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 마주치는 세계들의 해상도를 높이면
대학생들로 가득찬 시끌벅적한 신촌 골목길을 벗어나, 조금은 고요한 현대백화점 앞 버스정류장. 7011번 버스를 타고 서울역 버스환승센터에 도착한다. 밤 11시가 넘은 늦은 시간이지만 전국 각지로 떠나는 사람들로 붐비는 서울역. 비록 낮과 다름없이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낮과 다르게 지친 기색이 역력한 사람들. 때문에 밤의 서울역은 대체로 조용한 편이다. 언제나 운행 일정으로 빼곡하게 차있는 전광판이지만, 막차를 앞두고 있는 시각, 전광판의 아래 칸이 하나 둘 비어간다. 대전으로 가는 마지막 기차를 놓칠 새라 지친 몸을 이끌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12호차… 좀 걸어가야 되네. 기차 떠나기 2분 전인데”
승강장으로 내려간 후, 쭉 걸어가다보니 보이는 12호차 문. 이 기차는 오늘 얼마나 많은 승객들을 받아들였을까.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스친 흔적이 보이는, 덜컹이는 계단을 한 칸씩 올라갔다.
아이쿠, 죄송합니다.
(졸다가 일어난 채로) 어유, 아니에요. 여기 공간이 너무 좁죠? 입석 자리 펴니까 지나가기가 진짜 불편한 것 같아요.
어? 근데 옷이 너무 예쁜데요? 혹시 패션 업계쪽에서 일하시는 분이세요?
어떻게 알았어요? 홍대에서 5년째 작은 옷가게를 운영중이거든요.
진짜 홍대에서 옷 가게를 운영하시는 분이셨군요!! 혹시 잠깐 인터뷰 괜찮으실까요…?
여기서요…? 할 말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필요하다면요!
너무 감사해요! 옷가게를 운영하시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제가 원래 패션 전공을 한 건 아니지만, 항상 잔잔한 관심이 있었거든요. 패션 디자인이라는 게 무턱대고 시작하기에는 진입장벽이 어느정도 있는 영역이다보니까 쉽게 도전을 못하고 있었죠. 그러다가 대학교 4학년 때, 문득 ‘내가 대학생 때 하고 싶은 걸 해보지 않으면 언제 해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패션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거기서 정말 잘 맞는 친구 한 명을 사귀게 되었는데, 알고보니 그 친구가 패디과였고, 옷 가게 창업을 준비하고 있었더라고요. 마침 친구도 함께 일할 사람을 찾고 있었고, 저는 패션 업계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함께 옷 가게를 운영하게 되었어요.
마음 맞는 친구와 함께 창업이라니⬝⬝⬝ 한때 제 로망이기도 했거든요. 친구 분과 열게된 옷가게만의 특별한 점이 있을까요?
사실 홍대가 트렌드에 굉장히 민감한 동네잖아요. 그러다보니까 평범한 옷은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친구도 패디과 출신이고, 저도 패션 동아리를 1년 넘게 했다보니 ‘직접 디자인한 옷을 팔아보자’로 의견이 모아졌어요. 저희는 매달 키워드를 정하고 그 키워드에 맞는 옷을 판매하거든요. 매월 월초에 가게 인스타그램을 통해 5가지 키워드 중 원하는 키워드 투표를 받은 후, 최종 선정된 키워드를 주제로 옷을 디자인해요. 그리고 그 옷들은 다음달에 세상에 공개되는 것이죠.
대중들이 직접 고른 키워드인 만큼 출시되는 옷도 많은 관심을 받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매달 다른 키워드에 맞게 새로운 옷을 만드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닐 것 같은데,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키워드가 제시되기는 하지만, 사실 키워드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거잖아요. 키워드에서 파생되는 아이디어들이 많을 때도 있지만, 없을 때는 고민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흔히들 말하는 창작의 고통이랄까요? (웃음)
그래도 결국은 옷을 출시해야 하는 마감기한이 있을텐데, 정말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시나요?
사실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 순간이 바로 지금이에요 (웃음). 그럴 때는 지금처럼 어디론가 훌쩍 떠나봐요. 아무런 계획없이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에 가서 가장 빨리 떠날 수 있는 표를 사는 거에요! 오늘은 대전행 KTX 표를 구했어요. 평소 마주하지 않았던 곳에서 지도에 의지하든, 감에 의지하든 어떤 식으로든 그곳에서의 하루를 해결해나가다보면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떠올라요. 새로운 곳이 주는 설렘과 낯섦이 있으니까요.
대전에서는 어떤 걸 하면서 보내실 생각이세요?
일단 내일 아침에는 성심당에 가봐야겠어요. 또 모르잖아요. 빵 냄새를 맡으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지! 이제 자정이 넘었으니까⬝⬝⬝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네요. 오늘도 익숙하지 않은 곳이라 쉽지만은 않겠지만 그래도 하나씩 직접 부딪히면서 알찬 하루를 보내봐야겠어요. 그 속에서 많은 영감들이 찾아와주길 기다리면서요!
낯선 곳에서 부딪히면서 얻어내는 영감이라니! 좋은 옷이 안 나올 수가 없겠는데요?
(우리 열차는 잠시 후 대전역에 도착하겠습니다.)
벌써 대전역에 도착했네요. 이번 여행이 마음에 쏙 드는 옷을 만들어줄, 다양한 영감들을 마주하는 여정이 되시길 바랄게요.
고마워요. 학생도 영감 가득한 하루가 되기를 바랄게요. 조심히 들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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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KTX에 타고 나서야 즉흥적으로 잡았던 숙소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간다. 난생 처음으로 와본, 낯선 곳의 밤공기를 들이키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늦은 시간 타지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중년 남성, 놀러갔다가 밤 늦게 돌아오는 딸아이가 걱정되어 역으로 데리러 온 아버지, 오랜만에 만나 반가워하는 연인들, 어디선가 즐거운 여행을 하고 돌아온건지 재잘재잘 떠드는 고등학생들, 한 손은 어머니의 손을, 다른 한 손은 풍선을 들고 아장아장 걸어나가는 유치원생 아기까지. 각자마다의 이야기를 담은 사람들이 역을 벗어나고 있었다. 이윽고 낮은 건물, 시장, 그리고 불 꺼진 도매상들이 보인다. 지하철도, 버스도 모두 끊긴 시간, 고요함 속에서 생각에 잠긴다. 그러더니 문득 휴대폰을 꺼내들어 친구에게 문자를 남긴다. 영감을 찾아 낯선 곳으로 즉흥 여행을 오게 된 것도, 하루동안 홀로 가게를 봐줄 친구의 배려가 있어서였으며, 하고 싶었던 패션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친구와의 만남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으니. 모두들 봄이라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찬 공기가 느껴지는 낯선 곳의 밤길을 걸으며 어떠한 만남과 배려 없이, 혼자만의 힘으로 이룬 것이 과연 얼마나 있었는지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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