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TO ZANCHI! · 신촌을 사랑하고, 추억하고, 기록하다
· 로그인
UNCATEGORIZED 2025 · 04 · 09

461. 마주치는 세계들의 해상도를 높이면

Editor 왕 잔치

신촌에서의 약속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은 네온싸인으로 반짝거린다. 늦은 시간에도 거리는 활기로 가득 차있다.
네온싸인들은 빨리 지나쳐 걸어가다보면 섬광처럼 느껴진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최대한 쳐다보지 않고, 지나치려고 한다. (그게 예의라고 배웠다.) 사람들도 지나가는 빛으로 보인다.
그렇게 신촌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밤의 환승역은 고요하다.
길게 늘어선 지하철의 한 칸마다 한 사람도 안 되게 서 있다.
옆 3-3칸에는 커플, 4-2칸에는 중년의 아저씨…
나머지 칸의 사람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직 지하철이 오려면 시간이 좀 남았다. 벤치에 앉아서 쉬도록 해야겠다.
이곳 환승역은 지상철이라 구조가 독특한 것 같다.
벤치에 앉자마자 건너편 승강장들의 풍경이 겹쳐져 스크린도어의 프레임 속으로 보인다.

스크린도어 건너편 저곳은 가깝지만 너무나 먼 곳이다.
우리는 곧 아주 다른 방향으로 향하니까

그래서 지하철을 기다릴 때 핸드폰을 하기보다는, 이어폰을 꽂고 사람들을 관찰하는 편이 났다.
스크린도어 건너편 승강장 속 그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불편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은 흥미롭지만, 특정 인물이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불편하다.
술에 취한 듯한 중년의 여성이 내 눈에 들어온다.
그녀의 움직임은 위태롭고 불안정하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미친 것 같다.
헝클어진 태도로,
금방이라도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불필요한 질문을 할 것만 같다. 정말 피하고 싶게…
그녀의 눈에는 생기가 없어보이나, 옷은 꽤 멀끔히 갖춰 입은 편이다. 직장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한 차림새이다. 이렇게 상반된 요소 때문에 그녀에게 자꾸만 눈길이 가는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건너와서 말을 걸 것 같으니 조심해야겠다.

마침 건너편 승강장의 열차노선에 문제가 생겨서 열차가 30분 정도 지연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다.
어쩌나? 그녀의 집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제 내 열차가 오기까지 5분 정도 남은 것 같다.

‘어…
저 사람 가방이랑 짐들을 벤치에 두고 가잖아…?’

그녀는 아무생각 없는 어린아이처럼 4-1칸 앞에 짐들을 두고 6-3칸 앞에서 걸어가고 있다.
그놈의 의무감 때문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나도 일어나서 그녀를 따라갔다.

생각보다 그녀의 걸음은 빨랐다. 뛰어야했다.

9-1칸에 도착해서야 그녀는 멈추고, 스크린도어 앞에 섰다. 계속 휘청거렸다.

난 스크린도어를 두드리며 그녀를 불렀다.

몸짓으로 가방을 저-쪽에 두고 왔다고 알려주었지만, 취한 그녀가 알아들을 리가 있겠나…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어 마커로 글씨를 크게 써서 보여주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조금 정신을 차린 듯,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감사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어떤 용기에선지 공책에 난 다시 질문을 적었다.

“어디로 가세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크게 적어 주었다. 신촌인지 신당인지 모르겠다.
아마 그곳에 그녀의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회식 갔다 오는 길이세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리라는 듯이 손을 흔들고 4-1 칸에 놓고 온 짐을 가지러 갔다.
나도 스크린도어를 사이에 두고 그녀를 따라갔다.
그 사이 내 열차는 지나갔다.

‘아직 막차까지는 좀 남았으니까…’

그녀도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서 글씨를 써주었다.

“오늘 중요한 바이어 미팅이 있었어요.”

‘그게 잘 안 돼서 저러시는 건가…?’

“오! 잘 됐나요?”

“네!”

 …?

“저 잠깐 그 쪽으로 가도 되나요?”

나는 그녀의 승강장으로 갔다.

“오늘 좀 힘들어 보이시던데, 무슨 일 있으신 거 아니었어요?”

“사실 그건 아니고..ㅎㅎ”

그녀가 말하길, 그녀는 커리어적으로는 매우 성공했다.
그러나 자신의 개인적인 삶은 남은 게 없는 것 같다고 한다.
취해서, 자신의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한다.

