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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2023 · 05 · 29

진절머리

Editor 단

Int. 

 

 

빨간 염색모에 뿌리가 검게 자란 남자가 뒤를 돌아서 있다. 무언가를 하던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린다. 당신을 응시하며 입을 연다. 

 

 

__ : 아, 오셨군요.

 

 

남자가 앞치마에 손을 대충 닦는다.

 

 

__ : 예약은 하셨어요? 

 

 

남자가 조금 가까이 다가온다.

 

 

__ : 왜 아무 말도 안 하세요?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__ : 아직 스타일 결정을 못 하셨어요? 그럼 하나만 물어볼게요. 컷이에요, 펌이에요?

 

 

남자가 눈썹을 찌푸린다.

 

 

__ : 이것도 긴가민가 한 거면 아예 시작도 못할 거 같은데. 일단 여유를 갖고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죠. 아무데나 편한 곳에 계세요. 결정했을 때 저 부르시면 돼요.

 

 

남자의 옷에는 금속 이름표가 달려 있다.

 

 

 

 

[진저]

 

 

 

 

 

Title                    진절머리

S#0  빨갛고 약간 검은 남자

C#0                          조우

Place                  제 4의 벽

Time – – – – – – – – – –

시작.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아 스읍, 나 그렇게까지 옛날 사람은 아닌데. 

 

 

 

음. 

조금은 최근에, 평범한 청년 하나가 살고 있었습니다. 

평범한 외모, 평범한 유년시절, 평범한 가난, 취미, 삶. 그의 인생을 리트머스 종이에 비유한다면 산성과 염기성 사이. 그러니까 시뻘건색과 시퍼런색의 중간. 딱 그 정도의 어중간함이라고나 할까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못하는 명도와 채도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평범한 청년에게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바로 꿈이 없다는 것. 

 

 

 

미취학 아동일 때부터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그리고 성인이 된 이후까지 ‘꿈’은 청년의 발목을 계속 붙잡았습니다. 꿈, 꿈, 꿈!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꿈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해야하며 어디로 나아갈지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일이 터졌습니다. 홧김에 미용실에 들어가 머리를 시뻘겋게 물들여버린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치우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을까요. 청년은 이글이글 타는 듯한 머리 스타일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준 손길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청년은 미용실 원장에게 조수로 일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일손이 부족했던 원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청년이 먼 훗날 알게 된 것이지만 그건 악마의 가면 비스무리한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청년은 먼저 미용사로 있던 [쥐똥] 그리고 [말똥]과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은 없는 법. 청년은 조금씩 흥미를 잃어갔습니다. 권태는 야금야금 의지를 먹어 치웠고 무기력은 그 답 없는 폭식의 촉매와도 같았습니다. 청년을 움직이는 것은 그저 관성, 지금껏 해왔던 행동들의 본능적 실천. 단지 그뿐이었습니다. 청년은 불이 타고 없어진 자리에 재가 쌓여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차갑디 차가운, 아주 시커먼 재가… 

 

 

 

 

 

 

 

 

 

 

 

 

 

 

 

 

 

 

[원장] : …뭐하냐?

[진저] : 아, 이야기를 해주는 중이었습니다.

[원장] : 거짓말 마. 농땡이 피우고 있었지? 허공 보고 있더만 이야기는 무슨. 세면대나 닦아.

[진저] : (당신을 보며) 농땡이 아닌데. 재밌었죠?

 

 

 

 

쥐똥, 염색약 통을 들고 서 있다. 누렇게 변색된 통에는 짙은 갈색 약이 담겨 있다.  

 

 

 

 

[쥐똥] : 이상하네.

[원장] : 그치? 쟤 이상해.

[쥐똥] : 아뇨. 아, 뭐 맞긴 한데. 제 말은 오늘 손님이 안 오는 게 이상합-

[말똥] : (다급히 쥐똥의 말을 끊으며) 닥쳐!!

 

 

 

 

(딸랑) 문 열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Title         진절머리

S#1            플래그

C#1         함정카드

Place          미용실

Time ?쒥낅녫룫%?

