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컬러드빈
학창 시절 한 번쯤 접해 보았을 마블링 기법의 물감들처럼, 어지럽게 뒤섞여버린 색채의 일상은 화려하지만 때때로 어지럽다. 불현듯 너무 많은 것들로 가득 차다 못해 터져버릴 것만 같은 일상을 느낄 때가 있다. 취업, 공부, 연애, 학업… 남들이 다 하는 것, 내가 하지 못한 것, 남들도 하지 못한 것 등등. 이미 가지고 있지만 더 가지고 싶고, 가지지 못했기에 가지고 싶은 것들, 그런 다양한 것들로 가득한 일상을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이 모든 것들에 진절머리가 나 멀어지고 싶은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어느새 몰래 피고 져버린 벚꽃
신촌은 참 다양한 색채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이 공존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항상 오가는 도회지의 전형이 아닐까 싶다. 항상 생기 넘치는 이곳은 매번 새로운 감상을 주고 활력을 주기도 하지만, 때때로 너무 화려한 색채에 질리게 만들기도 한다. 명확한 목적을 가진 듯 신촌 거리를 가로질러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한철 일찍 피어버린 벚꽃마저 나만 두고 앞서 가는 느낌을 받을 때 이 모든 것들로부터 도피할 공간이 필요하다.

연희동 골목의 하얀 오각형을 찾아보세요
흔히 ‘신촌’이라 했을 때 떠올리는 곳으로부터 조금은 떨어진, 연희동의 골목 조금 안쪽. 전체적인 색감이 흰색과 아이보리색의 사이 어디쯤인 길쭉한 오각형의 작은 공간이 있다. 위치 탓일까, 나만 아는 명소 같은 느낌도 든다.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있고, 예쁜 모양의 디저트와 너무 많아서 때때로 고르기 어려운 다양한 음료가 존재하는, 요즘 유행하는 소위 ‘인스타 감성’과는 조금 다른 곳. 그런 꽉 채운 다채로움과는 달리 단조로울 만큼 꼭 필요한 것 몇 가지만이 존재하는 곳이다.

자주 찾아오던 길냥이를 위해 둔 밥그릇
그렇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주 오지 않는 녀석 탓(?)에
가끔 놀러오는 강아지들의 물그릇이 되어 버렸다
1층 입구쪽이 적갈색 벽돌로 되어 있는 이곳의 문 앞에는 테이블 몇 개와 작은 입간판, 강아지 혹은 고양이들이 밥을 먹을 수 있는 그릇이 놓여 있다. 자주 찾아오던 단골 고양이를 위해 둔 밥그릇이지만 요즘은 잘 찾아오지 않아, 손님들과 함께 이곳을 찾는 강아지들의 물그릇으로 쓰인다고 한다. 사장님의 말씀에 따르면 녀석은 요즘 다른 곳에서 배를 채우는 것 같다고. 컬러드빈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전(前)단골 고양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밥그릇과 입간판에서 고개를 들어 가게를 바라보면 건물 1층도, 2층의 창도 전체적으로 통유리로 되어 있어 어쩐지 조금은 더 마음 편히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선택지가 많은 듯 많지 않은 메뉴들
매번 조금씩 바뀌는 메뉴판은 ‘코시국’에 걸맞은 문구가 쓰여 있다
사실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커피를 꽤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컬러드빈의 메뉴는 단 9개. 그 중 커피와 관련이 없는 메뉴는 초콜릿과 레몬 아이스티 단 둘뿐이다. 독특하게도 라떼와 플랫 화이트 둘 모두를 팔고, 에디터는 그 차이를 잘 모르겠지만 ‘커알못’이 마시기에도 우유와 커피의 조화가 적절한 플랫 화이트가 참 맛있었다. 호주의 대표 음료인 플랫 화이트가 한국에 막 알려져 아직 흔치 않았던 시절이 있다. 당시 방문했던 다른 카페의 사장님께서 제대로 된 플랫 화이트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고난이도의 기술과 좋은 원두에 대해 열변을 토하셨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곳의 사장님은 꽤나 대단한 바리스타이신 게 틀림없다. 직접 여행을 가기 힘든 요즘, 커피로 유명한 호주 멜버른의 카페 거리를 찾은 것 같은 기분을 대신 느낄 수 있다.
핸드드립을 제외한 커피를 선택하면 원두를 고를 수 있는데, 산미가 있는 베이지(beige)와 진하게 로스팅된 브릭(brick) 두 가지가 존재한다. 블루마운틴이니, 에티오피아니, 예가체프니 하는 어려운 단어들이 아닌, 직관적으로 ‘산미 있는 것’과 ‘묵직한 것’ 둘 중에 선택할 수 있어 우유부단한 에디터도 선택하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핸드드립을 선택한다면 원두 종류가 많아져 다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섹소폰을 부는 귀여운 해바라기 인형이 원두 판매대를 지키고 있다
때때로 시즌 메뉴가 들어오니 인스타그램 계정을 체크해보자
가게에서 맛본 커피의 원두와 드립백도 판매하고 있는데, 이곳의 커피가 마음에 들었다면 사갈 수 있다. 뒤늦게 집에 가서 그 커피 맛이 아른거리더라도 걱정이 없다. 사장님께서 운영하는 사이트에 들어가면 원두를 주문할 수 있다! 덧붙여, 환경을 보호하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도록 테이크아웃할 때 할인을 받는 대신 머그컵을 받고 그곳에 음료를 담아갈 수 있다.

