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여기와 저기, 스플릿 세컨드 그리고 공든
안녕, 친애하는 당신. 우리가 만난지 꽤나 오래 되었지. 아니면 고작 며칠 전의 일이었나. 그동안 너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야. 단지 요즘은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고 그래. 하루는 일년처럼 일년은 찰나처럼 느껴지는데. 내 말은 그러니까
해치워야 하는 생활의 문제에 급급하다가 조금 숨이 막히면 나는 달팽이를 생각해. 기다란 줄기의 한쪽 끝에서 반대편까지. 조금씩 움직이는 작고 동그란 집과 그 아래 달린 가여운 바퀴 같은 것. 수많은 마디와 마디 사이로 몸을 밀어내면서 그들의 생은 우리의 그것과 조금 다르게 흐르지 않겠니. 우리가 하루라고 부르는 것이 그들에게는 수많은 시간의 편린들이 모인 덩어리일지도 몰라. 달팽이의 나날을 나누는 단위로는 일 월 년이 아니라 밀리미터와 센치미터 등등을 써야 할지도.
그러니까 한창 달팽이에 감정이입 중인 나도 그들의 단위를 빌어서 생각하는 중이랄까. 다시 생각해보니 우리는 한 팔십 센치 전에 만났어. 응. 그래. 헛소리는 이쯤에서 멈출게.

그 얘기 했었나. 내가 제일 좋아하던 그 카페 문을 닫았다고. 쟤 캠퍼스 안에서 안 보이면 거기에 있더라. 누군가 나에 대해 그랬을 만큼 한동안 자주 다니던 곳이었지. 우리도 그곳에서 종종 만났어. 때로는 촉박하게 밀려있는 과제를 해치우느라고, 혹은 사랑과 우정과 미래 따위의 시시껄렁한 주제로 수다를 떨면서. 그런 수다가 좋았어. 네가 눈썹과 콧잔등을 조금씩 찡그리며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그 내용이 무엇이고 왜 대화가 시작되었던 간에, 우리가 서로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되어있다는 감각. 그런 기분이 따뜻하고 이내 조금은 덜 외로워져서.

신촌에서 브라우니가 가장 맛있었던 곳.
그런 것치고 내가 말 걸기 좋은 성격은 아니기는 해. 나와 카페 사장님의 관계 생각나니. 그렇게 오래 다니면서도 늘 서로 데면데면했잖아. 뒤에서는 공든이 최고라며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음에도. 경계에 예민한 사람들 사이라 보통은 반가운 눈인사 정도가 소통의 전부였지만, 아무래도 더 어른인 쪽은 사장님이라 가끔 먼저 이런저런 말을 건네주시기도 했어. 어느 날 내 글을 정말 감명 깊게 읽으셨다고 말씀하신게 생각난다.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되면 특히나 행복해지다가도 금세 도망치고 싶어지는 것 같아. 나 자신보다도 나에게 더 많은 믿음을 보여주는 사람들. 힘없이 태어나 자꾸만 흩어지는 그 말들을 애써 그러모아주는 게 고맙고 미안한. 그래서 그 날도 대충 얼버무리고선 잠시 머물다 나왔지. 그래도 여기가 나에게 정말 소중한 곳이라고, 나름 그런 얘기를 하기는 했어서 다행이긴 해.

카페가 문을 닫던 날. 우리의 한 시절을 상징하는 그 곳에서 한참을 미적대다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건네는데 여전히 별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더라.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 말에 어색하게 웃으시며 배웅하시는 사장님. 그때까지만 해도 그 한결 같은 관계가 재밌고 아쉽다는 정도의 기분이었는데.
얼마 뒤 같은 자리에 묘하게 비슷한 카페가 들어섰지만 들려보는 일이 썩 내키지 않았을 때, 문득 내가 무언가 놓쳐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공든이 문을 닫고도 사장님께서 한동안 문 앞에 입간판을 세워두셨다고 해. 중경삼림 속 대사였는데, 나는 미처 사진으로도 남기지 못했네.

이 사진은 나중에 공든 열성팬 이중엽씨가 보내줬어.
그렇지. 나는 끊임없이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모두에게 무심하고 거리를 두는 성격이야. 순한 말씨와 적극적인 척 하는 태도로 그런 모순을 감출 수 있던 때가 있었어. 조금씩 닳아버리고 날이 서다보니 이제는 여지없이 차갑게 부유하는 신세지만.
다만 그런 내게도 관계에 대한 걱정은 있어. 예컨대 너와 나 사이의 팔십 센치, 사회적 거리라는 일 점 이 미터 바깥보다는 가깝지만 가장 친밀한 오십 센치 안쪽보다는 먼. 그런 거리가 너에게는 너무 섭섭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조금 더 다가섰어야 하나. 가끔 내가 조금 더 가까워질 땐 그 반대로, 너에게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하지만 나의 최선은 여기에서 이 간격을 굳게 붙드는 일인걸. 그동안 너를 생각하지 않는다는게 아니야. 너무 많이 생각하고 있지도 않고. 날 믿어줄 수 있니.
있지, 다음에 만나면 같이 갈 곳을 찾았어.

