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ψ(x,t)
ψ ([psaɪ], 프사이);
양자역학에서 슈뢰딩거 파동방정식의 해인 파동함수를 의미한다. 파동함수의 의미는 물리적 사건들의 확률적 발생이다.
1935. 11
어떤 상자 안에 고양이와 밀봉된 청산가리가 들어있다. 1시간 뒤, 50퍼센트의 확률로 청산가리가 유출되어 고양이는 죽을 것이다. 상자 안은 외부 세계와 완전히 차단되어 있으므로 당신은 그 상황을 전혀 볼 수 없다.
그 고양이는 현재 살아있는 상태인가 죽어 있는 상태인가?
그리고 당신의 고양이는 어떠한가?
* 다른 고양이를 원한다면 새로고침을 누르시오 (확률은 각각 50%)
2020. 9
1915년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다. 그는 빛보다 빠른 것은 존재할 수 없으며, 시간은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고 상대적으로 다르게 흐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2020년, 여기 전역이 한 달 남은 병장 H가 있다. H는 상대성이론을 실험적으로 경험하는 중이다. 남들과는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다는 뜻이다. 국방부의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간다는데, H의 시간은 무슨 영문인지 가질 않는다. (아인슈타인도 말년 병장을 겪어봤더라면 그의 이론을 수정했을 것이다.)
이쯤 되면 H를 건드는 사람은 없다. 어디 몰래 숨어서 핸드폰을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모든 것이 지루해지다가도 갑자기 걱정이 밀려오기도 했다. 전역하면 뭐 하지, 복학하면 뭐 하지.
H는 찬란했던 새내기 생활을 떠올린다. 아니, 찬란하다고 부르기엔 술 냄새가 너무 난다. 그래서 이번엔 공부했던 것들을 생각해 내려 한다. 당연히 뭔가 떠오를 리가 없다.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뒤적인다. 앞으로 다가올 학기에서 그를 이끌어줄 무언가를 찾길 희망하면서 말이다.
그래 일단 나가면, 신촌에 가보자. 고향에 돌아가 보는 것처럼.
2020. 12
신촌의 길 끝에 유서 깊은 학당이 있는데 서강(西江) 학당이라 불렸다. 서강의 유생 중에서 ‘황’이라는 사람과 ‘도’라는 사람이 있었다. 황과 도는 술을 마시는 것을 즐겨 음주에 누구보다 열과 성을 다하였다.
어느 날 황과 도가 주막에서 소주와 맥주를 시켰다. 소주와 맥주를 섞어 먹는 경우 다음날 숙취가 더 심하다는 것을 황과 도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각자 한 종류의 술만 먹기로 약속하였다. 딱 2가지의 술을 시켰기 때문에, 황이 소주를 먹는다면 도는 맥주를 마실 것이고, 황이 맥주를 마신다면 도는 소주를 마실 것이다.
따라서 몇 시간 뒤, 신촌의 빨간 잠망경 앞에서 얼큰히 취한 황이 소주 병나발을 불고 있다면, 도는 맥주를 마셨다는 사실을 직접 관찰하지 않고도 알 수 있다. 이 결과는 우리의 상식에 부합하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 대해 양자역학적으로 고민해 본다면 문제가 흥미로워진다.
제주 국제공항 앞에서 소주병을 들고 주정을 부리고 있는 황이 관측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일반적으로 상상해 본다면, 황은 주막에서 소주를 챙겨 공항으로 향했을 것이다. 비행기 탑승 수속을 마칠 때에도 분명 소주를 들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기내에 액체류는 반입이 불가능하므로 화물칸에 소주를 실어 날랐을 것이다.) 제주도에 도착한 황은 누군가에게 관측되기 바로 직전까지도 소주를 들고 있었을 것이다. 신촌에 남은 도의 손에는 분명 계속 맥주가 들려 있었을 것이다.
