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어쩌면 바라고 있었던
꿈을 자주 꾸는 편은 아닌데 꿈꾼 날은 보통 기분이 좋지 않다. 꿈속에서 나는 늘 쫓기고 있다. 정체 모를 무언가를 피해 어디론가 달아나고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왜 뛰는지도 모르고 심장이 터져라 뛰는 모습. 나를 뛰게 하는 무언가는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대체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하지? 정체를 알고자 뒤를 돌아보면 언제나 캄캄한 어둠만 있고 곧 잠에서 깬다. 팔다리가 잔뜩 경직되어 있고 심장이 여전히 빠르게 뛴다. 무엇으로부터 그렇게 열심히 도망쳤을까?
예상하건대 그건 불안이다.
끈적끈적하게 나를 따라다니는 불안. 지긋지긋한 이 불안을 미워할 수 없는 이유.
불안은 짧은 전 생애를 통틀어 늘 원동력이 되어주었기 때문에.
꿈을 향해 달려라! 원하는 걸 이뤄라! 그런 말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낭떠러지 주의!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늘 그런 문장이 더 와닿았다.

대학에 온 뒤로 입시라는 불안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됐다.
불안 끝! 행복 시작!
…
이라면 좋겠지만 불안은 언제 어디서나 그 모습을 바꿔 찾아온다.
불안의 굴레 속 항상 낙원으로 그려졌던 신촌에서 이제 또 다른 낭떠러지를 스스로 만들고 있다.
자, 달려! 멈추면 떨어진다구.

모습을 아무리 달리 한들 신촌은 영원히 젊음을 위한 공간일테지. 시간이 흘러 젊음과 멀어지게 되면 나는 이곳을 떠나야 할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온통 내 세상인 것만 같던 공간이 다신 돌아오지 못할 임시거처로 느껴진다. 지금 먹고 눕고 자고 숨 쉬는 이 공간은 다른 젊음에게 내어줄 한 칸짜리 순간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나만의 공간이 없다는 게 얼마나 막막한지 모른다. 그럼 전 어디로 가야 하나요. 허공에라도 묻고 싶다.
가지고 있는 수많은 불안에 모두 이름 붙일 수는 없지만 요즘의 주된 불안은 곧 있을 휴학으로부터 온다.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는 휴학생인 내가 신촌 땅을 밟아야 할 이유가 사라질 게 두려웠다. 나고 자란 곳에서 한참 떨어져 이만한 돈과 시간을 들여 여기 있을 이유. 들인 자원이 아깝지 않을 사람이라 증명할 만한, 가치 있는 걸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믿는다는 말이, 잘할 거라는 말이 그 어떤 위협보다 가장 위협적으로 느껴질 때, 눈물을 꼭 참느라 힘들었다.

세상이 너무 빨라 너무 거대해 너무…
지구 건너편 사람과 대화하는 건 일도 아닌 세상에서, 로봇이 사람 말을 하는 세상에서,
내가 누울 안락한 방 한 칸, 따듯한 밥 한 그릇.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거, 온전히 내 힘으로 얻는 게 왜 이리 어려워?

불안을 피해 이리저리 뛰다가 때로 숨이 가빠지면 그냥 그대로 멈추고 싶은 날이 간혹 있다.
실컷 우울해하다가 따듯한 위로를 받은 뒤 꿈 없이 잠들고픈 날.
그럴 때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그곳에 따듯함을 느끼러 간다.
이 빠르고 거대한 신촌에 수많은 불안한 젊음이 스쳐 지나가도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공간.
고삼이!
학교 정문 오른편에는 정감 있는 식당이 참 많다. 물론 거기서도 잠깐 생겼다가 없어지는 곳도 여럿 있지만 선배의 선배의 선배부터 다녔을 것 같은 식당이 꽤 있다. 집밥을 먹을 일이 잘 없는 나는 줄 서는 맛집보다 쌀밥 한 그릇이 나오는 곳에 마음이 더 기운다. 따듯한 온기가 느껴지는 그런 곳. 가게 통로가 좁으니 대기는 밖에서 하라는 단호한 종이가 문 앞에 붙어있다. 사람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누군가를 기다리며 모여있다. 벌벌 떨고 있는 그들을 보곤 단호한 안내문과는 다르게 문을 열어 안에서 기다려요, 하고 말씀하시는 사장님. 그 따스한 말에 벌써 마음이 녹는 기분이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통로에 서서 가게를 두리번거린다.

