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TO ZANCHI! · 신촌을 사랑하고, 추억하고,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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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2019 · 11 · 06

123. 파가니니

Editor 챌라또

온전한 이해란 개소리다. 아 참, 다시. 좀 더 교양 있게 말하는 편이 좋겠다. 온전한 이해란 허구 혹은 허상임에 분명하다. 누군가를 완벽하게, 또 오롯이 이해한다는 것은 마치 시지푸스의 바위 혹은 프로메테우스의 간과도 같아 보인다. (누구나 어릴 적 만화 버전 그리스 로마 신화 한 번 쯤은 읽어 보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끝처럼 보이나 결코 도달할 수는 없으며, 매일같이 헛된 희망을 품게 하나 그 뒤에 오는 처절한 절망감은 어김없이 우리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곤 한다. 그렇기에 우습게도 단지 우리네 사이를 잇는 것은 감히, 그리고 간혹은 무책임하게 주고 받는 뜨내기 추측들 뿐이다. 시험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영어 속담이 시키는 대로 아무리 다른 사람의 신발에 나의 발을 끼워 넣으려고 끙끙대 보아도 신데렐라는 신데렐라고, 나는 나다. 나의 두 눈은 더도 덜도 말고 오로지 내 눈 높이에서만 존재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누군가를 ‘볼 수 있’는 한, 그를 온전히 그로서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What is it like to be a bat?’이라는 인지심리학계 문제작의 결론이 ‘우리가 박쥐가 되지 않는 한 (박쥐가 되면 어떤 느낌일지) 모른다’라는 생각보다 단순하고도 당황스럽지만 납득이 가는 어떠한 종류로 귀결된 이유도 실로 알 만하다. 도리어 완전한 이해를 위한 욕심은 처음 품은 마음과는 달리 우리를 때로는 폭력적인, 때로는 무척이나 슬프고 무력한 사람으로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또 속수무책으로 이해를 갈망하고, 좌절하고, 또 갈망한다. 

어린 아이에게는 엄마가 바로 그 첫 타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이해하고 싶으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이해하기 싫어해버리고 말았던. 온전한 이해가 개소리라는 것을 알기도 전, 엄마를 불완전하게나마 ‘이해’해보기에는 아이는 너무 어렸고 작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어느 날. 아이는 어느새 스물 셋이 되었고 그 중에서도 조금은 쌀쌀한 가을 날, 25년이 지난 후에도 골목 골목을 속속들이 알 만큼 익숙한 엄마의 마당에서 둘은 가미우동과 주먹밥을 먹고 예쁜 핀과 스티커 가게를 구경한 후,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그리고 어른이 된 아이는 모순적이게도 엄마는 모르는, 그러나 엄마로 잔뜩 뒤섞인 공간에 그녀를 초대한다. 온전한 이해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임에도 불구하고, 이해라는 것의 어렴풋한 형상을 만져볼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갖게 되는 곳. 와인, 음악, 온기, 엄마. 그리고 그 모든 것으로써의 파가니니다. 

 

그 모든 것으로 가는 마법의 시작

 