 

 

 

__

 

 

 

 

 

얼룩무늬 정장을 입은 남성이 들어온다. 남자의 머리숱은 매우 적다. 정수리가 형광등 빛을 반사하며 번쩍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말똥, 쥐똥에게 핵꿀밤을 먹인다. 원장, 웃다가 갑자기 얼굴을 굳힌다. 입술 근육이 미세하게 경련한다. 원장,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원장] : (애써 웃으며) 어서오세요. 오늘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역시 머리를 정리하시는 거겠죠? 암요. (미용실 의자가 놓여있는 홀을 가리키며) 저쪽으로,

[눈부신 남자] : 아뇨. (휴대폰을 꺼내 보이며) 이렇게 하고 싶습니다. 

[원장] : (팔을 돌려 출구를 가리키며) 나가 주시겠어요? 그냥 뒤 돌아서 왔던 길 그대로. 

[눈부신 남자] : 오! 대체 나를 감당할 수 있는 미용사는 어디 있단 말인가. 

 

 

 

 

남자가 탄식하더니 들어왔던 문을 밀고 나간다. 진저, 멀어지는 남자와 당신을 번갈아 보며 어깨를 으쓱인다. 원장, 이마를 짚는다. 

 

 

 

 

[진저] : 왜요?

[원장] : 저 손님은 블랙리스트야.

[쥐똥] : 왜요?

[원장] : 저번주인가 와서 드래곤볼 사진을 보여주지 뭐냐. 베지터 머리를 해달라고 했었지.

[말똥] : 오늘은요?

[원장] : 유희왕 머리를 하고 싶다더군!

[진저] : 가관이네요.

[원장] : 그래. 

[쥐똥] : 아하. 그래도 오늘 이상한 손님은 저 손님 한 분밖에-

[말똥] : (신속히 쥐똥의 말을 끊으며) 닥쳐!!!

 

 

 

 

(딸랑) 문 열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Title           진절머리

S#1               플래그

C#2     Geek in pink

Place             미용실

Time #걢룫@–녫%

 

 

 

 

 

 

 

 

핑크색 형광 조끼를 입은 남자가 들어온다. 바지도 형광 핑크로 깔맞춤 되어 있다. 별안간 쥐똥의 머리에 말똥의 핵꿀밤이 작렬한다. 원장, 매우 피곤하다는 표정을 한 채 머리를 짚고는 손짓으로 진저를 부른다. 

 

 

 

 

[진저] : (원장을 곁눈질하며) … 예약은 하셨어요?

[핑크 남자] : 아니! 안 했습니다. 

[진저] : 어차피 지금 손질 받는 손님은 안 계시니까, (미용 의자 홀을 가리키며) 일단 저쪽으로 가시죠. 

[핑크 남자] : 호호, 염색! 

[진저] : 예?

[핑크 남자] : 딸기 스무디보다도 더 진한 핑크색으로!

[진저] : 아, 염색. 완전 딸기 우유빛깔 핑크색은 원래 빼기가 좀 어렵긴 하거든요.

[쥐똥] : (말을 가로채며) 근데 저희 원장님은 가능하다는 사실!

[말똥] : 가시죠, 원장님!

 

 

 

 

원장,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쥐똥과 말똥을 바라본다. 핑크 남자를 보고 애써 웃어보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탈색약을 꺼낸다. 

 

 

 

 

[원장] : 염색 도와드리기 전에 손질은, (진저의 어깨를 잡으며) 이 친구가 해줄 겁니다. 앉아 계세요. 

 

 

 

 

원장, 쥐똥과 말똥을 노려보고 염색약을 찾으러 간다. 진저, 당신과 원장을 번갈아 쳐다본다. 곤란한 표정. 한숨을 쉬고는 분무기와 가위를 찾아 꺼낸다. 

 

 

 

 

[진저] : 네, 손질 먼저 해드릴게요.

[핑크 남자] : 내가 이상해 보이나요?

[진저] : 네?

[핑크 남자] : 어쩔 수 없어요. 나는 락이 너무 좋거든요.

[진저] :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핑크 남자] : 내 예명이 뭐냐면 스핑크스예요. 내가 정했어요. 그래서 염색을 해야만 해요.

[진저] : … 네?

 

 

 

 

[스핑크스] : 스 – 핑크 – 스

[진저] : 오-

[스핑크스] : 그렇죠? 

