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 시간이 머무는 홍차가게: 여유의 향
결말을 알고 있는 영화는 금세 싫증이 난다. 심지어 반전도 없고 지루한 영화라면 더욱 그렇다. 스물두 살이 된 지금, 나는 내 인생이 딱 그런 영화 같다고 생각한다. 10개 이상 맞춰놓은 알람, 지나가는 버스와 막차를 향한 뜀박질, 생존을 위해 마시는 커피, 졸음을 참으며 하는 공부와 일. 꽤 오랜 시간 동안 내 일상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쯤 되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나는 똑같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숨이 턱턱 막힌다. 아, 정말 살기 싫다.
이럴 때면 긴급 처방이 필요하다. 내 삶에 여유를 불어넣는 것. 여유가 인위적이면 어떠한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주인공은 모두 돈으로 여유를 사던걸. 애써 합리화를 하며 연희동의 한 찻집 문 앞에 선다. ‘시간이 머무는 홍차가게’라는 간판이 나를 반긴다. 이곳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받아들여주는 유일한 공간이다. 내게 행운과 다름없는 이 찻집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오늘은 꼭 사장님께 이 찻집에 대해서 여쭤봐야지.’ 다짐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연희동에서 작은 티 룸인 시간이 머무는 홍차가게를 운영하는 고은화 대표입니다. 남편과 함께 매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커피를 주메뉴로 판매하는 카페가 많은데, 홍차가게를 차리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차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끼셨나요?
저희 부부는 각자 회사에 다닐 때부터 집에서 홍차를 즐겨 마셨어요. 회사원이었던 남편에게 티타임은 마법의 시간이었어요. 그 시간만큼은 바쁜 일상을 잠시 잊고, 맛있는 차와 함께 쉴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홍차를 준비하고, 티푸드 만드는 것을 좋아해요. 오래전부터 저는 작은 티룸을 갖고 싶어 했고 남편은 그 꿈을 응원해주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함께 홍차가게를 차리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평범한 삶을 살던 저희 부부는 35살에 기대와 설렘 51%, 걱정과 두려움 49%를 안고, 둘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남편의 진심 어린 소리에 새로운 인생의 길을 걸어보기로 했어요. 애프터눈티세트가 있고, 방금 구운 따뜻한 스콘과 향기로운 홍차가 가득한 티 룸에서 사람들이 잘 우린 홍차를 즐기며 특별하고 행복한 시간을 경험하도록 노력하는 일이에요.
확실히 이 가게만 오면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 같아요. 이러한 점이 가게 이름에도 그대로 담겨있는데, 가게 이름을 정하게 된 과정이 궁금해요!
가게 이름은 생각날 때마다 적어놓은 40개 정도의 이름 중에서 하나를 골랐어요. 조금 길더라도 저희가 원하는 느낌을 담고 싶었어요. ‘시간이 머무는 홍차가게’는 이곳에 있는 동안에 충분한 여유를 누리고, 행복 에너지를 가득 받는 좋은 시간만 머물기를 바라는 마음에 지은 이름이에요. 홍차와 함께 행복한 시간이 되시기를 희망해요.

여유에 정성을 들이다
손님들이 찻잔을 선택하면, 그 찻잔에 차를 내어 주시는 특별한 시스템이 있잖아요. 항상 제가 직접 선택한 찻잔 덕분에 더 특별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요. 이 시스템은 어떻게 생각하시게 되었나요?
집에서 차를 마실 때 ‘오늘 선택한 차는 어떤 잔에 마시면 더 좋을까?’ 생각하며 찻잔을 고르는 과정이 정말 즐거웠어요. 그래서 집에 친구들을 초대해 티타임을 할 때도 그릇장을 열어주고 원하는 찻잔을 직접 선택하게 했어요. 친구들도 이런 과정을 정말 좋아하더라고요. 나중에 우리가 가게를 하게 되면 찻잔을 손님에게 직접 선택하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가게를 운영하는 데에는 효율적이지 않지만 손님들이 마시고 싶은 잔에 홍차를 마시면 차를 마시는 시간이 더 풍요로워지고 행복한 것 같아요.
차에 대해서도 궁금해요. 저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후에야 차를 선택하고는 하거든요. 손님들이 선호하는 향에 따라 추천해주시는 차가 다를 것 같은데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사장님의 인생 차는 무엇인가요?