구체적으로 말은 안 하지만, 무슨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그녀의 이름은 정현이다.

“ 제 아이들이 지금 학생이거든요. 청승맞게, 지하철을 타면 애들 생각나서….”

“그러면 정현님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해요?”

“사랑이요. 지금까지는 사회적인 성공을 보고 달려왔는데,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고 보니 결국에는 사랑인 거 같아요.”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 주변 모든 것들을요.”

“사랑이 뭔데요…?”

“…”

“사랑은 아껴주는 거예요.

사랑은 생각보다 범위가 넓다는 거 알고 계세요? 일단 저는 제 아이들을 사랑해요. 제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어요. 그리고 저는 제 일을 사랑해요. 저는 외국계회사에서 마켓팅 이사를 하고 있어요. 마켓팅이란 게 단순히 상업이 아니라, 매우 매력적인 업종이에요. 어떻게 마켓팅을 하냐에 따라서 제가 만들어내는 가치가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제 주변 모든 것들은 사랑해 마땅해요.
그런데 사랑에 우선순위를 둘 수 있을까요? 저에게 주어진 시간과 저라는 존재는 한정적인데 사랑은 무한해요. 제 아이와 일 모두에게 균형잡힌 애정을 주는 게 어려워요. 어려운 만큼 더 중요하다고 생각이 되는 거고요.”

.

.

.

.

나는 그렇게 열차를 4번 정도 보냈다.
나는 다시 반대편 승강장으로 돌아갔고, 그녀가 정겨운 손인사를 하며 열차를 탔다.
그녀가 궁금했나? 궁금하지 않았나?
알고 싶지 않았나….
미쳤다고 생각했었던 정현의 말들이 내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 두려운 감정을 남기는 밤이었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속도가 얼마나 느린지도 체감할 수 없을 만큼 술에 취해 비틀거렸다. 그런 내 모습을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힐끔거리며 수군거리는 건 오히려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들은 아무래도 좋다. 자기위안이 아니다. 엄청 신경 쓰이는데 쿨한 척 하는 것도 아니다. 마음 속 보이지 않게 폭포처럼 흐르는 눈물이 체면을 둔하게 만들었나보다.
그렇게 얼만큼 걸었을까. 문득 길가의 불 꺼진 프랜차이즈 빵집 속 진열된 케이크들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창에 손바닥을 턱, 올리고 마치 취하지 않은 사람인 것처럼 집중하려 눈을 부릅떴다. 캄캄한 어둠 속 식별하기 어렵지만 위에서 두 번째 칸 고구마 케이크로 보이는 무언가. 마음 속 폭포가 쏟아지는 게 느껴진다.

엄마는 딸 생일보다 미팅이 중요한가봐.
그렇게 중요한 미팅 성공한 거 축하해.

축하해, 라는 말을 한 건 다름 아닌 축하 받는 날의 주인공인 사람. 그리고 나는 자정이 넘도록 딸에게 축하한다는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했다. 자정이 넘어서야 그날 처음 딸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에. 굳게 닫힌 딸의 방문에서 식탁 위로 시선을 돌리니, 딸이 아주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고구마 케이크가 먹다 말고 미처 정리되지 못한 채로 남겨져 있었다.

어떻게 내가 이 날을 잊었을까? 16년 전 오늘, 세상을 다 가진 게 이런 기분일까 싶었던 날을…

실장님, 미팅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셨다면서요. 축하드립니다.
실장님! 축하드려요, 수고 많으셨어요.
축하하네, 고생이 많았어.

그래서 오늘은 마음이 아주 아팠어. 너에겐 축하한단 말 한 마디 못 해주었는데 정작 나는 축하한단 말을 너무 많이 들어버렸어.

주르륵, 유리창에서 미끄러진 손은 아래로 떨어지고 나는 다시 느린 발걸음을 옮긴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회사에서도 높은 직급에 올랐지만 아직 많이 부족한가보다. 너와 일을 모두 후회 없이 맘껏 사랑하는 법을 더 배워야 하나보다. 그리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잘 사랑하고 싶다.

왕 잔치
AUTHOR PROFILE
왕 잔치

잔치의 시선으로 신촌의 장면과 사람, 장소를 기록합니다.

COMMENTS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이야기를 남겨주세요.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