파가니니에는 파가니니가 없다. 대신, 다른 것이 있다. 이를 테면 와인이다. 문을 열자마자 감싸오는 온기와 함께 보이는 것은 천장에 박쥐처럼 매달린 여러 크기의 와인 잔들이다. 마치 투명하고 예쁜 종유석들 같기도 해, 건드려 소리를 내어보고 싶다는 창피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광경이다. 빼앗긴 시선을 되찾아 조금만 내려보면 고요하면서도 무언가 웅장한 느낌이 드는, 연륜이 가득한 바가 있다. 98년생 파가니니. 나보다 한 살 어리지만 이대의 숨겨진 조그마한 골목 6층에 조용히 존재하는 술집이라면 분명 사람의 나이와 비교해 그 연륜을 가늠하는 것은 불공평할 것이다. 특히, 엄마의 말마따나 엄마의 학창 시절과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달라진, 그리고 지금도 따라가기 벅찬 속도로 바뀌어 가는 풍경 속에서 스물 두 해 동안 엉덩이 무겁게 자리를 지킨 것만으로도 나보다는 훨씬 선배 취급을 받을 만하다. 대충 그런 종류의 생각을 하며 자리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다 보면, 구석에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놓인 와인 냉장고를 마주할 수 있다. 냉장고에서 나오는 불빛인지, 바로 위 천장에 달려 있는 노오란 전구에서 내려와 반사되어 나오는 불빛인지 잘은 모르겠으나 따뜻하고 노란 빛이 차곡히 놓인 와인 병들과 만나 오묘한 색을 이룬다. 실눈을 뜨고 보면 마치 반짝 반짝 전구를 달아 켜 놓은 트리같다고나 할까. 그렇게 한참을 구석 구석들이 내어주는 생각 속에서 실컷 떠다닌 후에야 물색해놓은 자리에 살포시 닻을 내린다. 레드 와인의 진하고 농염한 빨강을 닮은 소파에 안겨 paganini, since 1998 라고 적힌 메뉴판을 펼친다. 그리고 마주하는 첫 장. 파가니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첫인상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겠다. 

 

여기 한 병 테이크-아웃이요

 

행사라고 적혀 있어 첫 방문 때는 시기를 잘 맞추어 왔다고 좋아했지만 그 이후로 아무리 많이 가도 그 첫 장은 메뉴판에서 대체 빠질 생각을 안 한다. 사장님, 일년 내내 하는 행사가 어딨어요. 이상하게 웃음이 난다. 꽤나 맛있는,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호불호가 갈리지 않을 괜찮은 와인에 혁명적 안주(곧 만나볼 수 있겠지만 브리치즈 ½ 라는 이름은 이 안주의 진가의 반의 반도 담지 못한다)를 그 가격에 만날 수 있다니. 곧장 사랑하는 사람이 떠오르게 하는, 그래서 35,000원보다 백 배는 가치 있는 시간을 나누고 싶게 하는 그러한 구성임에 틀림없다고 또 한 번 생각한다. 

 

출격을 준비하는 박쥐들

 

나는 와인을 사랑한다. 가장 좋아하는 주종을 물어보면, (애초에 가까운 지인들은 묻지도 않을 것이다)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와인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와인을 사랑한다. 하루의 끝을 와인으로 마무리할 생각에 신나서 집으로 달려갈 만큼. 기쁜 일이 있을 때, 우울함이 찾아왔을 때, 그리고 지나치게 별 일이 없는 조용한 하루를 보냈을 때에도 괜시리 진하고 맛있는 와인이 한 잔 (물론 한 잔으로는 안 끝난다.) 생각날 정도로. 좋은 사람을 만났을 때, 혼자 생각에 잠기고 싶을 때, 또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나에게 와인은 단연코 확실한 비장의 무기다. 그리고 돌아보면 그 때 쯤부터인 듯하다. 엄마가 처음으로 그렇게 거대해보이지 않았던 것이. 아이가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고 그 중에서도 와인의 참 맛을 알아버린 그 때 즈음. 엄마와 함께 와인을 마시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되어버린 그 때 즈음. 나에게 와인은 엄마와 동시에 왔다. 내가 모르던 엄마와 함께. 불완전하고, 두렵고, 약한. 그러나 그렇기에 예쁘고, 찬란하고, 강한. 그래서인지 와인을 마시는 것은 나에게는 엄마 생각을 한다는 것과 같다. 더 정확히는, 나의 와인 마시기의 종점이 어느 샌가 엄마가 되어버린 것이다. 너무나 강하고 완벽해보여 그 속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보호와 독재, 그 사이 어디쯤에 서 있는 엄마는 참 컸다. 그 벽이 싫어 숱하게 돌을 던지고 개구멍을 찾던 어린 아이는 죽어도 몰랐다. 그녀가 어떤 마음을 준 것인지. 자신의 약함과 두려움을 털어놓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큰 슬픔인지, 아쉬움인지. 스물 셋 가을 쯤에는 이화여대 캠퍼스를 활보하며 경양식 돈가스를 먹고, (“밥으로 하시겠어요, 빵으로 하시겠어요” 에는 무조건 빵이었다고 하며 웃는 그녀) 뒷 골목에서 쇼핑을 하고, 미팅을 나가 모든 남자의 시선을 빼앗던 그녀가 나의, 나의 동생의, 그리고 나의 동생의 동생의 엄마로 살게 되기까지. 얼마나 큰 다짐들과 담금질과, 상처와 굳은 살이 있었을지 나는 아마 평생 알지 못할 것이다. 완전한 이해란 불가능하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나는 그녀와 갔다. 파가니니를. 우리가 사랑하는 와인을 마시러. 그리고 내가 와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수 백배, 아니 수 천배는 더 사랑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누가 행복을 병에 담을 생각을 했을까,

