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발견한 휴식
뉘앙스의 세계는 느낌의 세계이다.
보이는 마음과 보이지 않는 마음 사이를 마음껏 넘나든다.
– 겨울의 뉘앙스 전시 서문 中..
“쉴 때 어떤 기분이 들어요?”
상담사 선생님의 질문에 벙쪘던 기억이 떠오른다.
“편안하신가요?”
편안이라..
편안함이 어떤 느낌인지, 무엇인지 잊어버린 지 오래다.
늘 ‘그다음 일’에 등 떠밀려, 현재를 해결하는 삶을 살아온 나는 정지상태에 머물러 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되려 나의 불안증과 우울은 주어진 다음과 목표가 없는 공백기 기간, 방학 때 찾아오곤 한다.
일벌레 생활이 너무 익숙해진 난, 쉼이 어떤 형태인지, 어떤 느낌인지 분간이 안 간다.
일에 치여 과열된 상태로 여름을 보낸 지금,
계절이 식은 만큼 나도 휴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왕이면 내 발걸음이 한 번도 닿지 않은 곳으로.
이왕이면 내게 익숙하지 않은 공간으로.
신호등과 자동차의 불빛들, 그 소란은 눈을 어지럽게 해, 바닥을 보고 걷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노랗게 물들어버린 낙엽들과 짓눌린 담배꽁초
시멘트 틈사이로 스며든 빗물의 흔적.
갈길을 정해주는 페인트들의 흔적.
그렇게 한참을 걷고 걷다 보니 한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 주변 환경을 둘러봤다.
나의 발걸음이 이끈 곳은 정말 낯선 곳이었다.
시간이 한껏 묻어있는 건물들.
시간에게 잡아 먹힌 물건들.
그리고 이곳.
정제된 장소와 물건을 좋아하는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것도 신기한 일이다.
표지판이 없었다면 이곳 또한 다른 건물들처럼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단어, 프로젝트’화’하고 오브젝트’화’한다는 저 단어들이 눈에 밟혀,
낯선 건물의 낯선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어두운 계단
한
__칸
____두
______칸
어둠과 대비되어서 그런지, 한밤중 빛나는 작은 호롱불처럼 전시장이 유독 더 밝아 보였다.

‘포근하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였다.
폭신폭신한 러그와 나무 질감의 가구.
가구와 어울리는 겨울 풍경을 담은 그림들.
어딘가 아늑하고 어딘가 이국적인 이곳에서 12월의 시리고 따뜻한 겨울눈 냄새가 생각났다.
공간을 바라보며 감상하고 있던 그때, 테이블에 앉아계셨던 전시 기획자님께서
“직접 앉아서 작품 감상하셔도 돼요.”라고 하셨다.
기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폭신한 소파에 앉았다.
공간을 거시적으로 바라보며 작품을 감상할 때와
공간 속에서 작품과 하나가 되어 작품을 감상할 때의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
액자는 곧 창문이 되고, 마치 내가 눈이 가득한 북유럽의 풍경들을 직접 바라보며
그 차가운 눈발을 따뜻한 거실에서 즐기고 있는 듯한 입장이 된다.

푸른 색감 속에서도 어딘가 다정해 보이는 건 왜일까.
재료의 특성 때문일까. 투명한 듯 선명한 색감은 수채화를 떠올리게 한다.
어떤 재료일까, 차마 직접 물어보진 못하고 혼자 생각하고 있는 와중, 임수진 작가님께서 먼저 답변을 주셨다.
“이건 목판화예요.”
“와, 정말요? 색감 때문에 수채화나 색연필인 줄 알았어요!”
“자세히 보시면 나무 결이 보일 거예요. 밑에 보면 에디션 넘버도 있답니다.”
에디션 넘버: 판화작품의 한정 부수를 보증하기 위한 넘버링
그제서야 보이는 판화 작업의 흔적들.
판의 나뭇결이 가구의 나뭇결과 어우러진다.

기획자님 말씀에 따르면, 이번 전시는 처음부터 순수예술과 공예의 콜라보를 예정했다고 한다.
이번 기획의 시작은 still here 이라는 가제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하나의 장면은 시간이 지나면서 또 다른 장면으로 기억되고 그때의 시선과 감정은 지금과 사뭇 다르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도 각자의 경험과 기억이 다르고, 빈티지 가구도 각각의 기억과 추억이 깃들지 않았는가.
임수진 작가는 우리 기획의도에 가장 완벽한 작가였다.
그리고 그 작가의 작품을 더 깊이 들여다 보며 공예 및 브랜드를 선정하기 시작했다.
– 프로젝티파이 인스타그램, 기획전시 홍보글 中..
관객과 작품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있는 것이 트렌드인 요즘, 관객 참여를 유도하는 전시나 작품이 늘고 있다.
직접적인 관객참여형 전시가 있는가 하면, 관객의 존재만으로 전시가 완성되는 경우도 있다. 이번 전시는 그 후자라고 생각한다.
작품과 관객을 던져 놓는 화이트 큐브보다 다정하고,
직접적인 관객참여형 전시보다 편안한, 그런 포근한 전시.
화이트 큐브: 하얀 전시공간. 작품만이 돋보이도록 한다.
그 포근함은 작가님의 섬세한 그림과 가구의 분위기와 어우러지며 온전히 전달되었다.
작가님 또한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 기존 작업들과 가구와의 조화였으며, 북유럽 가구들인 만큼, 그림들 또한 유럽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그림 속 자료들은 작가님이 직접 북유럽을 다녀와 찍은 이미지들이라고 한다.
촬영한 이미지의 사실적 재현이지만, 작가님의 시선과 손길이 정보에 서정성을 더한다.
그 곳의 냄새와 온도, 그 곳에서 느낀 감정을 판화라는 매체를 이용해 관객에게 현장의 인상을 전달한다.

어쩌면 여기까지 읽고 임수진 작가님의 세계관과 작업관을 더 알고싶어진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에게 전해줄 기쁜 소식 한 가지가 있다.
11/12일 일요일 오후 5시부터 6시, 11/18 토요일 오후 2시부터 3시까지 작가님과 아티스트 토크가 예정되어있다.
선착순 5명만 받기에, 작가님의 세계관과 작업관을 직접 들어보고 싶은 독자들은 프로젝티파이 인스타그램(@projectify_seoul)을 통해 DM을 남겨보길 바란다.

북유럽의 아늑한 공간을 뒤로하고 다시 11월의 신촌으로 돌아왔다.
그 곳에 있는 몇분간
나는 고요했다.
다음에 대한 불안도
목표의 유무에 대한 걱정도 없이
따뜻한 캐롤송이 들리는 그 곳에,
흰 눈이 소복히 쌓이는 현장에 존재했다.
생각을 멈추고 내가 발을 딛고 있는 그 자리에 존재하는 일.
그 공기의 촉감을 느끼고, 현장의 분위기를 음미하는 일.
그런 작은 정적을 인지하는 일.
그게 휴식인가보다.
12월의 겨울이 오기 전,
이 전시가 선사하는 겨울의 뉘앙스를 통해 독자들도 잠시나마 정적을, 휴식을 느껴보길 바란다.
프로젝티파이 기획 전시
<겨울의 뉘앙스>
임수진, 노르딕파크(nordicpark)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2마길 14 신촌문화관 2층
13:00 ~ 19:00 (화~일), 월 휴관
2023.10.31. – 20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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