벽면은 온통 옛날 사진으로 가득하다. 과거 중에서도 가장 과거를 찾아 사진 밑의 숫자를 살핀다. 2008… 2007… 2005… 내가 찾은 가장 과거는 2005년. 함께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진 속 사람들. 음식이 나오기 전에 한 컷, 다 먹고 난 뒤에 한 컷, 가게 입구를 배경으로 한 컷. 어떨 땐 넷이, 어떨 땐 둘이, 어떨 땐 여럿이.
저기 웃고 있는 사람들은 여기 자기 사진이 있다는 걸 알까.
시간이 벌써 이만큼이나 흘러 사진이 바래고 코팅이 벗겨지는 걸 알고는 있을까.
그들도 스쳐 가는 신촌의 불안이었을까.
내가 하는 이 고민과 비슷한 결의 고민을 했을까. 불안을 원동력 삼아 타오르다가 또 어떨 땐 멈춰 섰을까.
그들은 지금 어디에 도달해 있을까.

갖은 생각이 스치다가 학생, 앉아요! 하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다. 2005년도엔 없었을 키오스크가 테이블마다 있다. 세월이 묻어나는 벽면과 다르게 최신식 장비가 다소 우습기도 했다. 대학 새내기, 선배를 쫄래쫄래 따라 와 먹었던 그 구성 그대로 고등어와 오징어볶음을 시킨다. 주위를 둘러보면 대개 똑같이 고등어와 오징어볶음.

주문을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밥알 사이 틈도 없어 보이는 공깃밥과 주메뉴로도 손색없을 미역국이 나온다. 반찬도 야무지게 마른 멸치, 오징어젓갈, 김치. 허기를 참지 못하고 주메뉴가 나오기도 전에 반찬을 번갈아 가며 맛보고 국을 마신다.

이미 어느 정도 만족스럽지만, 메인은 메인. 방금까지만 해도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을 고등어가 반질거리는 자태를 뽐내며 나온다. 매콤한 양념이 고루 묻은 오징어볶음도 뒤따라 올라온다. 절대 한 칸 자취방에선 먹을 수 없는 야들야들한 생선 살 하나에 불안은 온데간데없고 배를 채우는 행복감이 남는다. 특별한 맛은 아니지만 가장 특별한 한 상이다.

사진 속에 있는 2005년의 그들이 먹었을 고등어와 오징어볶음의 맛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십몇 년이 지나 이곳에 다시 찾아와도 비슷한 맛일 것 같다. 처음 방문한 날의 고등어와 오징어볶음을 그때도 똑같이 시키고. 아마 똑같은 맛이 날 거야. 꼭 그랬으면.
신촌을 떠난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내게 무슨 말을 할까?
그리고 머릿속에 당장 떠오르는 건
아마 불안에 오들오들 떠는 내게 가장 필요했던, 어쩌면 바라고 있었던…

괜찮아!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아도 돼, 증명하려 들지 않아도 돼. 불안에 지지 마. 좌절하지 마.
…뭐가 되든 그냥 괜찮아.
이 빠르고 거대한 세상에서 스스로에게 만큼은
관대하고 무차별적인 사랑쯤은 마구 건네도 되지 않을까.
나는 나를 안아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여기 온 모두
좌절 금지.
고삼이
주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7안길 38 고삼이
영업시간 11:00 – 20:50 (브레이크 타임 2: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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