 

어김없이 Carmen Tolten + 브리치즈 ½ 이다. 엄마를 파가니니에 초대한 것도 이 조합의 놀라움을 직접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사장님이 선보이는 브리치즈 안주 조합에 반해 집에서 엄마에게 만들어 준 적도 있긴 하다만, 요즘 말로 그 ‘갬성’이 그대로 재현되진 않더라. 그래서 항상 함께 가자고 졸랐었고, 감사하게도 이 글을 빌미로 엄마와 파가니니와의 만남을 앞당길 수 있었다. Carmen Tolten을 고르면 사장님은 특유의 조용하고 느긋하지만 중후한 목소리로 “칠레로 드릴까요, 미국으로 드릴까요,” 라고 물어보시는데 (밥과 빵의 데자뷰?) 우리는 칠레 산을 선택했다. 개인적으로 둘다 미국 와인의 빅 팬은 아니기에 더욱 고민 없이 선택했던 것 같다. 바로 오픈해주신 와인은 가격 대비 훌륭한 드라이함과 타닌감을 갖춘 기분 좋은 과실향이 나는, 드라이 와인 러버에게는 아마도 무조건 호에 가까울 그런 맛을 가졌다. 와인의 맛과 향을 좋아하는 우리는 브리치즈가 나오기도 전에 ⅓ 병 정도를 비웠고, 파가니니의 따뜻함과 다채로운 자리 구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온도를 조금은 낮게 유지하는 대부분의 술집과 달리 파가니니가 특별하면서도 동시에 엄마를 닮은 이유는 바로 이 온기 때문이다. 문을 여는 순간 훅 감겨오는 따스함과 그와 참 잘 어울리는 향. 향마저 온도가 있다고 착각하게 될 만큼 파가니니는 따뜻하다. 가게의 낮은 조도와 노란 빛의 조명들과 완벽하게 어울리는 온도. 사랑의 온도가 있다면 딱 이 정도 아닐까. 

 

사랑은 아마 노란색일 거야, 

 

그런 온기에 기대고 포개어져 우리는 한참 나른한 대화를 했고, 느긋한 사장님을 닮은 시간 쯤에 고대하던 브리치즈가 등장하셨다. 오븐에 꽤 오래 구워 겉은 바작하고 단단하지만 속은 촉촉하고 몽글한 브리치즈의 반을 잘라 메이플 시럽을 둘러주고, 그 위에 크랜베리를 잔뜩 올려 낭낭한 크래커들과 함께 큰 접시에 담아주면 끝. 굉장히 간단하다. 그렇지만 맛은 절대 간단하지 않다. 짭짤 고소한 브리 치즈 특유의 맛과 메이플 시럽은 완벽한 단짠의 조합을 자랑하고, 적당히 새콤하고 달콤한 와인을 닮은 크랜베리를 올려 크래커와 함께 먹으면 그야말로 와인 한 병을 더 주문하고 싶게 만드는 맛이 펼쳐진다. 취향이 참 닮은 우리기에 이미 좋아할 것을 알고 있었으나 높은 점수로 그녀의 합격선을 넘긴 브리치즈를 맛있게 먹는 엄마를 보니 괜히 뿌듯해 몰래 웃음지은 것은 비밀로 해 두자. 겉은 단단하나 속은 말랑한 브리를 보고 엄마를 괜히 한 번 더 바라본 것도 살짝쿵 비밀에 부쳐본다.

