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 경계에 선 우리들
살아감이란 선택의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깊은 물음부터 학업과 취업처럼 눈앞에 놓인 질문까지. 이 질문의 특이한 룰이 있다면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도, 하나의 선택이라는 것. 그리고 설사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해도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것. 그렇게 우연한 선택들은 모여 한 사람의 운명을 구성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우연은 필연이 된다.
그리고 우연은 우리를 경계로 내몰고 가기도 한다. 그렇게 경계에 놓이게 된 우리들이 있다. 인문과 이공, 학문의 경계에서부터 대학과 사회, 청춘의 경계까지.

“인문학부 소속인데 공대 수업을 듣는 저의 뿌리가 뭡니까, 지금 저를 보세요(웃음)”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배성재(23)는 웃으며 말문을 텄다. 배성재는 서강대에서 국어국문학과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있다. 그가 ‘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정체성 때문이다. “뿌리가 없다는 느낌이죠. 어딜 가나 인문대 친구를 만나면 인문대생이 아니라고 하고, 공대 친구를 만나면 공대생이 아니라고 하니까요.”
그가 복수 전공을 선택한 이유는 솔직하게도 수험 시절 수능 성적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주에 가겠다는 우주비행사의 꿈이 우주에 기계를 보내겠다는 기계 공학도의 꿈으로 이어졌다. 그 꿈은 수능이라는 현실과 만나 국어국문학에 닿게 되었다. 수능 성적이 평소만큼 나오지 않아 낙담하던 와중 국어 성적이 좋았던 점, 평소 글 읽는 것을 좋아하는 점을 생각해 서강대 인문학부에 입학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진학 후 인문대와 공대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렸다. “국어국문이 단순히 문학에 대해서 공부하는 학과인 줄 알았죠. 고등학생 때 국어 과목에 자신 있다고 했지만 문법만은 예외였거든요.” 그는 첫 학기 ‘국어학입문’이라는 문법 강의를 수강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모국어 화자로서 당연하게 생각하고 쓰던 말들을 깊게 탐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한편 그가 학창 시절 자신 있어 했고, 주로 꿈꿔왔던 이공계에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좋아하는 걸 잘하지 못할 때 느껴지는 비참함을 아시나요? 학창 시절 과학탐구 중 물리를 가장 좋아했지만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전공 난이도가 올라가면서 힘들어졌어요.” 좋아하는 학문에서 좌절감을 맛본 그는 사실 더 힘들었던 점이 있다고 했다. 기계공학과에 아는 사람이 없어 모두가 어려운 건지 스스로만 힘든 건지 가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기계 공학엔 친구가 없어서 공대 족보를 구하기도 힘들고 하다못해 과제를 하더라도 논의할 사람이 없었어요.”

기계공학 공부 흔적
어려움에 맞닥뜨린 그가 한 일은 남들보다 더 공부하는 것뿐이었다. “안될 것 같아도, 더 열심히 하다 보니 되더라구요. 그냥 하면 됩니다.” 유체역학이라는 과목에서 이를 경험했다고 말했다. 입학 초 성적이 좋지 않았던 유체역학을 군 전역 후 심기일전해 재수강했고, 실력이 늘었음을 체감했다고 한다.
국어국문학과에서도 그는 평소 좋아했던 언어유희를 떠올리며 문법 강의에 재미를 붙이게 됐다. “‘국어담화화용론’이라는 수업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요, 처음엔 똑같은 말을 다양한 맥락에서 해석하는 게 별로 와닿지 않았는데, 화용론을 말장난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재미있어지더라구요.”

그의 개성이 묻어나는 동아리 공연 소회
자신만의 방법으로 우직하게 어려움을 돌파하는 그의 가장 큰 개성은 공대의 수리적 감성과 인문대의 여린 감수성이 만나 만들어진 ‘공대생 글쓰기’다. 일명 과학 법칙과 일상을 연결해 표현하는 글쓰기이다. 그는 별게 아니라며 머쓱해 하면서도 문장을 몇 가지 보여줬다. “‘초콜릿을 사서 녹여서, 다시 굳히는 과정을 거쳐 직접 만든 초콜릿을 애인에게 선물하는 건 미분했다가 적분하면 적분상수가 생기는 것과 같다.’라는 말도 친구들이랑 농담처럼 하고 다녔죠.” 또 그는 가장 좋아하는 물리식으로 F=ma를 꼽으며 이를 인문학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F=ma는 가해주는 힘이 증가함에 따라 가속도가 증가한다는 과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이런 과학 법칙이 그의 생각을 거쳐 정직하게 노력한 만큼 나온다는 삶의 법칙으로 변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수리 공식을 자신만의 눈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힘은 수리력 그 뒤에 숨겨진 그의 여린 감수성에 있다. 국문학도로서 시를 꾸준히 읽어왔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가장 좋아하는 시로 꼽았다. “뿌리가 없는 저의 상황과 동병상련을 이루는 거 같아서요. (웃음)” 전혀 다른 것들 사이에서의 흔들림은 새로움을 만들기도 하는 법이다.