이제 황과 도가 ‘양자’라고 가정해 보자. 양자역학에 의하면 관측되기 전까지 여러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가, 관측되는 순간 이중성이 붕괴되고 하나의 상태로 결정된다. 즉 황과 도는 관측되기 전까지 소주와 맥주 모두를 양손에 들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관측되면 마치 처음부터 하나만을 들고 있었던 것처럼 상태가 결정된다. 제주도에서 관측된 황이 소주를 들고 있는 것으로 결정된다면, 그 순간 도의 손에는 맥주가 들려 있을 것이다. 무조건 둘이 다른 술을 마셔야 하므로.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도는 황의 관측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황과 도가 물리적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든지, 심지어 서로 얼마나 격리되어 있는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한쪽이 관측되는 순간, 뭔가 알 수 없는 영향을 다른 한쪽에게 마법처럼 끼쳐 두 주정뱅이의 상태가 정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이다.

나 어쩌면 그림에 재능이 있을지도?
아인슈타인은 이것을 ‘먼발치서 일어나는 유령 같은 영향(spooky actions at a distance)’라고 하였으며,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라며 죽기 직전까지도 양자역학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현재까지 밝혀진 결과에 따르면, 그가 틀렸다.
2021. 3
연어가 먹고 싶다.
귀향에 대해 고민해 보다가 내린 결론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모두가 태어난 곳으로 꼭 돌아가야 한다면 나는 기뻐해야 할까. 평생을 서울에 살아서 먼 길을 동여매야 할 필요가 없다고 안심해야 할까. 안심이란 말을 방금 해서 안심 스테이크를 떠올렸다면 나는 연어에게 미안해야 할까. 연어는 열심히 강물을 거슬러서 그리 기름진 육질을 가지게 된 걸까. 그렇다면 열심히 운동해서 몸을 가꾼 후 식인종 섬에서 특A급 육질로 분류되어 가장 먼저 잡아먹히게 된다면 나는 기뻐해야 할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삼겹살을 좋아하는 것을 보면 적당히 살을 찌우는 편이 좀 더 매력 있는 육질이지 않을까.
하는 참에 신촌에 도착했다.
일단 나가면 곧장 신촌에 가보자라는 몇 달 전의 다짐은 지킬 수가 없었다. 내 가족과 친구들 외에도 이름이 ‘코’로 시작하는 단백질 핵산 결합체가 나의 전역을 반겼기 때문이다. 덕분에 전역 직후 조용한 겨울을 맞이해야 했었다.

전역 축하해요! 근데 이제 바이러스를 곁들인…
최소 수 십 개월 만에 신촌을 관측하였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너무 많이 바뀌어서 본래 하려던 변화량에 대한 논의가 궁색해졌다. 자연계에서는 미분 불가능할 정도의 변화량은 관측되지 않는다고 하던데, 이젠 잘 모르겠다. 문을 닫은 상가들을 보며 걱정스럽기도 하였다. 더 낡을 수 있었던 문턱들이 영영 새것으로 남았다. 나는 잘 있었는데 신촌은 잘 있지 못했나 보다.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이전의 신촌을 잃어버린 나는 어찌해야 하나. 어떤 시인이 말하길, 외로움에 기억을 더하면 괴로움이 된다던데. 역으로 기억을 쭉 뺏겨 외로움만 커지고 나는 괴로울 수도 없다. 아끼던 바에서, 식당에서 사진이라도 많이 찍어둘걸. 목욕을 오래 하면 삼투압 때문에 쪼그라드는 손가락 마냥 찌그러진 마음을 주섬주섬 챙겨서 집으로 돌아왔다.
간신히 강을 거슬렀는데 간척 사업으로 고향이 사라졌다면 연어는 어떻게 해야 할까?
2021. 6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어렸을 때 한번쯤은 해봤을 게임이죠?

아니.. 이런 버전 말고..
출처 : 오징어 게임 (넷플릭스 코리아)
룰은 간단합니다. 술래가 벽을 보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라는 구호를 외칠 때 사람들은 움직일 수 있습니다. 구호가 끝나고 술래가 뒤를 돌면 다른 사람들은 움직일 수 없고, 만약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면 술래가 잡을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쳐다보고 있는 화살은 결코 날아가지 않는다.’ 과장된 표현이지만,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볼까요. H라는 사람이 번지점프를 하러 번지대 위로 올라갔다고 합시다. 만약 H가 양자라면 관측 전에는 여러 가지 상태가 중첩되어 있으므로, 번지대 위에 올라가 있거나 이미 떨어진 상태가 중첩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를 관측하며 물어봅시다. ‘너 뛸 거야?’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뛸 거야?’라는 질문을 듣고 고민하다 10초 안에 번지를 뛴다고 가정해 볼까요. 그러면 번지대 위에 H를 올려 놓고 3초 뒤에 관측했을 때, 아마도 그는 아직 번지점프를 뛰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시 올려놓고 이번엔 30초 뒤에 다시 관측합시다. 그는 높은 확률로 뛰었겠죠?