[진저] : 일리 있네요. 

 

 

 

 

진저, 스핑크스의 머리에 분무기 물을 뿌린다. 손으로 끝부분만 빗질해준다. 

 

 

 

 

[진저] : 스핑크스는 그 뭐냐, 신화에 나오는 괴수에서 영감을 얻으신 건가요? 

[스핑크스] : 그리스 로마 신화를 잘 아세요?

[진저] : 잘은 아닌데-

[스핑크스] : 알려드릴게요.

[진저] : 사실 괜찮은 것 같긴 한데-

[스핑크스] :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 세 발인 게 뭘까요?

[진저] : 제 말을 들을 생각은 없으신 거죠? 제가 그거까지 모르진 않는-

[스핑크스] : 당연히 인간이에요. 

[진저] : 으음. (대화를 포기하고 머리 손질에 열중한다)

 

 

 

 

[스핑크스] : 스핑크스는 테베로 향하는 암산을 가로막고 퀴즈를 내서 못 푼 사람을 죽이는 괴수였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물음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죽었죠. 그러던 중 오이디푸스만이 정답을 맞혔고 스핑크스는 스스로 머리를 깨서 자살했어요. 

[진저] : (약간 놀란 표정으로) 오오.

[스핑크스] : 근데 이 신화는 잘 보면 너무 웃긴 이야기예요. 뭐가 됐든 정답이 인간인 거잖아요. 

[진저] : 음. (숱가위를 들고 숱을 치기 시작한다)

[스핑크스] : 정답이 인간인 질문을 인간에게 물어본 거죠. 인간임을 알아맞히지 못했던, 즉 스스로에 대해 무지했던 인간들은 죽었고 인간임을 알아맞혔던, 즉 스스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인간은 살아남았어요. 

[진저] : (예상보다 진지한 이야기에 놀란다) 오호?

 

 

 

 

[스핑크스] : 그러니까 이 신화는 네 삶을 성찰하고 스스로를 알라는 옛 선현들의 호통과 같은 거죠.

[진저] : 기원전부터 내려오는 유서깊은 잔소리다?

[스핑크스] : 그렇죠. 너 왜 사냐고 물어보는 거죠. 그래서 본질이 중요한 겁니다. 본질! 사람의 본질. 사물의 본질. 

[진저] : 오호라. 

[스핑크스] : (가위를 보더니 이곳저곳 고개를 돌리기 시작한다) 가위의 본질. 창문의 본질. 유리의 본질. 고데기의 본질. 쓰레기통의 본질. 나무의 본질. 철의 본질. 

[진저] : (질색하며 스핑크스의 머리를 고정시킨다) 스읍, 가만히 계시죠. 가위 들고 있는데 저. 

[스핑크스] : 아무튼, 우리는 속성을 알아야 합니다. 혹시 왜 삽니까?

[진저] : 뭘 사요?

[스핑크스] : 아니, 바-이 말고 리브. 리이-브. 

[진저] : 예? 그냥 태어났으니까 리-브 하는데. 그냥 사는 거죠.

[스핑크스] : (얼굴을 팍 찌푸리며) 아, 염색! 염색은 언제 됩니까! 저스트 리이-브 하는 사람한테 별로 손질 받고 싶지 않은데요!

[진저] : 안 그래도 다 된 참이었어요. 저기 거울 보이는 반대편 홀로 가시면 원장님께서 염색 해주실 겁니다. 

 

 

 

 

 

 

 

 

 

스핑크스, 투덜대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진저, 당신을 보며 정말 못 말리는 남자라는 듯 꾸러기 표정을 지어 보인다. 

 

 

 

 

[쥐똥] : 와, 이제 끝났-

 

 

 

 

말똥, 쥐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얼굴에 주먹을 갈긴다. 

 

 

 

 

 

 

Title        진절머리

S#2              삶은,

C#1              계란

Place         미용실

Time !$롂깛쫈*^?

 

 

 

 

 

 

 

 

원장, 스핑크스의 핑크 염색을 해주느라 여념이 없다. 쥐똥, 부어오른 볼을 부여잡고 기자재를 정돈한다. 말똥과 진저, 불안한 눈으로 문쪽을 바라본다. 딸랑, 문이 열리고 여자가 들어온다. 