 

브리를 무시하면 혼나브리~

 

파가니니에는 당연히 음악이 있다. 문을 열면 보이는 박쥐같은 와인잔들과 휘감는 온기 외에 파가니니를 구성하는 가장 큰 부분을 꼽으라면 그 것은 음악일 것이다. 노란 조명, 낮은 조도와 완벽하게 어울리는 따스한 온기와 온도를 가진 향을 배가시켜주는 역할은 음악이 담당한다. 와인과 어울리는 딥하지만 친숙한 재즈 선율을 따라 고개를 돌리면 파가니니의 시그니처, 주크박스가 있다. 주크박스라 표현하긴 했으나 실제로 보면 몸집이 크고, 다양한 음향 기기들이 쌓아올려져 있어 박물관에서나 보던 슈퍼컴퓨터가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다. CD 플레이어부터 사운드 이펙트를 정교하게 조절할 수 있는 디제잉 장비까지. 파가니니의 음악을 책임지는 이 커다란 주크박스는 매일 저녁부터 새벽까지 사장님과 함께 한다. 때때로 그 주크박스 앞에 서서 음악을 바꾸거나 조절하시는 사장님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오래된 친구 혹은 동업자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니 말이다. 든든한 버팀목. 파가니니에게 주크박스란 그런 존재일 것이라 감히 추측해본다. 주크박스 이외에도 파가니니 곳곳에는 음악을 상징하는 것들이 있다. 구석마다는 크고 네모난, 누가 봐도 자기 주장 강한 스피커들이 달려 있으며, 크리스마스 트리 같은 와인셀러 옆에는 책장을 빼곡히 채운 LP판들이 있다. LP와 와인이라니, 왜 파가니니에만 가면 8월에도 크리스마스 느낌이 나는지 이제서야 알 것 같다. 

 

아이언맨 같은 사장님의 동업자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 파가니니에는 파가니니가 없다. 한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와인을 마시다가 엄마는 문득 그랬다. “파가니닌데 파가니니는 안 나오네.” 맞다. 사실 둘은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다. 마치 같은 이름을 가진, 하지만 너무나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처럼. 악마의 천재성이라는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 19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의 곡들은 편안한 분위기의 식당 혹은 바에서 틀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고 화려하며 가끔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괴이하다. 일반인보다 훨씬 길고 큰 손과 손가락, 그리고 손가락 마디의 엄청난 유연함 덕에, 바이올리니스트임과 동시에 작곡가였던 그는 자신의 손만이 연주할 수 있는 곡을 썼다. 감히 누구도 함부로 이해할 수 없는 선율을 쓰고 연주했으며, 그에 걸맞는 화려하고도 방탕한 삶을 살았던 그. 만약 평범의 반대말이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다면 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더욱 그를 이해하기 힘들고 공감하기 어렵다고 여기는 것일 테다. 파가니니의 음악이 나오지 않는 파가니니에서 엄마의 말을 듣고 문득 생각했다. 그렇게 완벽하고 화려하며 천재적인 동시에 악마같다고 평가받았던 파가니니의 삶은 어떠했을까. 남들이 ‘이해’한 파가니니 말고, 그가 바라보고 느낀 자신은 어떤 모양과 색이었을까. 파가니니에게도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려 노력해주는 사람이 있었을까. 따뜻한 온기 속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아, 이 곳은 파가니니까지도 이해해보고 싶게 만드는구나. 절대 완성될 수 없는 것이 이해지만, 파가니니는 불완전한 이해라도 도전해보고 싶게 만들고, 그 과정이 순탄치 않더라도 자책하거나 비난하지 않을 수 있는 온기와 용기를 선물하는 공간이다. 와인 혹은 칵테일을 한 잔 하며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게 하는 힘을 가진 공간.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도, 또는 증오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 공간에서 나는 파가니니와 엄마를 떠올렸고, 신기하게도 우리 집에서 들리던 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이해의 시작이 될 공간

 