서대문 우체국 버스정류장 근처를 지나다 보면 눈에 띄는 블랙 앤 화이트 톤의 카페가 있어. 딱 봐도 미니멀리스틱한 테이블에, 한 켠에는 잡지들도 멋지게 쌓여 있어서 갤러리 느낌이 나더라. 여기까지만 들으면 너는 조금 의아하게 여길 것도 같다. 직선과 무채색의 철근으로 이루어진 공간보다는 목재의 온도와 촉감을 좋아하는 나니까. 스스로 건조해질수록 바깥에서 온기를 찾으려는 탓일지도.

그런 생각 때문에 이곳에 들리기 전 조금은 냉랭한 이미지를 상상했던 것 같아. 스플릿 세컨드, 찰나라는 그 이름에서부터 어떤 날카로운 생각의 모서리가 드러나는 것 같았지. 그런데 거기에 묻어나오던 건 사장님의 예리함보다는 예민함이 아니었나 싶어. 표현이 크고 많으신 편은 아니지만, 오래 머무를수록 얼마나 부분 부분에 세심하게 마음을 쓰시는지 알 수 있었어. 화장실을 찾을 때는 열쇠와 함께 손세정제를 건네주셔. 언젠가는 너무 이른 시간에 들렀다가 아직 구워지는 중인 쿠키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걸리셨는지 따뜻한 차 한잔을 내어 주시더라. 별다른 대화 없이도 배려와 존중이 느껴지는 태도. 내가 왜 공든을 떠올렸는지 알 수 있겠지.


그곳에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브라우니가 있었다면 스플릿 세컨드에서는 과일 타르트를 꼭 시켜봐야 해. 아몬드 크림이 들어찬 고소한 타르트지 위로 달콤한 크림과 상큼한 제철 과일. 실패하기도 힘든 조합이지. 가끔 타르트가 시즌 아웃 되면 주문이 안 되기도 한다는데,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애플 크럼블도 맛있고 조금 가볍게 커피와 곁들일 디저트로 초코칩 쿠키가 괜찮을 것 같아. 저렴한 가격만큼 사이즈는 작은 편이지만 따끈하게 구워주셔서 겉바속촉하고 초콜릿이 녹아내리는 느낌도 좋다구. 음료 중에서 나는 보통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편이지만, 보다 달달한 맛이 당긴다면 크림라떼나 아포카토 등등도 좋겠다.

얼마 전까지 나왔던 샤인머스캣 타르트. 곧 딸기 버전이 나온대.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건 이곳의 마스코트 아토. 내 이상형을 여기에서 찾았지 뭐니. 입버릇처럼 얘기하지만 나는 검정 고양이들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동물이라고 생각해. 방금 전까지 한참을 내 옆에 앉아서 한번씩 눈을 마주치길래 알았는데, 눈알이 커다랗고 새파란 구슬처럼 반짝이더라. 마치 바다를 담아놓은 것 같았어. 내 눈에 콩깍지가 씌인건지는 몰라도. 아, 이렇게 쓰면서도 너무 설렌다.

사실 지금도 카페 안. 잠깐 일어났다가 아토한테 자리를 뺐겼어.
재밌는 건 아토가 사장님네 고양이가 아니라는 점이야. 사실 옆집에 사는 녀석인데 카페가 문을 여는 시간에 맞춰서 놀러왔다가 문 닫을 때쯤 돌아간대. 중간중간 동네 산책도 다녀온다나. 이 사연을 알고 나니 테이블에 올라선 녀석에게 아토야 안돼, 어서 내려가 하시던 사장님의 차분한 목소리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웃음이 났어.
고양이는 처음부터 너무 관심을 표현하기보다는 그것만의 공간을 지켜주어야 친해질 수 있는 동물이라던데. 아토가 이곳을 직장으로 삼은 것도 사장님의 따뜻한 거리감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

닿을 듯 말 듯한 자리에 앉은 채 딴청을 부리는 아토처럼. 내가 가끔씩 너의 말을 듣고도 침묵하거나, 한참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시간을 내달라고 하는 것도 그래. 자꾸만 자기변명을 하는 것 같아서 민망하지만. 나에게는 나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거리가 있어. 그리고 무례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걸. 하지만 그런 동시에 당신이 중요하고, 당신이 필요하니까. 그래서 그냥 여기에 있는거야.
걱정이 되는 것은 그럼에도 너에게 이 거리가 너무 막막하고 차갑게 느껴지는 때가 있을까봐. 내가 그동안 아끼는 카페들에서 배운 게 있다면, 한걸음 뒤에서 타인에게 믿음을 주는 데에는 어떤 행동과 태도가 필요하다는 점인 것 같아. 따뜻한 외투라도 벗어서 건네기엔 우리가 서로 너무 멀리 있으니 이렇게 편지나마 적어서 보내본다. 무슨 말인지 알지.

나는 앞으로도 망설이지 않고선 너를 이해한다고 말하지 못할거야.
우리가 언젠가 외롭지 않으리라거나, 혹은 어떠한 생의 의미를 찾으리라고도.
그래도 우리 다음에는 같이 여기에 오자.

스플릿 세컨드
서울 서대문구 성산로 374
평일 11시부터 18시까지, 주말 12시부터 18시까지
매주 화요일 휴무

공든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 10가길 2
영업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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