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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2023 · 05 · 24

201. 아카라카의 노천극장

Editor 개미

일 년에 단 한 번 5월의 어느 하루,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은 온통 푸르게 물든다.

노천극장은 약 7천 5백석 규모의 고전적인 계단형태의 극장이다. 1934년부터 캠퍼스와 함께해온 유구한 역사를 지녔으나, 지금의 모습은 늘어난 대학 규모에 맞게 1999년 새로 건립해 만들어지게 되었다. 화강석을 사용한 무채색의 조형물로 고전적 건축미를 지닌다. 청송대와 천문대 사이에 위치해 녹지가 건축물을 둘러싸고, 위로는 천문대가 보여 아름다운 조형물로서의 가치를 더해준다. 언더우드관을 중심으로 하는 고전적인 스타일의 건물군들과 어우러져 ‘연세 정신’을 담은 기념비적 건축물로 캠퍼스의 경관에 기여하고 있다.

평소 노천극장은 입학식, 졸업식 같은 주요 학교 행사 뿐 아니라 외부의 각종 콘서트에도 이용된다. 때문에 학교를 거닐다 보면 유명 가수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시간을 내 입학식에 가보지 않았다면 5월 이맘때쯤에야 노천극장을 처음으로 보게된다. 하얗게 바랜듯한 고전주의 미학을 뽐내는 정적인 조형물이 아닌 파랗게 물든 역동적인 흐름으로 말이다.

 

이 흐름은 아카라카 날 노천극장으로 향하는 발걸음 발걸음 마다 느낄 수 있다.
연희동 한구석의 집에서 출발하면 분명 나만 파란데,
신촌에 가까워지는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파란 사람들이 나를 반긴다.
신촌역에서, 연세로 옆 어느 골목에서 파란 무리들이 나와 모인다.
모두가 노천극장을 향해 굴러가며 파랑 웅덩이를 이룬다.

파랑 무리에 이질감 없이 녹아드는 것. 이 시절에만 할 수 있는 묘미. “좋을 때다”라는 동의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말을 들으며 지금을 즐긴다.

 

이날의 노천극장은 나를 현재에 붙드는 좋은 방법이다. 1년 중 가장 좋은 계절을 즐기기에도, 지금의 나에게 몰입하기에도. 이 사실을 나의 학창 시절 마지막 아카라카에서 깨닫는다. 이 시절에만 즐길 수 있는 푸르름이 있다. 이 물결에 녹아들고,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언젠가 나에게서 사라져 버린다. 그 순간이 지속되는 한계에 다다라서야 이 사실을 깨달아서 속상하다. 그동안 지금의 나에게 몰입하지 못한 나는 과거와 미래의 그리고 타인의 파편 속에서 둥둥 떠다니기만 했는데.

지금 이 순간에 과몰입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자리를 찾아본다. 극장이란 무대를 보는 것이 본질이기 때문에 시야가 좋은 것이 우선. 당연히 중앙 앞좌석이 가장 좋지만 그 자리는 카메라와 각종 무대장치를 위한 콘솔이다. 그렇다고 중앙만 고집하다가는 무대 위의 이쑤시개만 관람하다 올 수도 있으니 최대한 무대 가까운 곳을 노리는 것이 좋다. 측면의 시야도 나쁘지 않다. 특히, 파란 물결을 보기 가장 좋은 자리라고나 할까. 축제의 생생한 현장감을 원한다면 맨 뒷자리가 좋을 수 있다. 오히려 넓고 그늘져있어 쾌적한 축제를 즐길 수 있다. 흥겨운 리듬에 맞춰 춤을 출 수 있는 것은 덤.

나는 마지막 파란 물결을 더 잘 보기 위해 측면을 택했다. 무대와도 가까워서 공연도 잘 보여 마지막 아카라카의 노천극장을 즐기기 좋은 자리선정이었다.

 

이 순간을 위한 과몰입 두번째, 드레스코드 맞추기. 이날의 노천극장의 장소성은 파랑을 뒤집어쓴 모습에서 나온다. 아카라카를 즐기고 싶다면 적어도 하나의 파란 아이템을 챙겨야 한다. 본인이 생각했을 때 나도 이 파란 물결의 하나라고 느낄 수 있는 파란 아이템을. 그게 로열 블루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파란 물결에 동참한다는 게 중요하다.

나는 그간의 파란 노천극장을 즐기지 못한 서러움을 풀겠다는 의지를 가득 안고, 파란색으로 나를 도배해 본다. 파란 타투스티커를 얼굴에 잔뜩 붙이고, 파란색의 긴팔과 반바지를 입는다.

 

초등학생 때는 교복을 선망하며 중학생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중학교 시절엔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며 좋은 고등학교를 동경하고,
고등학교 시절엔 얼른 대입에서 벗어나 성공적으로 대학생이 되고 싶었고,
대학에 오니 얼른 돈을 버는 사회인이 되고 싶었던 나.

돌아보니, 아깝기만 하다.

이제부터라도 지금 나의 모습으로 살아있어 봐야지.

지금, 아카라카 날의 노천극장을 만끽하며.

 

이날의 노천극장에서만큼은 파랑의 힘을 빌려 현재의 나에게 몰입해 본다. 이 순간의 나를 살아가는 건, 일상에선 너무나 어려운 일이지만 이날 하루, 이곳에서만큼은. 파란 모두와 함께하니 금세 지금, 이 순간으로 빠져든다. 아카라카를 외치며!

동기들은 어느새 졸업하고, 회사로 가거나 대학원에 가고 다들 다른 삶의 단계를 향해 나아갔지만 나만 아직 고여있다는 사실도, 파란 물결에 몸을 맡기고 받아들여 본다. 남들보다 늦었지만, 나도 흘러가고 있다고. 나는 고여있는 웅덩이가 아니라 이 푸른 호수를 지나가는 물줄기라고.

감성적인 음악이 울려 퍼지는 파란 호수를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 이곳은 호수 같다고. 매년 생기는 이 호수는 항상 푸르지만, 그 안의 파란 이들은 매번 다르다. 매년 새로운 사람들이 흘러들어오고, 누군가는 이곳을 지나쳐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 어떤 사람은 빨리 흘러가 버리고 어떤 사람을 이곳을 배회하며 천천히 흘러간다.

끝없이 고여있을 수는 없다. (고여있고 싶어도 학교에서 퍼내 버리니까)

그러니 나도 흘러가겠지. 나는 흘러가고 있지.

 

어느새 싸이의 무대를 마지막으로 노천극장에 고여있던 파란 호수는 신촌으로 흘러간다.

학교에서의 삶도 오늘의 노천극장과 같겠지. 지금 이곳에서 만나 순간을 공유하다가도 각자의 길로 흩어지겠지. 내 옆에 있는 너희들도 곧 어디론가 흘러가겠지. 지금 만날 수 있던 것을 감사해야지. 각자의 길을 가더라도, 이 순간을 기억해야지. 잊지 말아야지.

 


 

연세대학교 노천극장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 50

개미
AUTHOR PROFILE
개미

잔치의 시선으로 신촌의 장면과 사람, 장소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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