그렇다면 이번엔 H를 올려 두고 1초에 한 번씩 관측해봅시다. 마치 계속 물어보는 거죠.
‘너 뛸 거야? 진짜 뛸 거야? 정말로? 뛸 거야? 안 무서워? 뛸 거야? 정말로? 진짜로?……’
결국 그는 번지 점프를 뛸 수 없습니다. 질문을 듣고 1초 만에 뛰어내릴 확률이 비교적 작기 때문입니다. 물론 관측이 계속된다면 결국 H는 뛰어내릴 것입니다. 허나 그 시간을 평균인 10초보다 크게 늘릴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이것은 아주 부풀려진 예시지만, 실제로 붕괴하는 입자를 아주 짧은 주기로 계속 관측하면 입자의 붕괴를 상당히 지연시킬 수 있습니다. 이는 실험적으로 가능함이 밝혀졌으며, 양자 제노 효과(Quantum Zeno Effect)라고 이름 붙여졌습니다.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사실은, 관측되는 동안에는 상태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관측이 되면 상태가 하나로 정해져야 하기 때문이죠. 마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구호를 마치고 뒤를 돌아본 술래 앞에서 아무도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2021. 9
신촌을 관측하지 못하고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 내 마음속 신촌은 여러 가지 상태가 중첩되어 있었어. 코로나로 인해 변해 있을, 혹은 크게 변하지 않았을 신촌을 슈뢰딩거가 고양이 모시듯 마음에 고이 넣었었지. 그러다 마침내 올해 초 신촌에 가보았을 때, 처음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었어. 안 그래도 전역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이는데 심신이 상당히 미약한 상태였거든.
웃기게도 그땐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 기억이 사라지고 빼앗긴 것이 아니라, 사실은 순수한 것들만 남아 추억으로 결정화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거든. 게다가 내 마음과 그 추억들은 양자적으로 얽혀(entangled) 있어서, 굳이 관측하지 않아도 거기 있음을 알 수 있어. 내가 스스로를 관측할 때마다 그 추억들은 더 단단히 울려서, 덕분에 내 마음도 덩달아 선명하게 진동하겠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지, 알 수 없는 영향을 서로에게 마법처럼 끼쳐서 말이야.
그리고 그거 알아? 빨간 잠망경 끝에 달린 게 사실 거울이 아닌 거? 신촌이 바라본 우리의 상(像)이 맺히는 곳이니까 굳이 말하자면.. 망막이 되겠다. 그러니깐 우리는 항상 신촌의 안구 안에서 만남을 약속했던 거지. 수정체와 망막 사이 어딘가에서 말이야.

갑자기 좀 징그러운 것 같기도?
그 말인즉슨 내가 신촌을 관측했을 때 신촌도 필연적으로 나를 관측하기에, 으레 나 또한 이중성이 붕괴되고 하나의 상태로 결정되어버린다는 거지. 따라서 양자 제노 효과에 의해 내 상태를 변화시킬 수 없으므로 스스로 성장할 수 없게 되어버려. 어린 스물의 비행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지. 즉 새로운 신촌을 관측하는 것은, 새로운 내가 관측되는 것의 필요조건인 동시에 충분조건이기도 해. 고로 내게 필요한 것은 사실 귀향이 아니라 변곡(變曲)이었던 거지.
그러니까 괜찮아. 떠남으로 인해 바뀐 신촌도 바뀐 너도, 바뀔 신촌도 바뀔 너도. 누구의 탓도 아니니까 우리 되도록이면 조금만 아파하자. 대학가인 신촌은 필연적으로 터전임과 동시에 둥지이니까.
너에게, 그리고 신촌과 중첩된 모든 양자들에게 전해요.
모쪼록 신촌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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