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onstitution: cut and paste
[ 도전하는 청년! 성장하는 미래! ]
말이 쉽지.
영현은 현수막을 싱겁게 지나친다. 오 년 전에도, 십 년 전에도 본 것 같은 문구. 허울에 속을 나이는 이미 지났다.
비슷한 현수막을 몇 개 더 발견할 때쯤 중앙 연세로에서 살짝 빠져 걷다 보면, 웬 에스컬레이터가 눈에 띈다.
영현은 급경사 에스컬레이터를 따라 고개를 쭈욱 든다. 여기야?
– 응.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지윤의 목소리.
– 올라가서 왼쪽으로 바로 꺾어. 그렇게 크진 않은데, 볼 만할 거야.
영현은 대답 없이 마저 걷는다. 지윤의 안내를 이정표 삼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도착하는 곳이 바로 여기,

‘신촌 문화발전소’.
기획전시 <CUT AND PASTE>
김도영, 전혜림 作
cut and paste
지윤의 다이어리 / 2024.3.23. 土.

어제 큐레이터학과 동기들과 갔다 온 전시. 불현듯 영을 생각했다.
작가에게는 자르고, 잇고, 붙이는 도전. 큐레이터를 준비하는 나에게는 새롭게 이해하는 도전.
영현이는 무어라 받아들일까? 조금 전 버스에서 영에게 <cut and paste>를 권했다. 이 전시가 필요했을 것이다.
위로가 되기를!
#attempt

전시 소개글 /
전혜림은 낙원의 파편적 도상을 수집하여 배치하는 방식으로 회화의 방법론에 대해 접근한다. ······
<이어진 산수>는 산수화의 이미지로 보여질 수 있는 이미지들을 수집하고 요소별로 잘랐다.
윤의 평론 /
전혜림의 작업은 평면성의 재구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원근법 같은 전통적인 회화 방식을 따르는 대신,
각기 다른 재료로 그림을 그리는 등 한눈에 보았을 때 어떤 형상인지 파악할 수 없는 작업을 진행함으로써 현대미술의 곁에 서서 ‘시도한다’.
– ······. 그래서, 전혜림의 시작은 시도였어. 캔버스에 매쉬 천이나 기름종이를 덧대거나, 물리적으로 훼손하거나.
– ······.
– 실험적인 기법이지. <Cut and paste>. 이거, 옛날에 했던 ‘이어진 산수’ 시리즈에서 실패했던 큰 작업을 오려서 작은 캔버스에 옮겨 붙인 거거든.
영현은 여전히 말이 없다. <이어진 산수(XXL)> 앞에 서서 잠자코 듣고 있을 뿐이다.

<이어진 산수(XXL)>
수화기 너머의 지윤은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 지윤에게만 보이게 설정해 둔 영현의 블로그 게시글을 화면에 띄워놓고서.
—
영 / 2024.1.3. 23:25 작성됨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어 참으로 괴롭다.
생각의 중추가 퍽 하고 완전히 깨져 버린 것 같아서, 무언가에 집중하는 걸 시도하기조차 버겁다.
—
지윤도 잠시 생각에 잠긴다.
둘 사이로 침묵이 요란스레 오간다.
#error

전시 소개글 中 김도영 /
외부의 설치 작업 <Recut and paste>는 전혜림 작가의 과거 작업 중 흥미로운 부분을 선택해서
자르고 붙이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오차 같은 것들을 ‘이미지 오류’처럼 만들고 새로운 영역을 추가하여 추상적 형태를 도출했다.
– 하여튼, 다음 작품. 계속 이렇게 자르고 붙이고… 해체하고 결합하고.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 오류가 날 수밖에 없단 말야. 김도영은 이걸 ‘이미지 오류’ 라고 해.
– ······ 틀렸다는 거야?
영현이 입을 뗀다. 그러니까 뭔가 잘못됐다는 거잖아. 시도하다가.
지윤은 대답을 잠시 미뤄두고 영현의 다음 글로 담담히 넘어간다.
–
영 / 2024.1.6. 20:51 작성됨
식욕이 없어 거식하거나 폭식한다. 적당하게 계획하는 것이 어렵고 간신히 적은 체크리스트를 채우지 못한다. 가만히 있으니 체력이 떨어지고, 먹은 것을 소화할 힘이 없어 밥을 먹고 나면 졸리다. 종일 지나치게 많이 울고 먹은 거라곤 양고기, 술, 녹차라떼뿐이라 탈수가 올 것 같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어 보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
속이 쓰리다. 영현의 일기가 메스껍다. 심심한 음식만 적당히 먹었는데도 지윤은 멀미가 날 것 같았다.
#reconstitution: cut and paste
(+collaboration)