달콤한 홍차는 캐러멜과 초콜릿 가향의 ‘웨딩 임페리얼’
상큼한 홍차는 베르가못 향에 오렌지와 레몬 향이 더해진 ‘레이디 그레이’
우아한 홍차는 은은한 장미 향이 더해진 ‘잉글리쉬 로즈’
향이 가미된 홍차는 이렇게 3가지 추천해드리고 싶어요. 처음 홍차를 접하시는 분들을 위해 메뉴판에 간략한 차에 대한 설명이 되어있지만, 설명만으로는 그 향을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에 홍차의 향을 직접 맡아 볼 수 있는 시향 키트를 준비해 두었어요. 각자의 취향에 맞는 홍차를 쉽게 만나실 수 있어요.
제가 특별히 사랑하는 차는 ‘마르코 폴로’라는 프랑스 홍차예요. 다른 사람에게 권해서 실패해본 적이 없어요. 다들 좋아하세요. 프랑스 홍차이고, ‘마리아쥬 프레르’라는 브랜드에서 나오는 차인데 베리 계열의 달콤한 과일 향과 티벳의 꽃 향으로 설명되고 블렌딩 정보는 시크릿이래요. 그래서 더욱 끌리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저도 ‘마르코 폴로’ 정말 좋아해요. 사장님과 취향이 같아서 괜히 기쁘네요.(웃음) 저는 사실 첫 방문에서 계산할 때 가장 놀랐어요. 손님들이 낸 금액에서 100원을 빼 직접 기부함을 골라 기부하게 해주시는데, 어떻게 그런 방식을 가게에 도입하게 되었나요?
1잔 주문하시면 100원을 후원할 수 있는 ‘1CUP 1COIN’ 행사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어요. 손님들은 세 군데의 기부함 중에 직접 원하는 단체를 선택하실 수 있어요. 스리랑카 차 농장 노동자의 빈민 가정 아동을 후원하는 기부함, 미혼모를 후원하는 기부함, 그리고 유기견을 후원하는 기부함으로 구성돼 있어요. 매장을 나가실 때 직접 선택하신 단체에 동전을 기부함으로써 어려운 이웃들을 돌아볼 뿐 아니라 선한 영향력을 경험하고 보다 큰 행복의 에너지가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손님들이 지갑에 남은 잔돈을 탈탈 털어서 넣어주실 때도 있답니다.

가게의 작은 사장님, 홍차
‘시간이 머무는 홍차가게’의 작은 사장님이 그렇게 인기가 많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우리 ‘홍차’를 소개해주세요.
홍차는 원래 유기견이었어요. 우리 가게가 2014년 2월 22일에 오픈했는데, 그해 3월 비가 많이 오는 날 동네 천사 누나(아, 홍차 시점에서 누나예요)가 구조한 강아지인데 우리 부부와 인연이 되어 함께 살게 되었어요. ‘홍차’는 가게 내부에 얌전히 있어요. 화장실 앞을 막고 누워있거나 창문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어요. 아주 어릴 적부터 가게에 함께 출퇴근해서인지 사람에게 순한 멍멍이랍니다. 가끔 큰 소리로 이야기하며 들어오시는 손님들께 놀라서 큰소리로 짖어서 민망하지만 들어올 때 잠깐뿐이니 예쁘게 봐주세요. 우리가 이곳에서 홍차 가게를 하게 된 건 많은 이유와 인연이 있겠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는 멍멍이 ‘홍차’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해요.
홍차에게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사장님을 만나게 돼서 정말 다행이에요. 가게를 운영하시는 동안 사장으로서 가장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가끔 손님이 쪽지를 남기세요. 짧은 손글씨에 저절로 웃음이 지어지더라고요. 방명록도 있어서 남겨주신 글을 읽을 때 너무 행복해요. 우리가 만든 유일무이한 특별한 공간에서 행복을 느끼는 손님들이 점점 많아져서 뿌듯하고 기뻐요. 그게 저희를 지금까지 움직이게 한 힘이라고 생각해요.