 

 

 

 

[여자] : (시선을 의식하며) … 저 숱 치는 거 예약했었는데. 

 

 

 

 

말똥과 진저, 동시에 안도한다. 말똥, 원장의 부름에 염색을 도와주러 간다. 

 

 

 

 

[진저] :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미용 가운을 건네며) 김, 영, 정님 맞으시죠?

[영정] : (미용의자에 앉는다) 네. 

[진저] : 우와, 원피스 멋진데요. 어디 다녀오세요?

[영정] : 전시회에 다녀왔어요. 흑백 필름 전시여서 저도 위아래 흑백으로 맞추고 갔죠. 

[진저] : (당신에게 눈을 찡긋이며) 과연, 검은 원피스에 흰색 로퍼를 신으셨네요. 사진 전시였나 봐요.

[영정] : 네. <흑백 사진에 담긴 사랑>이 주제였어요. 무채색은 고저 없고 무감정한 색이라고 생각했는데 전시회에서 보니 따뜻하게 느껴져서 놀랐어요.

[진저] : 오호라. 

 

 

 

 

진저, 말 없이 분무기를 든다. 무표정으로 칙칙 뿌리고는 영정의 머리를 손으로 빗는다. 매우 기계적으로 가위를 들어 올린다. 별안간 정적이 흐른다. 희미한 기계소음만 들린다. 누구도 말 하지 않는 상황이 꽤 지속된다. 

 

 

 

 

[영정] : …어, 하하하!

[진저] : 음?

[영정] : 오호호호.

[진저] : 왜 그러시죠?

[영정] : 아하하. 뭔가 어색하거나 딱히 할 말이 없을 때 웃는 편이에요. 버릇이에요! 하하하하.

[진저] : 어색하셨나 보네요. 그렇다면 전시회 이야기를 좀 더 해주세요. 사랑이 주제라고 하셨죠. 

[영정] : 네. 

[진저] : (영정의 숱을 치는 것에 집중하며) 그러니까, 그… 

[영정] : (진저의 말을 기다린다)

[진저] : (여전히 집중한 채로. 머리카락이 조금씩 바닥에 쌓인다) 그러니까요… 

[영정] : (여전히 기다린다)

 

 

 

 

[진저] : … …사랑이 뭘까요. 

[영정] : 혹시 오디오 채우려고 아무 말이나 하고 계신 건가요?

[진저] : 물론 아닙니다. 

[영정] : 음, 사랑. 사랑이라. 사랑은, 사랑은… 사랑은 사람이 하는 거죠.

[진저] : 어? 상당히 성의가 없어 보이는데 지금 설마 오디오 채우려고 – 

[영정] : (다급하게 말을 이으며) 사랑은! 사람이! 그, 삶 속에서. 삶을 살아가면서 사람들과 만나고 성장하고. 그 모든 상호작용 속에서 일어나는 거죠. 사랑은 곧 삶이에요!

[진저] : 오호라. (영정의 머리카락 끝을 맞추며) … 삶은 뭘까요?

[영정] : 어? 지금 아무 말이나 하시는 – 

[진저] : (재빠르게 말을 덧붙이며) 삶이란! 그렇죠. 인생, 인생과 비스무리한 개념이죠. 제가 먼저 삶이 뭔지, 인생이 뭔지에 대해 말씀 드려볼까요?

[영정] : (거울을 통해 진저를 보며) 좋아요.

 

 

 

 

[진저] : (골똘히 생각하며) 인생은, 뭐랄까 겨털 같은 거죠.

[영정] : …하하!

[진저] : 발톱 비스무리하달까.

[영정] : 하하하핫!

[진저] : 아, 인생은 머리카락이에요!!

[영정] : 하하, 오. 왜 그렇게 생각해요?

 

 

 

 

[진저] : (거울로 영정의 눈을 마주보며) 그냥 숨만 쉬면서 사는 것도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 중에 하나잖아요. 머리카락도 그냥 내버려두면 알아서 자라죠. 

[영정] :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다)

[진저] : 하지만 그렇게 몇 달이 지나도록 냅두면 흉해져요. 꼭 중간중간 번거롭게 손질을 해줘야 한다니까요. 그냥 사는대로 살면 깔끔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인생은 머리카락입니다. 방치하면 대책 없어지는 게 꼭 닮았으니까.