오류와 운동성
– 아니. 틀린 건 아니야. 여기서 오류의 역설적인 특성이 나타나. 분명히 오차인데도,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오류가 필수적이거든. 관람자는 전혜림의 작품을 볼 때 ‘이미지 오류’라는 강렬한 인상을 받지. 2차원의 캔버스에 운동성을 부여하는 작업인 거야.
– 이미지 오류를 통해서 전혜림과 김도영, 또 내가 엮일 수 있다?
– 응. 오류는 실패가 아니라 우리를 묶는 속성. 바인딩 다이어리 같은 거라고 해야 하나. 3월 자리에 1월에 본 영화 포스터가 끼워져 있으면 이건 오류지. 근데 그렇다고 에이, 하고 찢어버릴 거 아니잖아.
– 그렇기는 하지. 옮기면 되니까. 그냥 돌려놓으면 되는 거잖아.
지윤은 슬그머니 웃음기를 띤다. 응. 맞지. 별거 아니지. 너도 알고 있구나. 정말로 즐거운 대답이야. 목소리에 힘을 싣는다.
– 틀린 것도 아니고 실패한 건 더더욱 아니고. 또 굳이 빼버리지 않아도, 포스터 옆에 두 달이 지난 시점에서의 감상평을 적어 둬도 되지. 그러면 3월 자리에 있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잖아. 이 전시에서 말하자면 reconstitution, 재구성이야.
영현은 다시 한동안 말이 없다.
지윤은 조금 긴장한다. 실수한 게 있나? 영과의 침묵이 어색한 건 오랜만이라 서둘러 다음 말을 찾는다.
– 전혜림의 해체와 재구성, 김도영의 편집디자인은 결합했을 때 시너지가 날 수밖에 없지. 오류가 시각적 쾌락으로 전이되어 ‘화이트 큐브*’에 녹아든 거잖아? 게다가 워킹스루 갤러리**에도!
– 윤, 너 퍼스널컬러 화이트큐브 해라.
어색할 때 전문성이 확, 뻗치는 건 지윤의 특징이다. 여백 없이 박아대는 그의 말이 영현은 꽤 익숙하다. 영현은 시시한 농담을 던진다.
– 나 퍼스널컬러 같은 거 관심 없는 거 알잖아.
시시한 농담엔 더 시시한 농담으로. 전혜림과 김도영만큼이나 잘 맞는 영과 윤.
*화이트 큐브: 출입구 외에는 사방이 막혀 있는 실내 공간. 미술작품을 전시하는 가장 기본적인 공간이다.
**워킹스루 갤러리(Walking-through Gallery): 내부 전시 공간 바깥에서도 길거리를 지나가며 체험할 수 있는 전시. 주로 건물 외벽, 조형물 등을 통해 실현된다.
<cut and paste>의 경우 김도영의 작품에 해당.
– 여기부터는 혼자 볼래.
– 그래? 설명 듣는 거 좋아하잖아.
– 그래도 오늘은 혼자 볼래. 고마워.
곧 전화가 끊긴다.
영현은 한참이나 자리를 지켰다. 해가 그리는 원호를 볼 수 있을 만큼 오래.

지윤은 모니터 앞에 앉는다. 습관처럼 인터넷을 켜서 들어간 곳은, 영현의 블로그.
어제 올렸네. 지윤은 반짝이는 글자에 커서를 댄다.
–
영 / 2024.3.24. 15:21 작성됨
#reconstitution
다시 힘을 낼 것이다. 깨어진 것은 삶이 아니라 생활일 터이니 그냥 돌려놓으면 되는 게 생활. 그러면 끝!
나는 딛는 인간이다. 이것이 ‘생활’의 묘미이다.
#cut
온종일 무기력하여도 다음날이 되면
#paste
음, 희한한 꿈을 꾸었군. 하고 다시 스케줄러를 꺼내 책상 앞에 앉는다. 이렇게나 간단한 것이 회복이다.
–
문득 지윤은, 영현을 전혜림으로. 자신을 김도영으로. 바꾸어 불러본다. 블로그의 흰 배경이 전시장처럼 느껴진다.
영, 너는 너를 편집하는 거니.
영현은 영현의 실패를 재설치. 재조립. 재정의. 재결합.
자 르 / 고 잇 – 고 붙이고
너의 오류 너의 운동성 너의 아우라 너의 화이트큐브 너의 나
지윤은 영현을 잘근잘근 씹는다. 그러고는 김도영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너의 소화법을 알려줘.
영현을 다시, 한 번 더 재구성.
그러니까, 오늘은 영의 글을 읽고 댓글을 다는 것까지가 윤의 일과.
–
윤의 댓글 / 2024.3.25. 21:11 작성됨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거니······.
– 신석정, 「들길에 서서」
–
/ 실제로 큐레이터학을 전공하는 제 친구가 지윤의 모티프가 되어주었습니다.
지윤의 해석 대부분은 필자가 이 친구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것임을 알리며, 한없이 부족한 영의 오류를 품어내고 재구성으로 이끌어준 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

<Cut And Paste>
2024년 3월 22일(금) – 5월 22일(수)
신촌문화발전소 1 – 2층, 야외공간
화요일 – 토요일 10시 – 21시
*매주 일요일, 월요일, 공휴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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