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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2021 · 12 · 22

169. 밤의서점

Editor 소한

2020년 1월 

스무 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모르는 번호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ㅁㅁㅁ님 앞으로 000님으로부터 책 선물과 함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약도를 첨부 드리니 좋은 시간에 들러주세요. 밤의서점 생일문고 드림.’ 

 책, 선물, 편지라는 단어에도 들떴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나가야만 하는 계기’가 생겼다는 점이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맞이한 겨울은 유난히도 시렸다. 합격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친구들 사이에서 재수학원 개강 날짜를 받아둔 나는 마음을 편히 둘 곳이 없었다. 집 안에서는 내가 부모님 눈치를 살펴야 했고, 집 밖에서는 친구들이 내 눈치를 살폈다.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내 스물은 왜 이 모양 이 꼴이냐며 눈물을 찍어내는 것은 하루 일과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혼자 청승 떠는 생활에 지쳐가던 참에 만난 귀중한 외출 기회에 재수생은 못 이기는 척 집을 나섰다. 밤의 서점과의 첫 만남이었다. 

 


마음의 빛을 찾는 한밤의 서재

 

‘여기가 맞나?’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도로변과 평범한 빌라들 사이로 새어 나오는 노란 빛을 발견했다면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남색으로 칠해진 벽에 노란 조명이 군데군데 켜져 있어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닮은 작은 서점, 밤의서점이다.

 


마음에 담아가세요

 

 참고로, 밤의 서점은 내부촬영이 금지되어있다. 손님들이 이곳을 이미지로만 남기기 보다는 ‘서점’으로 들러 오롯이 책에 집중했으면 하는 점장님들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사진 없이 서점을 온전하게 소개하기는 어렵기에 점장님께 양해를 구해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사진을 찍어도 괜찮겠느냐는 말을 꺼내기까지 무려 20분이 걸렸다. 

 


소심한 에디터에게 정말이지 소중한 사진들이다

 

 중앙을 기준으로 나란히 줄지어 선 책장들이 만든 작은 공간들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져있다. 밤이라는 시간이 공간으로 나타난다면 바로 이런 느낌이 아닐까. 밝지 않은 조도과 어둡고 차분한 색의 벽, 따뜻한 느낌이 드는 나무 책장들이 만들어내는 아늑한 분위기가 너무나도 밤 그 자체다. 

 


적당히 좁고 어두운 구석탱이는 마음의 안정도 제공한다

 

 친절하게도 구석구석에 의자가 놓여있다. 의자에 앉아 두 분의 점장님과 단골 손님들이 책 띠지에 써두신 추천 글을 읽으면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선뜻 손이 가지 않던 분야의 책들도 정갈하게 쓰여진 점장님의 추천사를 읽고나면 한 번쯤은 홀린 듯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방황만 하고 있는 사람도 읽어도 될까요?

 

 하나하나 찬찬히 읽다보면, 요즘 하는 고민거리를 띠지에서 만나는 행운이 찾아오기도 한다. 밤의 서점의 마법같은 큐레이션 덕분인지, 사람사는 일이 다 비슷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코로나 시국에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설렘

 

 카운터 좌측에는 밤의서점 “블라인드 데이트”가 있다. 책을 고르기가 어렵거나, 좀 더 운명적인 방법으로 책과 만나고 싶다면 안성맞춤이다. 데이트를 꼭 사람과 해야한다는 건 편견이 아닐까? 책과의 데이트로 얼마든지 따뜻한 연말을 보낼 수 있다.

 


빼곡히 서서 주인을 기다리는 책들

 

 카운터 우측에는 남색으로 곱게 포장된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있다. 밤의 서점을 방문하는 계기가 됐던 ‘생일문고’다. 조금 설명을 하자면, 생일문고는 생일이 같은 작가의 책을 선물하는 것으로 어떤 작가의 어떤 책이 들어있는지는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알 수 없다. 우리 삶이 그렇듯 생일문고도 모험이기에 교환과 반품은 불가능하다.

 스무살 생일선물로 받은 모험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쭈뼛거리며 ‘저… 생일문고..’하고 겨우 운을 떼어 건네받은 책은 영국 소설가가 쓴 요리에 관한 수필집이었다. 전혀 관심이 가지 않는 주제였다. ‘부엌’, ‘사색’, ‘레시피’라는 별 감흥없는 단어들과, 불평불만에 가득차있는 낯선 작가가 팔짱 끼고 서있는 표지. 이 꼬장꼬장하게 생긴 아저씨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책을 반대로 들었다.  