 

 

 

 

영정, 뿌리가 많이 자라 볼품 없고 윤기 없이 푸석푸석한 진저의 머리를 본다. 시선을 돌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다. 머리카락이 깔끔히 정돈되어 있다. 

 

 

 

 

[진저] : 다 됐습니다. 어차피 예약결제 하셨으니까 그냥 나가보셔도 돼요. 

[영정] : … 저기 있잖아요. 아직 내 대답은 못 들었죠. 

[진저] : 네?

[영정] : 나는 말이에요. 삶은 계란이라고 하려고 했어요. 인생은 둥그니까… 머리 다듬어줘서 고마워요. 

 

 

 

 

딸랑, 문소리를 뒤로하고 영정이 떠난다.

 

 

 

 

 

 

 

 

 

 

 

Title                                                                   진절머리

S#3                                                                         분광

C#1                                            그린티 향기가 나는 여자

Place                                                                    T우주

Time  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

 

 

 

 

 

 

 

[진저] : 어서오세요. 아, 예약 하셨었나요?

[여자] : 아뇨. 혹시 지금 안 되는 건가요.

[진저] : 그건 아닙니다. 

[여자] : 그렇군요. 머리 커트한 다음에 쫙 펴주세요. 

[진저] : 매직까지 한다는 말씀 맞으시죠? 미리 말씀 드리지만 커트까지는 제가 하고 매직은… 저기서 부산을 떨고 있는 쥐똥 미용사님께서 도와주실 겁니다.

[여자] : (매우 놀란 표정으로) 네?

[진저] : 예? 

[여자] : 아, 네. 그나저나 문 바깥에서 서성이는 사람이 있던데.

[진저] : 그래요? (창문 너머로 바깥을 내다보며) 얼룩 정장이네.  저 분은 블랙리스트예요. 

[여자] : 왜요?

[진저] : 저번주에 와서 베지터 머리를 하고 싶다고 했대요. 

[여자] : 근데요?

[진저] : (분무기를 들며) 오늘은 유희왕 머리를 하고 싶다네요.

[여자] : 그렇군요.

[진저] : (여자의 머리에 분무기 물을 뿌리며) 네. 

 

 

 

 

[여자] : 근데, 안 받아주는 이유가 단순히 해주기 어려워서인가요?

[진저] : 네?

[여자] : 완성이 힘들지 몰라도 나는 좋아 보이네요.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는 거잖아요.

[진저] : (가위를 정리하며) 뭐. 오늘 개성 있는 손님들이 좀 들렀다 가셨죠.

[여자] : 당신도 개성 있어요.

[진저] : 네?

 

 

 

 

[여자] : 관리 안 한 머리가 꽤나 인상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기본적으로 빨간데 뿌리가 검게 많이 자라서 한 입 베어문 사과 같기도 하고. 윗부분이 썩은 것 같기도.

[진저] : 우와, 제가 가위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계신 듯 해서 한 번 말씀드려요.

[여자] : 고맙습니다. 좀 골 때리는 게 내가 아는 누군가를 닮았네요. 혹시, 다중우주 믿습니까?

[진저] : 네?

[여자] : …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진저] : 오, 하핫!

[여자] : 사이비 아니고 뭘 전도할 생각도 없으니까 안심하라구요. 애초에 나도 염세적인 인간이라서요. 기본적으로 나 빼고는 아무것도 안 믿습니다.

[진저] : (여자의 머리를 빗어주며) 하하핫! 그렇군요.

 

 

 

 

[여자] : 어쨌든 다중우주는 알죠? 여러 세계선이 존재하고 그 속 존재들 또한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지닌다는.

[진저] : 오호라.

[여자] : … 이를테면 내가 당신한테 커트를 받고 있는 이 세계선을 T우주라고 할게요. 하지만 다른 우주, T-1우주에서는 베지터 머리로 미용을 받고 있을 수도 있어요. 또 다른 우주 T-2에서는 유희왕 머리일 수 있죠. 이게 다중우주예요.

[진저] : (집게로 여자의 머리 구역을 나누며) 으음. 

