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TO ZANCHI! · 신촌을 사랑하고, 추억하고,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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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2017 · 09 · 28

74. 가미

Editor 왕 잔치

  “네버랜드는 어린이들의 천국. 아무도 늙지 않는 꿈의 나라야!”
 모두가 잠든 깊은 새벽, 웬디는 피터팬으로부터 네버랜드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네버랜드에 대한 환상은 웬디의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닌다. 한 번도 가지 못한 환상 속의 ‘네버랜드’를 전해들으며 꿈을 꾸는 웬디. 에디터의 유년시절은 웬디의 그것과 닮았다. 에디터에게 피터팬은 부모님이었고, 네버랜드는 ‘신촌’이었다.

  에디터의 부모님은 스물에서 스물한 살이 되던 겨울에 만나 스물아홉에서 서른이 되는 가을에 결혼했다. 1986년부터 1994년. 8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들은 신촌에서 수많은 추억을 쌓았다. 그렇기에 어릴 적부터 전해 들은 부모님의 연애사가 배어있는 신촌은 에디터에게 꿈과도 같은 공간이었다. 수많은 사람의 발자국이 묻어있는 신촌의 거리에는 이십 대의 부모님이 싸우고 토라져 하릴 없이 신촌 골목골목을 걸었던 추억이 배어있다.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햄버거 가게에서는 ‘우리 이제 결혼하자’고 말했던 사랑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신촌. 밤새도록 피터팬의 이야기를 들은 웬디가 네버랜드를 그리듯, 그렇게 에디터도 신촌을 그리게 되었다. 부모님과 ‘신촌’이라는 같은 장소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그들이 떠올리는 1980년대의 신촌은 어느덧 2010년대의 신촌이 되어 조그맣지만 끊임없이 숨을 내쉬면서 에디터를 반긴다. 조금은 빛이 바랜 건물들과 닳고 닳은 아스팔트 역시 에디터를 맞이한다. 부모님이 8년의 시간을 보냈을 수없이 많은 거리와 가게들. 에디터가 무심코 지나치는 가게가 어쩌면 그들의 청춘이 녹아있을, 스물의 증인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늘 이상야릇한 기분을 선사한다.
  그래서 에디터는 이십 대의 부모님의 추억이 그득한 장소 중 하나를 방문해보기로 했다. 어느덧 오십대를 맞이한 에디터의 부모님, 송미영(49), 이화선(50)과 함께. “데이트 할 때, 어떤 가게를 자주 갔어?”라는 에디터의 질문에 부모님은 고심 끝에 “가미도 자주 갔지. 냉면이랑 주먹밥이 참 맛있었는데.”라고 대답하셨다. 냉면과 주먹밥. 듣기만 해도 실로 흥미로운 조합이었다. ‘냉면 국물에 주먹밥을 넣어먹는 건가?’라는 어처구니없는 상상과 함께 에디터는 ‘가미’로 향했다. 가미에 얽힌 그들의 사랑과 전쟁 비화 역시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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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마어마하게 가파른 경사길을 걷다보면 마주하는 가미. Since 1975는 더욱 어마어마하다. 

 

  창천교회와 이대 사이, 거미줄과 같이 길게 늘어선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 걷다보면 가미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다. 한 겨울 이대 정문 앞 빙판 내리막길에서 넘어져 창피했었다는 어머니의 추억 젖은 이야기를 들으며 가미의 문을 열었다. 약간은 때가 탄 메뉴판과 창밖으로 보이는 오래된 상가의 지붕이 추억처럼 정겨웠다.

  송미영(어머니, 이하 송): (메뉴판을 펼치며) 뭐 먹을 거야?
  이화선(아버지, 이하 이): 가미는 물냉면이지!

 

감칠맛이 가미(加味)된 가미(加味)의 냉면. 얼마나 시원할지 가미 오니?

 .

  그렇게 주문한 물냉면. 살얼음이 사각거리는 냉면국물과 면발이 커다란 양푼 그릇에 담겨 나온다. 냉면의 고운 자태를 감상하기도 잠시, 식당 아주머니가 그릇에 예쁘게 담긴 오이채와 삶은 달걀, 빨간 소스를 슥슥 가위로 헤치고 면발을 자르신다. 아무런 말없이 냉면 담긴 커다란 그릇을 가져와서 아무런 말없이 면발을 슥슥 자른 후 무심히 냉면을 툭 테이블에 두고 미련 없이 뒤를 도는 아주머니. 투박하기 때문에 오히려 편안하고 마치 집에 온 것만 같다. 과한 친절을 받지 않으면서, 시원하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는 느낌이다.

 

“주먹밥 먹고 싶어도 우린 돈이 없었지.”

 .

  이: 우리가 대학생 때 오니기리(일본식 주먹밥)를 먹었나? 
  송: 우린 돈이 없어서 냉면만 먹었지. 자주 먹지는 못했어.