다소 험준해 보이는 계단을 올라가면 햇빛으로 가득찬 2층 공간이 나타난다
메뉴를 모두 주문한 후, 카페 내부에서 유독 진한 색채를 가진 계단을 (다소 힘겹게) 올라가면 2층이 나타난다. (다행히 음료는 사장님께서 직접 2층으로 가져다 주신다.) 밖에서 본 건물 크기와 마찬가지로 2층의 공간도 썩 넓지는 않다. 그렇지만 모든 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햇빛이 내부를 밝게 비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지는 햇빛을 느낄 수 있다는 점도 이곳의 매력 중 하나라 하겠다. 옅은 색의 원목으로 된 키 높은 테이블 두어개와 소파 자리 둘, 베이지색 방 안을 가득 채우는 햇빛, 한쪽 창으로 보이는 연희동 풍경과 반대쪽 창으로 보이는 작은 마당, 그리고 커피 향. 요란한 장식도, 아기자기한 디저트도, 포토존도 없지만 <커피, 햇빛, 뉴트럴톤> 세 가지가 존재한다. 이 공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 두근거리는 설렘보다는, 햇볕 가득한 베이지톤의 공간에 나 홀로 존재하는 듯한 다소 정체된 분위기에서 느낄 수 있는 아늑함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흰색 폼폰 국화와 그 옆에 놓인 오늘의 픽 ‘브릭 원두의 아이스 롱블랙’
(참고로 흰색 폼폰 국화 꽃말은 성실과 진실이라고 한다.
성실이라는 꽃말에 에디터는 2천원 비싸졌다)
날이 좋을 때면 창을 열어두시는데, 일찍 피고 벌써 져버린 벚꽃나무 한 그루와 선선한 봄바람이 밀려들어 온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그러나 따스한 공간. 원목 탁자에 노트북을 펴두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면, 마치 나만의 공간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과 함께 복잡한 일상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외롭지 않은 고독감, 혼자만의 시간과 사유 따위의 조금은 고전적인 나름의 ‘감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계단 쪽을 꽉 채운 커다란 창을 통해 햇빛과 바람이 들어온다
창을 통해 보이는, 이미 벚꽃이 다녀간 벚꽃나무
컬러드빈은 언뜻 보기에는 단조로워 보일 수 있지만 매 시간마다 조금은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오전에서 낮에는 조금 강렬한 햇빛에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할 수 있는 활력을 얻고, 해가 다소 기울어진 오후면 주홍빛 색채의 햇빛에 아늑함을 느낄 수 있고, 해가 질 무렵이면 어둑해지는 주위와 대비되게 카페 옆의 마당과 카페 건물 전체에 빛이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끔 아무런 생각도 하기 싫을 때 테이블에 앉아, 가만히 창 밖을 보며 해가 기울어가는 과정을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매 시간마다 다른 매력을 가진, 어떤 색으로도 물들 수 있는 하얀색 같은 카페. 복잡한 것들로부터 멀어져 커피향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채우고 싶을 때면 하루쯤 시간을 내어 방문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 순간, 그 공간에서의 시간은 오롯이 당신만의 것일테니.

플랫 화이트를 머그컵에 테이크아웃했던 어느 날 밤

컬러드빈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11가길 8-8
월, 수, 목, 금 09:00 ~ 20:00
토, 일 10:00 ~ 21:00
(화요일 휴무)
http://instagram.com/coloured_bean
(원두 판매처: https://m.smartstore.naver.com/colouredbean/category/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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