[여자] : 요점은 누구에게나 다른 우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거죠.

 

 

 

 

[진저] : (깊게 한숨을 쉬며) 참. 잘은 모르지만 고약한 세계네요. 

[여자] : 왜 그렇게 생각해요? 

[진저] : 그거야, 어떤 우주든 내가 머리를 만져주고 있잖아요! T-100우주까지 머리만 하고 있는 건 아닐랑가 몰라. 정말 진저리, 넌더리, 진절머리가 난다구요. 

[여자] : 그렇긴 하겠네요.

[진저] : 오. 생각보다 순순히 인정하시는군요. 

[여자] : 물론. 나도 당신처럼 생각한 적이 있었고 지금도 공감하니까요. 어떤 미래든 내가 만들어나갈 수 있다… 꿈 같은 이야기죠. 열정을 갖고 살라는 진부한 말 같잖아요?

[진저] : (여자의 아래 머리의 끝단을 맞춘다. 매우 기계적인 무표정.)

 

 

 

 

[여자] : 사람들은 열정을, 뭐든 해결해주는 만능 열쇠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하지만 열정의 속성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예요. 열정은… 눈을 멀게 해요. 정신 차리고 보면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게 만들어요. 길을 되짚게 만들고, 결국에는 후회하게 만들어요. 

[진저] : (여자의 말을 들으며 밑단 머리를 자른다.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진다. 진저, 잠시동안 머리카락을 바라본다)

[여자] : 그런 의미에서 열정은 허상일지도 몰라요. 권태로 접어들기 바로 전 단계. 그냥 그 뿐일지도 모르죠. 

[진저] : (여자의 양 옆 머리에 분무기를 뿌린다. 끝단을 맞춘다. 역시 무표정)

[여자] : 하지만 그 순간에 다시 떠올려보는 겁니다. 내가 잘못된 길에 접어들었다 해도, 그 길로 가게끔 발을 움직였다는 사실을. 무언가를 좇아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뛰었다는 것을. 끝을 알 수 없는 미로를 내달리면서도 내 심장이 벅차올랐다는 그 사실까지 허상은 아닐 거니까요.

 

 

 

 

[진저] : (말끔히 잘린 여자의 머리카락을 보던 시선을 돌려 당신을 바라본다) … 그럼 열정은 뭐죠? 허상이라는 건가요 아니라는 건가요. 

[여자] : 정확히는 몰라요. 하지만 이건 알죠. 모든 것은 결국 스펙트럼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빨갛게만 살 수는 없어요. 파랗게도 살고, 빨강 팔십에 파랑 이십 정도로도 살아야 하고. 설마 그 두 가지만 있겠어요?

[진저] : (당신에게서 시선을 거둔다. 잠시 아래를 바라본다. 가위를 정리한다) … 물론 아니겠죠. 초록색, 보라색, 노란색으로도 살아봐야 하겠네요. 알겠어요, 다채롭게 살겠습니다. 커트는 끝났어요. 이제 쥐똥 미용사님께- 

[여자] : (계속 거울로 비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본 채로 말을 이으며) 검정색도 있어요. 

[진저] : 네?

[여자] : 태양 빛이라고 하더라도 분광기로 쪼개면 검은 부분이 존재해요. 모든 스펙트럼에는 벙 뚫린 부분이 반드시 있어요. 

 

 

 

 

진저, 입을 꾹 다문다. 기자재를 정리하던 손이 멈춘다. 

 

 

 

 

[여자] : (진저를 똑바로 바라보며) 세상에는 한 입 베어 문 사과도 있고 윗부분이 썩은 사과도 있는 거죠. 안 그래요? 

 

 

 

 

여자, 자리에서 일어난다. 

 

 

 

 

 

 

 

 

 

 

 

Title 진절머리 —————————- —

S#1000000000000 – – – – – – – – – – – – – – – – – 

C#1000000000000 – – – – – 스펙트럼 분석기 – – – – – 

Place – – – – – – – – – –            – – – – –  – – – – –

Time %0000000000000%%%  %%%%%%%%%%%%%

 

 

 

 

 

 

 

 

 

 

 

 

 

저기.

이제 마감 시간인데요.  

