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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CATEGORIZED 2025 · 04 · 09

461. 마주치는 세계들의 해상도를 높이면

Editor 왕 잔치

하아… 드디어 집에 가네.

하루종일 바쁘게 쏘다니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가는 길. 아침부터 있는 수업을 들으려 이른 시간 집에서 나와 강의가 끝날 때마다 캠퍼스를 거의 뛰다시피 했다. 자칫 늦으면 두 시간 내내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화질인 교수님의 모습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덤으로 종종 느껴지는 차가운 아밀레이스까지도 감당해야 한다. 그게 싫어 앞 강의가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빠져나와 땅만 쳐다본 채 경보로 다음 강의실로 이동한다.
하교할 때쯤이 되면 종아리가 퉁퉁 부어있는 게 느껴진다. 어디라도 좋으니 엉덩이를 붙이고 앉을 곳을 찾고 싶다. 이런 마음이 들 때면, 집으로 가는 버스에 얼른 올라타고 싶어진다. 수업 들으며 지겹도록 앉아있었지만 아무래도 그거랑 이거는 다르다. 창 밖을 바라보며 텅 비운 머릿속에 좋아하는 노래를 가득 퍼지게 하는 것이 하루 끝의 낙이다.
마주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피해 걷고 있는데, 앞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시야로 들어와 묻는다.

아가씨! 여기서 원효로 2가 가려면 어디로 가야 돼요?

아, 저기 있는 정류장에서 7016번 버스 타면 돼요. 저도 지금 그거 타러 가는 길이에요.
아이고, 고마워요. 학생 복 받을 거야.
하하, 감사합니다…

원래 신촌에 자주 오세요?
자주는 아니고, 가끔 볼 일 있어서 오는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어떻게 매번 올 때마다 집 가는 길을 까먹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손전화로 어떻게 길을 다 찾던데… 나 같은 사람들은 그런 거 복잡시러워서 못 하고, 정류장에 붙어 있는 노선표 보고 찾는 거예요. 젊은 애들 눈에는 바보 같아 보이겠지만 어쩔 수 없어…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해서.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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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내가 뭐라고 그런 거 할 게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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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먼저 내리니까 안쪽에 앉으세요.
근데 아가씨 여기 치마가 접혔네. 내가 펴줄게. 고맙습니다! 이런 것도 잘 살피고 다녀야 돼요. 내 모습은 내가 잘 가꿔야 되는 거야. 나도 이 나이 먹고 거울 아침 저녁으로 보고 다녀. 나는 빠마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해요. 안 그러면 정수리가 축 눌려서 사람이 참 볼품없어 보여. 이 머리도 저번 주… 월요일인가? 월요일에 한 거야. 거기, 동네 미용실에서. 우리 동네 엄마들은 다 거기 다니거든. 머리 하면서 동네에 있는 온갖 소식 소문들을 다 듣고 와요. 사실 그거 때문에 가는 것도 있어. (웃음) 저번 주에도 꼬박… 음, 5시간을 태우다 왔네.

엄청 멋쟁이신 것 같아요. 옷도 제가 입는 것보다 훨씬 화려한 스타일로 입으세요.
요새 젊은 청년들은 이런 빨간색 잘 안 입더라고. 시꺼먼 옷 많이 입으니까 지하철 역 같은 데 들어가면 사람들이 온통 시꺼매. 나 젊을 때는 검은색 상복 입을 때나 입었지… 근데, 젊은 사람들은 검은 옷을 입어도 반짝반짝 빛이 나. 젊음에서 나오는 빛이 있어. 뭘 입어도 예쁠 나이야, 그 나이는. 나이가 들수록 칙칙한 옷을 입으면 안 그래도 힘이 빠지는데 더 없어져. 옷이라도 생기 있는 걸 입어야 돼. (웃음)

아직 너무나 활력 있으신데요! 저보다 에너지 넘치시는 것 같기도 하구요. 젊게 사시는 것 같아요.
그러려고 하지. 사람은 평생 새로운 걸 배우면서 살아야 안 늙어. 안 늙지는 않지만 덜 늙어. 나는 지금도 문화센터 가서 아침마다 수영하고 점심에는 차 마시면서 독서하고 저녁에는 피아노 배우고 그래. (와, 대단하세요.) 나도 평생을 이렇게 산 건 아니고 3년 좀 넘었네. 3년 전에 우리 바깥사람 먼저 보내고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마음이 텅 빈 느낌이 드는 거야. 그러니까 사람이 그냥 누워만 있게 되더라고. 그러다가 안되겠다 싶어서 이것저것 시작한 거야. 아가씨도 힘들 때는 누워만 있지 말고 바쁘게 살아야 돼.