한편, 나이라는 우연적 요소로 대학과 사회,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도 있다. “이제 신촌을 떠날 때가 된 거 같아요” 서강대 경영학과로 막 학기를 다니며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준비하는 취업 준비생 나승연(27)의 말이다. 대학생과 사회인, 두 정체성 사이에 서있기 때문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제가 최고학번이에요. 하지만 사실 취업한 사람들은 많은 나이가 아니라고 하더라구요.” 대학생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으며 합법적으로 놀고 싶은 마음과 취업해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고 싶은 마음. 그녀는 두 마음 사이를 오간다.
취업을 향한 복잡한 마음은 또래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잘 드러난다. “또래를 많이 만나다 보니 저와 비슷한 상황에 결론이 똑같아요.” 신나게 웃긴 이야기를 하다가도 숙연해져 한숨을 내쉬는 순간이 온다고 한다. “‘언제 취업하지’라는 얘기가 무조건 나오고, 가끔 결혼 얘기를 하기도 해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주예요.”
27살은 취업에 있어 위기감을, 한편으론 대학 청춘에 대한 미련을 생각하게 만드는 나이다. “어릴 때완 다르게 부모님의 돈을 함부로 쓰지 못하겠어요. 죄책감 때문에요. 의존하고 살 나이는 지난 느낌이에요.” 그녀는 사회로 떠나는 친구들을 보는 것도 초조한 마음이 든다고 한다. “남들과 비교도 많이 돼요. 그래서인지 스스로가 부족한가라는 생각이 들죠.” 더 나은 조건에서도 자신보다 더 노력하는 남들을 보면서 그녀는 스스로에 대한 걱정과 성찰에 힘들다고 한다.

취업 준비 중 가끔 즐기는 여유로운 아침
하지만 그녀는 공백으로 여겨지는 이 시기가 나쁘지만은 않다고도 말한다. “또 걱정은 하지만 길게 잡고 있는 편은 아니라서요, 취업하게 되면 즐길 수 없는 여유가 행복하기도 해요.” 그녀는 아무 일정이 없는 평일 낮 친구와 산책하고 브런치를 먹는 일상을 즐길 때도 있다.
졸업과 취업의 기로에 서서 그녀는 희생으로 얻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고 한다. “대학을 온건 학창 시절 희생의 결과라고 생각하거든요.” 대학에서 보상심리로 많은 이들이 그러듯 재밌는 경험도 했다고 한다. “의지가 되는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무모하게 술도 마시고, 출튀도 해보고… 책임질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놀았던 건 좋은 경험인 거 같아요.” 하지만 학창시절 무언가를 포기해 대학을 왔듯, 대학에서도 무언갈 희생해야 다음 단계에서 좋은 결과물이 나올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대학 생활의 성실성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사회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라는 위기의식이 듭니다.”
대학 생활 특히 교환학생 시절을 기록한 유튜브 채널
그러나 위태로운 마음으로 걱정만 하는 건 아니다. 그녀는 어떻게든 될 거라는 마음으로 주어진 것들에 그냥 부딪혀야 한다고 말한다. “하루하루 할 일들은 명확하니까, 그걸 해나가다 보면 언젠가 어떻게든 풀리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녀는 외국어 공부도 하고, 자소서도 꾸준히 쓰고 있다. 이때까지 대학 생활을 기록한 영상을 편집해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면서, 그저 무언갈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계속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고 해나가는 정신, 요즘 말하는 ‘중꺾마’ 정신이 중요한 거 같아요. 앞으로 조금 꺾이지 않을까 불안하긴 하지만요.”
이런 ‘중꺾마’ 정신 아래엔 그녀의 삶의 모토가 깔려 있다. ‘모든 일엔 이유가 있다’라는 것. 스스로가 보기엔 우연 같아도, 파악할 수 없는 세상 나름의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제 기준에서 진짜든 아니든 열심히 안 해서, 부족해서라고 여겼던 선택이 필연적이었다고 믿으면 힘든 걸 이겨낼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맞닥뜨린 예상외의 상황에서 새로운 경험과 가치를 발견할 수 있거든요.”
성인이 되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 많은 감정을 생생하게 알려준 곳. 대학은 그녀에게 성장의 시간이었으며, 청춘의 상징이었다. 청춘을 갈무리하고 사회로 새롭게 나아갈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그녀는 이미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녀도 모르는 새 새로운 경험과 가치들이 쌓여 그녀의 정체성이 되고 있었다.

삶에서 끊임없이 소외되는 것. 문득 찾아오는 알 수 없는 외로움은 우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연에서 새로운 시작을 발견하는 일이야말로 살아감이다. 경계에 서서 휘청이는 것이야말로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흔들림은 불안함으로 인한 떨림인 동시에 새로움을 향한 진동이기에. 휘청임을 나의 움직임으로 만드는 하루하루 노력이 한 사람의 생명력을 이루는 게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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