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연세로, 나의 신촌
어느샌가 처음이 뚝 끊긴 기분이 들어요.
분명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어제들이 이어져 있고, 그 잇달림 끝엔 시작이 있을 텐데요. 그것들은 점차 희미해지고 일상은 둥실, 떠올라서는 모든 이어짐에서 떨어져 나와 존재하는 듯이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그 중심엔 머릿속으로 가장 적합한 계획을 짜 맞추지만, 별로 지킬 생각이 없어 우그러뜨리고야 마는 제 모습이 있습니다. 폰트 크기 하나만 안 맞아도 신경 거슬려 하는 까탈스러움과 결국 일정의 등쌀에 밀려 거의 모든 걸 국수 먹듯이 후루룩 해치우는 정신없음이 공존하는 아주 모순된 인간상이요.

5월의 연세로
할 일은 많고, 정신은 없는데 그 와중에 잘하고 싶어서 급하게 졸작을 내보이긴 싫은 자의 선택은 잠과 걷는 데 드는 시간을 줄이는 것뿐입니다. 누군가 잠을 잘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잠 대신 퀄리티를 포기하라는 명언을 제게 남겨줬는데, 저는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새벽의 고요함을 바쳐서 겨우 밀린 것들을 완성해내고 오늘도 빠르게 연세로를 걷습니다. 신촌역 2번 출구 계단을 오르고 학교 정문 앞 횡단보도까지 가는 데 5분. 처음엔 더 오래 걸렸었는데, 이젠 라면 하나 끓일 시간에 연세로 전체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네요. 연세로를 누비던 그 모든 걸음을 이미지로 남긴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아주 촘촘히 겹쳐져서 미세하게 흐르다가 변하는 시간의 파편들이 길쭉한 연세로를 쭉 덮은 모습일 거라고 상상해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걸음만큼의 순간들이 담겨있겠죠. 설레기도, 두렵기도, 지치기도 하던 수많은 순간들. 오늘은 이걸 하고, 저걸 하고, 앞으로는 뭘 해야 하는지 따위의 생각들과, 하고 싶거나 해야만 하는 것들을 적어놓은 종잇조각들도 같이 흩뿌려져 있을 겁니다.
그 속에서 길을 잃은 걸까요. 여러 가지 생각들은 떠돌 뿐 좀처럼 제자리를 찾지 못합니다. 자꾸 다른 곳에서 답을 찾으려 하지만 있을 리가 없습니다. 뭐든 짜임새를 머릿속에 그려놔야 성이 풀리는 사람에겐 그리 반갑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맘이 한결 편하기도 합니다. 그냥 될 대로 되라 싶기도 하고… 밖에서 답을 찾을 수 없음을 깨닫는 건 물론 두렵고 막막한 일이지만, 동시에 어디에도 비할 데 없는 자유와 해방감을 주기도 하잖아요. 정해놓은 것이 없어야 온전히 마음대로 떠돌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완벽한 설계도를 짠 뒤 그것에 맞춰 가기보단, 그냥 자유롭게 연세로를 거닐기로 했습니다. 제 안의 연세로를요.
–

실물보단 화사하게 나왔습니다
그렇게 연세로에 도착했는데 풍경이 아주 을씨년스럽습니다. 고비 사막에서 불어온 모래 폭풍이 연세로까지 덮쳤기 때문입니다. 아니 평소엔 날씨 좋기만 하더니… 제가 본 연세로 중에 역대급으로 칙칙합니다.
맑고 반짝이는 햇살 아래서 환히 빛나는 연세로를 담고 싶었는데.. 운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탈색된 듯한 누런 하늘이 왠지 제 기분 같아 이내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앞으로 6일간 내야 하는 과제가 7개 있는, 심지어 아직 제대로 시작한 게 없다는 충격 실화를 앞둔 지금의 상황과 완벽히 일치하는 절묘한 풍경이었으니까요.