우리 집에도 음악이 있다. 막내 동생이 바이올린을 전공하기 때문이다. 클래식 애호가인 엄마와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막내. 모든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애증을 기반으로 쌓아 올려지긴 하나, 이 둘은 특히 그랬다. 음악이라는 어려운 길을 걸으며 (특히 한국에서 하는 클래식은 더더욱 그렇다.) 항상 갈등하는 둘을 보며 어린 나는 곧잘 엄마가 이해되지 않곤 했다.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다그친다고 생각했고, 가끔 막내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파가니니의 카프리스처럼 모든 것이 너무 빠르고 크다고 생각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 땐 뭐가 그리 빠르고 커 보였는지 모르겠다. 사실은 그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이었을 텐데 말이다. 각자의 존재 때문에 가끔은 서로에게 날을 세우고 그것이 생채기를 남기지만 우리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 이해란 오히려 그런 것에서부터 출발하는지도 모른다. 한 발짝 떨어져서 생각할 수 있는 힘.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 수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 온전한 이해는 개소리라는 걸 받아들이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 발 뒤로 물러날 용기를 갖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엄마와 마시는 와인은 처음으로 내가 엄마와 혈연관계로 엮인 딸이 아닌 그저 다른 성인으로서 그녀를 바라볼 수 있게 했고 이는 한 발 뒤로 물러날 용기라는 마법같은 덤을 선물한다. 동생 두 명이 있는 첫 째 딸과 6남매의 막내인 엄마. 가끔은 내가 더 엄마 같다고 말하며 웃는 그녀를 보며 다짐한다. 절대 엄마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겠다고. 또, 어떠한 프레임도 역할도 강요하지 않겠다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려고 항상 노력하겠다고. 

 

더도 덜도 말고 딱 이 정도의 빛으로 엄마를 보기로 했다

 

잔에는 오늘의 마지막 와인이 따라지고, 둘은 함께 웃는다. 남은 메이플 시럽을 포크로 찍어 먹으며 밖에 비가 많이 오지는 않는지 걱정도 해 본다. 몇 번이고 와 본 파가니니지만 이제서야 정말로 파가니니에 온 것만 같다. 벌써 밤이 되면 쌀쌀한 가을이 왔고 아마 아주 추울 겨울이 지나 봄이 온다면, 그 때는 엄마의 학교가 내려다 보이는 창가에 나란히 앉아 봐야지, 하고 혼자 생각했던 것도 같다. 크래커를 좋아하는 엄마랑 치즈를 좋아하는 나, 이렇게 둘이. 왜인지 모를 아쉬운 마음에 두리번거려보는 파가니니는 벌써 사람들로 가득하다. 타인들이 만들어 내는 기분 좋은 온기와 적당한 말소리가 음악과 어우러져 진득한 포근함을 안긴다. 타인, 따지고 보면 엄마도 타인이다. 내가 아닌 사람, 타인. 가장 이해하고 싶었지만 그럴 방법을 아직 몰라 상처를 준 건 도리어 내 쪽이었을 지도 모른다. 지금은 내 가장 친한 친구이자 최고의 와인메이트, 한편으로는 귀엽고 한편으로는 미치게 짠한, 그런 엄마와 손을 잡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탄다. 마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나오는 허름한 터널을 지나는 느낌. 비현실적인 동화 속에 있다가 일상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마법 같은 여운을 남기는 그런 공간, 그 곳에서는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고 뭐든 괜찮을 것이라는 착각 겸 용기를 주는 공간, 그래서 어렴풋이 이해의 초상을 그려볼 수 있는 공간. 아니나다를까 비가 왔다. 그날 새로 염색한 딸 머리가 행여 상할까 혼자 우산을 사러 뛰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한다. 그 누구의 엄마도 아닌 우리 엄마만을 위한 글을 써야겠다고. 평생을 다해 그녀를 이해해 보겠다고. 71년에 태어난 박미영이라는 사람을.

 


파가니니(Paganini)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63 

02-392-2908

매일 18:00 – 02:00

챌라또
AUTHOR PROFILE
챌라또

잔치의 시선으로 신촌의 장면과 사람, 장소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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