 등등. 저는 그들이 그렇게 서로의 연약함마저 내보일 수 있었던 그 순간에서야 서로 다시 만날 것이라고 확신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있는 그대로 나 자신을 내보인다는 것. 우리 모두 그럴 수 있는 상대를 찾아 헤매는 중이 아닌가요.

다행히 우리 모두 취향에 있어서는 가짜 전화기가 없어도 솔직해지는 법을 잘 아는 편입니다. 무언가 필요하다면 그건 아마도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만나 소통할 수 있는 장소이겠습니다. 이곳 신촌에서 플릭 온 커피가 오랫동안 커피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런 공간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읽고 계신 여러분도 여기에서 멋쟁이 바리스타 사장님과 대화하며 커피와 새로운 사랑에 빠져보는게 어떠실지. 당신을 바꿔놓을 말의 힘을 기대해봅니다.


플릭 온 커피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4길 40 1층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11:00 ~ 20:00
(월요일 휴무)
070-8230-8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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