  물냉면을 반쯤 먹었을 때, 반질반질한 윤기가 도는 찹쌀 주먹밥이 등장했다. 기다란 그릇에 통통한 몸을 뉘인 그 자태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서로 착 붙어 쫄깃쫄깃하게 씹히는 찹쌀들을 헤치다보면 나오는 주먹밥 속 간이 적당히 배인 쇠고기가 빼꼼히 제 존재감을 드러낸다. 별다른 데코레이션이나 신기한 소스 없이도 이렇게 구수한 맛을 낼 수 있다니. 주먹밥과 함께 나오는 간장소스에 폭 담궈 입에 넣으면 방금 전 뽑아낸 따끈따끈한 가래떡을 간장에 찍은 것처럼 짭쪼름하면서 쫄깃한 식감이 된다. 그 상태에서 한입 베어물면 K.O. 쫄깃쫄깃한 식감을 특히나 좋아하는 에디터는 연신 “맛있다!” 를 연발하며 주먹밥을 입에 넣었다. 김에 쌓인 부분이 질기리라는 추측은 크나큰 오산! 김에 쌓인 밥 부분을 베어 물어도 질기다는 느낌이 전혀 없을뿐더러, 김의 감칠맛이 오히려 자칫 밋밋할 수 있는 주먹밥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약간 빛바랜 듯 살짝 올드한 느낌의 벽지. ‘40년 전통의 집, 전통의 맛’

..

  배가 채워지니 이제 주변도 둘러보게 된다. 약간 빛바랜 듯 살짝 올드한 느낌의 벽지와 한옥의 창호지를 연상케하는 창문. ‘40년 전통의 집, 전통의 맛’이라고 적힌 메뉴판이 테이블 당 하나씩 자리하고 있다. 메뉴판에 물냉면은 30년간 사랑받아온 손님 추천메뉴이며 주먹밥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가미의 전통메뉴라고 자랑하듯 적혀있다. 가게 안의 손님들 역시 가미와 추억을 함께 한 것 같은 얼굴이다. 그들은 메뉴판을 뒤적이지 않고도 익숙한 듯 메뉴를 입 밖으로 내고 음식을 기다린다.

  : 여기 기억 안 나나? 내가 하도 좋아해서 어렸을 때 너 데리고 왔었는데.
  : 완전 아기 때인데 기억 잘 안 나겠지.

  미처 기억이라는 테이프 속 녹화해두지 못했던 에디터의 과거에 이 가게가 있었다는 것은 미묘한 기분이다. 당사자인 나조차 기억 못하는 과거에 이 가게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부모님의 기억 속 가게라고 생각했던 곳이 나의 기억 속 가게일 수도 있는 느낌. 어쩐지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욱 정감 간다. 웬디가 네버랜드에서 살게 된다면 이런 기분일까. 상상 속 동화나라를 실제로 만나게 된 후 생기는 벅찬 마음과 같았다.

  냉면과 주먹밥을 맛있게 나눠먹고 문을 나섰다. “맛있게 드셨나요? 다음에 또 다시 방문해주세요!”와 같은 이야기는 당연 들리지 않는다. 지나치게 친절 배인 그 말들이 에디터에게 들리지 않으니 에디터는 가벼운 마음이 든다. 친절을 마주하고나서 드는 어색하고 무거운 기분에서 해방된 느낌이랄까.

 

가미에서의 추억을 가진 부모님과 함께 방문한 가미는 나에게 야릇한 감정을 선사했다. 익숙지 않은 마음으로 발을 들인 음식점이었지만 에디터는 묘한 설렘을 느꼈다. 낡은 음식점 어딘가, 엄마아빠가 서로에게 툴툴대며 냉면을 입에 넣던 그 공간에서 그 냉면 앞 주먹밥을 집어먹는 그 순간이 벅찼다.

 

가미를 찍고 있는 아버지를 찍고 있는 에디터. 각자의 추억에 푹 젖어버렸다.

..

  ‘가미(加味)’. 맛이 더해졌다는 의미. 무슨 맛을 더해준 것일까. 단맛? 짠맛? 구수한 맛? 모호해서 더 궁금했다. 가미의 문을 나서고 신촌 거리를 부모님과 걸으면서 그 가게 상호명이 단순히 ‘음식의 맛이 더해져서 더 맛있다’라는 간단한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하게 찾을 수 있는 음식 위에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부모님의 청춘에 대한 추억이 소복소복 쌓인다. 단순히 냉면의 감칠맛, 주먹밥의 고소하고 쫄깃쫄깃한 식감 뿐만 아니라 부모님이 수 년동안 함께 공유한 연애사가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제서야 가미(加味)는 음식에 감칠맛을 더했을 뿐만 아니라 음식의 맛에 추억과 이야깃거리를 더해주었다는 것을 다시 떠올린다.

  한 시인은 노래한다. 자신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자신에게 꽃이 되었다고.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그 시는 이렇게 끝맺는다. ‘가미(加味)’는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된다는 뜻이 아닐까. 이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무언가에 저만의 추억이 더해지면서 ‘별것 아니었던’ 무언가가 결국 ‘특별한’ 무언가 되는 과정. 이전에는 별 생각 없이 스쳐 지나갔을 ‘가미’에 그 곳에 얽힌 부모님의 연애사가 가미되면서 에디터에게도 ‘가미’는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주소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8길 2

  연락처 02-364-3948

  영업시간 매일 10:00 – 21:00

왕 잔치
AUTHOR PROFILE
왕 잔치

잔치의 시선으로 신촌의 장면과 사람, 장소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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