우리 연세로는… 원래 이렇게 예뻐요….
역시 몇 년 오갔던 세월이 있어서인지, 이제는 연세로가 제 기분에 맞춰 변신할 줄도 알게 된 모양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풀리네요. 그동안 서먹했던 연세로와 화해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사실 언젠가부터 연세로가 불편하기도 했거든요. 이곳을 걷는 제가 너무 초라해 보여서요. 연세로에서 행인들을 스치며 학교로 가거나 집으로 향할 때면 거의 매번 부끄러워지곤 했습니다. 누구나 조금씩은 틀린다던데 저는 너무 많이 틀려버린 기분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오랜 시간 머물러왔던 길 위에 설 때면 과거의 한 페이지를 떠올리며 그리움과 흐뭇함에 잠기는 게 보통인가요. 그런데 저는 자꾸만 제 서투름에 대해 변명하고 싶어져요. 몇 년간 오갔던 이 길이 저의 서투름과 마주하는 불편한 공간이 돼버렸습니다.
연세로에 남기는 걸음들, 현재 써 내려가는 모든 것들이 미완성으로 남아버릴까 봐 두려워서인 것 같아요. 머지않은 미래에는 지금의 감정들을 과거의 한 순간으로 마주하게 될까요? 지금 연세로에서의 제가 그렇듯이 말이에요.

고르드로 걸어드로갔드
과제를 하러 연세로에 있는 어느 카페 겸 빵집에 들어가 파운드 케익(어버이날이라 양심상 집에 가져가려고 샀어요)과 빵 하나를 샀습니다. 그리곤 2층 카페로 올라가 구석에 혼자 앉아있는 지금, 저는 과거의 순간들과 함께 있습니다. 전에는 저 자리에 앉아서 몇 주째 미루던 가계부 정리를 충동적으로 하고 있었고(분명 과제 하러 갔었는데 말이죠….), 더 전에는 저기에 앉아 코코넛 스무디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때 먹었을 때는 달달하니 맛있었는데 안 사 먹은 지 꽤 됐네요.
생각해보니 이런 일이 많았습니다. 연세로 곳곳에 발자국을 남기면서부터, 몰아치는 과제에 연세로의 카페들을 은신처 삼아 지내는 시간이 늘어가면서부터, 과거의 순간들은 조금씩 기록되어오다 불쑥 제 앞에 그때의 시공간을 펼쳐놓습니다. 그 순간의 상황과 감정과 색채를 다시 불러내면서요.
그래서 종종 연세로에 찍혀 그대로 남아있는 서투른 마음과 서투른 행동들이 눈앞에 보여요. 사진처럼 선명하게. 시도 때도 없이 부끄러워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나 봅니다. 그때 들리던 목소리나 밖으로 보이던 풍경과 조금 부드러웠던 색까지도 여전히 느껴지는데, 저는 거기서 과거의 부족함을 바라보니까요. 그럼에도 결국 저는 이 순간들 속에 있네요.

황-량
(밝기를 높여 찍은 덕에 그나마 덜 칙칙한 연세로)
아름답지 않더라도 괜히 아름답다고 믿고 싶은 순간들을 생각하며 카페에서 나와 연세로를 조금 천천히 걸었습니다. 차 없는 거리 시행 기간인 주말이라 도로는 차 없이 한산합니다. 처음 신촌에 와서 이 광경을 보고서 꼭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백일몽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저에게 신촌은, 연세로는 그런 공간이었습니다.
새로운 것을 꿈꾸게 만들고, 자꾸만 기대하고 설레게 만드는 그런 곳이요. 그래서 연세로에는 저의 어설픈 첫 마음들이 구석구석 놓여있습니다. 연세로에서 사간 꽃과 케이크들, 주고받은 모든 대화와 선물들, 혼자만의 철없는 다짐들…. 아주 예전에 연세로 곳곳에 새겨진 추억들이 꼭 다이어리 스티커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과거의 순간들을 쪼개어 스티커로 장식하듯 이 길 위에 놓인 마음들은 계속 남아, 아쉬움 만큼의 소중함까지도 모두 안고 가게 만들겠죠.
그러니 처음은 뚝 끊겼던 게 아니라 반짝이는 조각이 되어 연세로 곳곳에 흩어져있던 것이라고, 조그맣게 되뇌어봅니다.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색깔 별로 조각조각 나누어지는 것처럼요. 색색의 기억들, 첫 마음들이 잇달린 끝에 결국 제가 있으니까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이야기를 남겨주세요.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