올해로 가게 오픈한 지 7년 차인데 요즘 들어 특히 오래 이 자리를 지켜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손님들이 계세요. 생각날 때마다 갈 수 있는 가게가 있다는 건 행복한 거라고 말해주시는 손님들도 계세요. 손님에게 감동했던 여러 순간이 있는데 지금 문득 생각나는 건 작년 이맘때쯤 있었던 일이에요. 가게 초창기에 자주 오셨지만 한 3년 가까이 안 보이셨던 손님이 오랜만에 찾아 오셨어요. 그사이 큰 수술을 2번이나 하셨다고 하시며, 신촌에 왔다가 저희 가게가 생각나고 그리워서 왔다고 하셨어요. 그 말에 주책맞게 눈이 묵직해졌고 많은 감정이 교차하더라고요. 그분이 다시 건강해지시기를 기도했어요. 또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주심을, 이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음을, 그래서 다시 만날 수 있음을 감사드렸어요.
사장님에게 연희동은 어떤 곳인가요? 다른 지역도 많은데 연희동을 선택하신 이유를 알고 싶어요.
연희동은 주말에 데이트하러 몇 번 와본 게 전부인 잘 모르던 조용한 동네예요. 조용하다는 이유로 연희동을 알아봤어요. 솔직히 자금이 넉넉했다면 핫한 홍대 일대나 서촌 일대, 한남동 같은 곳에 욕심을 냈겠지만, 우리의 형편대로 무리하게 욕심내지 않고 둘이서 매일 함께 즐겁게 홍차를 나눌 수 있는 작은 가게를 찾았어요. 원래 계획보다 더 작은 가게이긴 하지만 마음에 들었어요. 무모할 수도 있으나 상권이나 유동인구 이런 거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 가게를 선택했어요. 처음에 이 가게를 보고 마음에 들어 다른 가게는 눈에 안 들어오더라고요. 남편도 남녀 사이에도 인연이 있듯 집이나 가게도 그렇다며 여기가 우리 인연 같다고 했어요.
우리한테 연희동은 제2의 고향 같은 곳이에요. 한적하고 여유로워서 ‘서울 같지 않은 서울’이라고 생각해요. 홍차는 여유와 쉼을 주는 음료인데, 그런 의미에서 연희동이 홍차 가게에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그래서인지 연희동에는 차를 주제로 한 가게도 많답니다.

사장님이 수제로 만드시는 티푸드와 홍차
저는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가 좋아서 이 가게를 더 자주 방문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저와 같은 손님들도, 다른 이유로 방문하시는 손님들도 있을 것 같은데 사장님은 훗날 손님들에게 어떤 가게로 기억되고 싶나요?
마음에 드는 찻잔에 향기로운 홍차가 준비되고 맛있는 티푸드와 클래식한 음악이 어우러진 공간. 홍차 한잔이 주는 행복과 여유를 알게 되고 머무는 시간 동안 동화 같은 행복을 경험하는 공간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신초너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자유롭게 해주세요!
시간이 머무는 홍차가게는 신촌 일대에서 홍차를 가장 홍차답게 접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홍차라는 새로운 문화를 접해보고 즐기는 건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답니다. 향을 맡아보고, 찻잔을 고르고, 차를 마시는 모든 순간이 행복한 곳이에요. 홍차를 즐기러 오세요!

시간이 머무는 마법같은 공간
이곳에서는 잠시 시간이 멈춘다. 마치 조금 쉬었다가 가라고 나를 기다려주는 듯하다. 늘 조급했던 평소와 달리 정성을 들여 차와 찻잔을 고른다. 그리고 기다린다. 기다리는 동안 차가 내게 말을 건다. 너의 일상에도 이런 특별함이 있단다. 머무는 시간 동안 동화 같은 행복을 경험하는 공간. 사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지금, 이 공간 안에서 행복하다.
차를 한 모금 마신다. 오늘 내 여유는 향긋하고 따뜻하다. 오로지 차와 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 사느라 고생이 많은 나를 위로하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감사를 느낀다. 마치 이 세상 모든 것이 내게 이 시간을 선물해주기 위해 움직인 것만 같다. 그동안 아주 바쁜 생활을 한 덕분에 이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겠지. 차를 한 잔 마셨는데 티 팟을 들어보니 반 이상 남아있다. 내 미래에도 아직 이 정도의 여유가 숨겨져 있다고 믿고 싶다.
이제, 다시 일어나서 바빠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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