 

 

원장님하고 말똥 미용사님은 염색 끝내고 먼저 들어가셨구요. 

쥐똥 미용사님도 방금 집에 갔습니다. 

 

 

 

저요?

 

 

 

뒷정리는 짬빠 순이거든요. 

제가 막내니까 끝까지 남은 거죠 뭐. 

 

 

 

하하. 안 그래도 당신, 아까부터 쭉 나만 지켜보던데 이렇게 단 둘이 대화하기도 좀 민망하고 그렇네요.

 

 

 

오늘 이상한 손님들이 유독 많았어요.

우리 미용실이 원래 막 정신 없고 그러지는 않은데… 

특히나 마법 같은 하루였달까요.

그런 날 있잖습니까.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인데도 멈춰서 돌아보게 되는 찰나.

기억을 쪼개 넣을 수 있는 필름이 있다면 꼭 저장해두고 싶은, 그런 순간들이 막 반짝이는 날 말입니다. 

 

 

 

나는 오늘 조금 이상한 것들을 깨달았어요.

아니 깨달았다기보다는, 떠올렸습니다. 

이를테면 무지개는 빛을 등지고서야 떠오를 수 있다는 진리라든가.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헤어 스타일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나는 지금껏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를 잘라주었는데, 정작 내 머리를 다듬어본지는 까마득하다는 … 그런 것들이요. 

 

 

 

… 인생은 뭘까요?

뭐, 정답은 없죠. 누구나 다르게 생각할 거예요. 삶에서 중요한 건 본질일 수 있고, 사랑일 수 있고, 열정일 수도 있는 것처럼.

하지만 어떤 답을 생각하는 사람이든 간에, 어떤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든 간에 자기가 하고 싶은 머리는 있을 거란 말이죠. 대머리인데 유희왕 머리를 하고 싶을 수도. 갑자기 핑크색으로 염색을 하고 싶을 수도. 머리 숱을 치고 똑단발을 하고 싶을 수도. 어느 날, 홧김에 빨간색으로 물들일 수도 있는 것처럼.

 

 

 

아, 그냥 대책 없이 길어서 산발인 스타일도 있을 거예요. 근데 그 모습이 볼품 없다고 생각해서 웅크려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머리는, 언제든지 자를 수 있으니까. 그리고 애초에 머리카락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막 하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이냐고요? 

하하하! 

 

 

 

 

 

 

 

 

 

그거 알아요?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귀찮게 뗄감을 구해서 번거롭게 계속 넣어줘야 하는 거예요.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오늘에서야…

오늘에서야 이해했습니다. 

나는 그동안 장작도 없으면서 더 이상 불꽃을 태울 수 없다고 한탄하고 있었어요.

치울 생각도 않았으면서 재가 쌓인다고 무기력해져 있었던 거예요…

 

 

 

 

 

 

… …

 

 

 

… 아까 내가 어떤 남자 이야기 해줬었던 거, 기억나요? 

그 사람 다시 염색할 심산인가 봅니다.

그것도 아주 시뻘겋게 말이죠. 

 

 

 

파란색?

에이 시뻘건 것도 제대로 못 즐겼는데. 

시퍼런 건 나중에 해보죠 뭐. 

 

 

 

아무튼 그렇게 염색하고 나면, 차차 더 고민해봐야겠지만. 멋지게 가꿔줄 예정이랍디다. 그 남자가 원하는 모습대로. 수시로요. 

이제 손질 안된 푸석푸석한 머리에는 아주 진절머리가 나니까. 

 

 

 

그러는 당신은?

이제 결정했어요? 커트를 할지 펌을 할지.

 

 

 

어떤 스타일이든 간에, 

행운을 빕니다. 

 

 

 

 

 

안녕.

 

 

 

 

 

 

 

 

 

 

 

 

 

진절머리, Fin. 

단
AUTHOR PROFILE

잔치의 시선으로 신촌의 장면과 사람, 장소를 기록합니다.

COMMENTS

댓글 1

  1. 익명
    익명 2023.05.31 01:46

    이번에는 단님의 숨겨진 해설이 보이지 않네요. 하지만 그래서인지 더 독자만의 해석을 할 수 있어서 매력있는 것 같아요 이번 글도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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