 


뭘 봐요

 

 역시 모험이라는 건 뜻하지 않은 상황의 연속인 걸까. ‘밤의서점 이야기 상자’에서도 기대했던 것과는 영 딴판인 편지를 받았다. ‘이야기상자’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A4용지에 한바닥 적어 내면 다른 손님이 두고 간 이야기와 바꿀 수 있는, 아날로그적이고 감성적이라서 밤의 서점 다운 서비스였다. 낭만적이고 따뜻한 편지를 뽑아들기를 기대하며 내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수시로 쓴 6곳의 학교에 모두 ‘광탈’하여 강제로 재수하게 된 가엾은 내 처지와 궁상맞은 일상, 그리고 앞으로의 수험생활에 대한 힘찬 다짐까지. ‘힘찬 다짐’이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참 두서도 없이 써냈던 것 같다. 

 내가 쓴 편지를 상자에 넣고, 곱게 4등분으로 접혀진 이야기들 사이에서 빼곡한 글자가 비쳐 보이는 듯한 종이를 집어 들었다. 단정한 글씨체를 예상했건만, 막상 펴보니 삐뚤빼뚤한 지렁이 글씨였다. ‘이야기 상자’의 규칙상 자세히 알려줄 수는 없지만, 나와 동갑인 편지의 작성자는 어릴 적부터 느껴온 열등감과 근래에 느끼는 우울함과 실망감으로 편지를 가득 채워뒀다. 그 어둡고 거친 표현들에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하지만 동시에 그 우울하고 서툰 편지에 묵직한 위로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SNS에서 쏟아지는 친구들의 대학 합격 소식과 막연히 ‘원하는 대(大)로’ 이루어질 거라고 장담하는 재수학원 홍보물들 사이에서 스무 살의 나는 숨이 막혔으니까.  

 


겨울하면 생각나는 곳

 

 2021년 12월

스물 두 살이 되는 올겨울도 시리기는 매한가지다. 

 재수생 시절에 그렇게도 선망하던 대학생이 됐지만, 나는 여전히 대체로 불행하고 자주 무기력하다. 그런 내게 낮 시간은 유독 가혹해서 할 일이 빼곡하게 쓰여있는 캘린더와 정확히 이쪽을 쏘아보는 노트북 화면,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핸드폰 알림으로 나를 끊임없이 독촉한다. 그 속에서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바로 누웠다가 모로 누웠다가 해가며 일상을 회피하기 바쁘다. 

 하지만, 날이 저물고 다정한 밤이 오면 작은 조명 아래에서 영국의 문학가가 부엌에서 하는 시니컬한 불평을 나름 즐겁게 읽는다.  이제는 팔짱을 끼고 삐딱하니 서있는 줄리언 반스가 그려진 표지도 꽤 달갑다. 표지에 사람 하나가 냅다 누워있고, 그 위에 ‘괜찮다’, ‘다행이다’, ‘쉰다’는 표현을 달아 대형서점 어딘가에 진열해둔 책들보다 훨씬.

 


이젠 마음에 드는 그의 건조한 문체

 

 아쉽게도 이제 ‘밤의서점 이야기상자’는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렇게 어딘가에서 조용히 일상적인 불행을 나눌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것 아닐까. 빛나는 성공들 사이 남루해서 더 귀한 실패를 나누고, ‘무한 긍정’ 대신 시니컬한 농담 한마디 던지다 보면 소소한 불행들이 꽤 견딜만 해질지도 모른다.

 특별한 공간 하나로 인생이 행복해지는 마법 같은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밤의서점에서 데려온 따뜻한 불행 한 권과 함께라면 시린 밤도 그런대로 괜찮다.

오늘은 동지(冬至), 밤이 가장 긴 날이다.

 


밤의 서점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성산로 309-51

일요일, 월요일 휴무

화요일~금요일 17:00~21:00

토요일 14:00~21:00

@librairie_de_nuit

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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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한

겨울을 사랑하는 재미지상주의자!

COMMENTS

댓글 3

  1. 밍이
    밍이 2021.12.24 14:15

    소한 에디터님의 표현은 항상 마음을 울려요. 에디터님은 어떠한 기분이든, 그 상태를 적절한 말로 풀어내시는 것 같아요. ‘불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어감에서 벗어나 행복하지 않은 상태를 소소하게나마 즐기고 싶어졌어요. 글을 읽다 문득, “밤의 서점, 나도 가고 싶다.”는 말이 툭 튀어나왔어요. 그만큼 글에서 에디터님의 진정한 마음을 느껴서겠죠?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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