자녀 분들이랑은 같이 안 사시는 거예요?
하나 있는 우리 딸은 지금 미국 살아. 미국에서 엄청 큰 회사 다녀. xx… 였나? 아는지 모르겠네. 오, 알아요! 근데 이번 주말에 한국 온대. 우리 4살 난 손녀도 있는데, 데리고 온다고 해서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기로 했어. 우리 딸이 저기 큰 땅에서 대기업 다니니까 돈도 잘 벌고 비싼 밥 사주면서 호강을 시키네. 남이 지 자식 자랑하는 거 듣기 싫은 건 잘 아는데 또 정작 나는 매번 이렇게 하게 돼요.

저도 좋은 회사 들어가면 좀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행복한 거는 아가씨가 마음을 좋게 먹어야지. 요즘 세상이 너무 어려워. 젊은 사람들 살기에 너무 어려워. 우리 딸도 미국 가서 많이 힘들 거야. 걔도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아서 공부도 곧잘 하고 했지만서도 아가씨 나이 때 돼서는 방황을 많이 했어요. 고민도 많이 하고 고생도 많이 하고. 옆에서 보는데 안쓰럽더라고… 근데 그러다가 지 하고 싶은 게 있다면서 미국 가서 사는 거야. 간 지는 7년 좀 안 됐나? 솔직히 부모 마음이야, 옆에 끼고 살고 싶지. 혼자 살면 얼마나 외로운데, 맨날맨날 보고 싶고 그래요. 우리 딸도 이제 엄마고 아줌마 다 됐지만 내 눈에는 마냥 애기 같거든. (웃음) 그래도 자기가 행복한 일 하는 것만으로 나한테는 충분해요. 아가씨도 아가씨 행복한 일 해. 좋은 회사 들어가면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행복한 일 할 수 있는 게 좋은 회사인 거야. 그래도 돈 잘 벌면 좋긴 하지.

저도 어머니 따님처럼 멋진 커리어우먼이 되면 좋겠네요. (웃음) 오랜만에 따님 봐서 좋으시겠어요.
아무렴 좋지. 아이고, 가만 있어봐. 내가 가방 어디에 넣어 놨는데… 여깄다. 이거 사탕, 아가씨 예뻐서 주는 거야.
아! 잘 먹겠습니다. 저는 이제 여기서 내리거든요,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리고 걸어서 집으로 향한다. 다급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걸음을 서두른다. 정확히 몇 년 전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나이부터 바쁘게 집안일을 하다보니 생긴 습관이다. 다리가 예전만큼 잘 따라주지 않지만 마음만은 이유 없이 늘 급해서, 나보다 앞서 가던 아저씨를 제치고 걷는다.
문득 이렇게 서둘러 집에 가봤자 뭐하냐는 생각이 든다. 지금쯤이면 경비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터라 얼른 밥 해줘야 하는 남편도 없다. 딸이 퇴근하고 피곤하다면서 대충 끼니를 때운 뒤 싱크대에 물을 받아 놓았을 설거지거리도 없다. 왜 해도해도 매번 산더미 같이 쌓이는지 의문인 3인분의 빨래도 없다.
지난 주 머리를 말면서, 웬수 남편도 철부지 딸도 없으니 오랜 집안일에서 해방되어 후련하지 않느냐고 묻는 미용실 원장에게, 아주 속이 다 시원하다고 너스레를 떨었었다. 엄마들은 아들딸들이 나이 삼십 먹고도 집에서 안 나간다며 한탄하고는, 미국 대기업 다니는 딸 가진 내가 부럽다며 깔깔 웃어댔다.
아줌마들 앞에서는 굳이 얘기하지 않았다. 그 지겨운 집안일과 함께 사라진 것들을. 고된 하루 끝엔 역시 마누라 밥이 최고라며 입에 발린 말을 잘도 하는 남편을. 매일 밖에서 있었던 일들을 엄마한테 말해주기만 기다렸다며 지치지도 않는지 재잘대는 딸을. 셀 수도 없이 많이 봤지만 그렇기에 그들이 내 곁에 있음을 실감하게 하는 옷가지들을.
길이 어둑하다. 봄이 된 지도 꽤 지났는데도 아직 쌀쌀한 날씨에 푸른 경량패딩을 고쳐 싸맨다. 은색 큐빅으로 화려한 자수가 놓인 새빨간 티셔츠가 보이지 않게 지퍼를 죽 잠가 올린다. 그리고 방금 한 모든 생각들에도 여전히 걸음은 늦추지 않는다. 집 가서 얼른 끝내야 하는 피아노 이론 교재 숙제가 있기 때문이다.

왕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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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잔치

잔치의 시선으로 신촌의 장면과 사람, 장소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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