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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2026 · 05 · 20

502. 신촌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

Editor 영

 

공 수업을 한 시간 앞둔 수요일 점심. 지하철이 왔는데도 의자에 가만히 앉아 허공을 바라보는 한 남자를 만났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멈추게 된 데에는 어떤 사정이 있을까. 호기심에 다가가 물었다.

 

 

 

안녕하세요, 지하철 왔는데 왜 안 타세요?

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방금 내린 거예요. 친구가 이제 막 일어났다고, 오는 데 30분 걸린다고 해서요. 걔 기다리는 동안 어디 갈지 생각 중이었어요.

저랑 처지가 같으시네요. 저도 다음 수업까지 1시간이나 남았거든요. 괜찮으시면 시간 때울 장소 후보 한 가지만 공유받을 수 있을까요?

음… 평소에 뭐하면서 휴일을 보내세요?

저요? 카페 가는 것도 좋아하고, 책 읽는 것도 좋아하고… 딱히 싫어하는 게 없어요.

저기 중고서점 있지 않아요? 알라딘.

아, 있죠. 가 보신 적 있으세요?

자주 가요. 방금도 친구 올 때까지 거기 가 있을까 생각 중이었어요.

책 좋아하시나 봐요.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관성처럼 가게 돼요.

 

관성이라, 제가 진짜 좋아하는 단어라 괜히 반갑네요. 관성처럼 그곳에 가는 이유가 있으세요?

거기 안에 들어가면, 시간 감각이 흐릿해지는 것 같거든요.

혹시 그루엔 효과라고 아세요? 공간 마케팅 기법 중 하난데, 의도적으로 동선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소비자가 체류하는 시간을 늘리는 거예요. 그래서 왜, 그런 말도 있잖아요. 백화점 1층에는 시계, 창문, 화장실이 없다고요. 시계랑 창문이 없으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쇼핑하게 되고, 화장실 찾으러 다른 층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상품을 만나 구매하기도 하고요. 물론 중고서점이 그걸 유도해서 지하에 지어진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는 시간 감각이 흐릿해지는 것 같아요. 사실 밖에서는 다리가 쉴 틈이 없잖아요. 누굴 만나러 가든, 수업 들으러 가든, 지하철 타러 가든. 그런데 서점은 반대예요. 거기는 멈춰서야 하는 공간이니까요.

멈춰서 책을 읽어야 비로소 서점이라는 공간의 목적에 부합한다는 이야기시군요.

네.

 

그리고 중고서점의 책들은 책마다 상태가 다 다르잖아요. 중고책이다 보니 가끔 밑줄 그어진 페이지도 있고, 아님 첫 페이지에 누구에게, 이런 거 써 있는 책도 있고요. 그런 흔적을 찾는 게 재밌어서 자주 가게 되는 것 같기도 해요.

흔적이라는 단어가 인상적이네요.

새 책은 너무 깨끗해서 만들어진 상품의 느낌이 강한데, 중고책은 상품보다는 누가 읽다 넘긴 시간 그 자체에 가깝다고나 할까요. 예전에 거기서 소설을 한 권 산 적이 있는데, 안에 영수증이 끼워져 있었어요. 그 전 사람이 책갈피 대용으로 쓴 것 같더라고요. 별거 아닌데도 한참 들여다봤어요. 이 사람은 그날 이 음식을 먹고 이 책을 읽은 건가? 어떤 사람이었지? 왜 이 책을 포기했을까? 너무 스토커 같나요? (웃음)

 

아뇨, 중고책을 그런 시선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는 게 색다르기만 한걸요. 그럼 알라딘 중고서점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의미를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어떤 단어가 될까요?

경유지.

단 한 번도 거길 가기 위해 마음먹고 외출한 적은 없어요. 그냥 잠깐 뜬 시간을 채우기 위해 들른 공간이었죠. 그런데 시간을 비우러 들어간 곳에서 도리어 뭔가를 조금씩 담아오게 돼요. 그러니까, 굳이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경유지가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철학적인 답변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경유의 미학을 아는 이로서 지금 이 웹진을 보고 계실 독자분들, 그리고 신촌을 향유하는 청춘들에게 한 마디 해주신다면 어떤 말이 있을까요?

가끔은 멈추시길. 어떨 때는 그게 걷는 것보다 빨라요.

 

 

 

 

누군가의 경유지.

그곳에서는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난다.

 

영
AUTHOR PROFILE

잔치의 시선으로 신촌의 장면과 사람, 장소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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