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색을 돌려주세요
빨간색을 돌려주세요. 당신이 보고 싶어요.
지독한 열병을 앓고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 안은 채로 울고 있고, 흘러내린 눈물은 바다가 되었다.
그 당시 저는 거의 확고하게 마음을 두고 있던 미희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처음이었고 확신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나에게는 매일의 유일한 즐거움이었으며 여러 가지의 감정으로 꿈틀거리게 했습니다. 가끔은 간직하고 싶고, 또 가끔은 약간의 증오를 느끼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그런 경험과 감정은 처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던 중 그 몹쓸 연민과 이해라는 단순하지만 막상 그렇지도 않은 감정에 이끌려 이렇게 꼬여버린 것입니다.
가슴이 내려앉을 거 같고 속이 메스꺼워서 헛구역질을 두 번. 하루 중 가장 힘든 순간입니다. 감정을 지나치게 쏟아부었을 때 오히려 감각에 무뎌집니다. 지금 처한 상황에서 주저앉아 멍 때리는 짓 말고는 스스로에게 해줄 위로가 없습니다. 무엇이든 집어삼킬듯한 난폭한 파도가 기분을 대신 묘사해줬고 매정하게 쏟아 붓는 차가운 공기가 연약한 정신을 더 흐물거리게 합니다. 벌써 몇번째인지도 모르는 반복되는 꿈. 희미하게나마 타오르던 사랑과 미희에 대한 모든 것들이 결국은 소멸되었죠. 옷에 붙어있던 몇 가닥의 머리카락과 주머니에 보관했던 온기. 과거의 산물로 남아서는 모두 타버렸습니다.
미희는 빨간색을 좋아했습니다. 빨간 원피스, 빨간 구두, 빨간 핸드백. 나중에 머리카락이 빠지고 온종일 병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때에도 – 미희는 침상 옆에 새빨간 장미 한송이를 두고 바라봤어요. 병원에서 나와 미래의 계획들을 얘기할때면 배시시 웃던 미희는, 작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회색빛 장미꽃 한 송이만 남기고.
가장 애정을 가지려고 노력하며 손에 땀을 쥐게 했던 것들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이후로 석 달 쯤 지났을까요, 이제 빨간색은 제가 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색깔이 되었습니다. 그녀와 함께 빨간색도 죽어버린걸까요. 저는 매일 빨간색을 찾고 있습니다.
단지 스쳐가는 인연으로 치부하기에 그녀는 저의 전부와도 같았고, 장례식 이후에는 잠을 못자서 수면제를 복용하기도 했어요. 미희와의 기억을 우둔한 금붕어의 입술처럼 무차별하게 집어삼켜버려야 했을까요. 건망증에 시달리는 것이 분명해요. 다시 빨간색이 보일 때 쯤, 미희가 나타나지는 않을까. 이러지 않기로 다짐해놓고, 또 머릿 속으로 되뇌입니다. 또 다시 기어올라 마지막이라는 가능성을 움켜쥔 채로 거리를 거니는 것은 모순이거나 혹시 모를 낭만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허상. 절망을 피부로 느끼고 나서 다시는 시도조차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매번 스스로 깨버립니다.
이 반복이 매일의 시작과 끝을 채웁니다.
am 00:08

잠을 많이 못자서 그런가. 몽롱한 정신에 속까지 좋지 않네요. 하지만 오늘은 빨간색을 발견할 수도 있잖아요? 급하게 옷가지를 걸친뒤 나갈 준비를 마치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공원을 지나 회색 잠망경 쪽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 보이는 모습들. 거리 구석구석엔 술에 취해 뒤뚱뒤뚱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귀소의 본능인가요, 사람들은 마땅히 돌아가야 할 곳을 찾아 돌아가겠죠. 그곳에 기다리는 것이 허무일 뿐이라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본능이니까.
초점조차 맞지 않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한지 몇초가 흘렀을까, 저는 도로 한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깜깜한 신호등을 조용히 응시할 뿐이었고, 몸은 순간 경직된 듯 했어요. 클락션 소리가 좌우 귀를 스칠 때 쯤, 어떤 이의 손에 의해서 거침없이 보행로로 이끌려 갔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얼빠진 표정으로 그 존재를 바라봤습니다. 짧은 단발에 어딘가 미희와 닮은 얼굴.
“거기서 그렇게 멀뚱히 서 있으면 어떡해요. 지금 빨간불인 거 안보이세요?”
“죄송해요..그..생각을 한다는게.”
언제부터 멈춰있었던 걸까요, 어지러워진 나는 바닥에 주저 앉아 버렸어요.
“괜찮으세요? 일단 빨간 잠망경 쪽 벤치에 가서 좀 앉아 있어 볼래요? 제가 부축해드릴게요”
제 팔은 그녀의 어깨를 감쌌고, 우리는 누가 앞장서는 것인지도 모르는 형태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아무말 없이.
천천히 벤치에 앉았고, 그녀가 말을 건넸습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다 포기한 사람 같은 표정이었어요.”
나에게 너무도 상관없는 사람만이 나의 상태와 절망을 이해하려고 하네요. 그
“괜찮으시면, 같이 걸으실래요?”
그녀와 나는 회색 잠망경부터 연세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아, 저는 25살 이정훈이라고 합니다. 아까 횡단보도에서 붙잡아 주셔서 고마워요. 이 말을 진작 했어야 했는데..”
“아 아녜요, 저는 이수민이라고 해요. 동갑이시네요! 매일 새벽에 신촌 산책하시죠? 매일 보이시더라구요, 근데 오늘은 표정이 뭔가 달라 보였어요”
왜인지, 내 얘기를 털어놓고 싶었습니다.
” 사실 저는 빨간색을 찾고 있어요. 작년에 소중한 사람을 잃었거든요. 근데 이상해요, 그 사람이 죽은 후로 빨간색이 회색으로 보여요. 그래서 저는 빨간색을 찾을 때까지 걷고 있어요.”
그녀는 내 얘기를 사뭇 진지하게 들어주었습니다. 놀라는 기색도 없이.
나지막히 들리는 대답은
” 참 놀랍네요.. 저는 초록색이 보이지 않아요. 3년간 키우던 산세베리아가 시들어 버린 이후로요. 아까 정훈씨처럼 횡단보도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거든요. 멍하니, 잃어버린 것을 애타게 찾을 때.. 그래서 예전의 저를 보는 것 같았어요”
저는 놀라서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았습니다. 결핍은 결핍을 알아보는 걸까요, 저와 수민씨의 만남이 특별하게 느껴지네요.
“왜 우리에게만.. 이런 일이 생긴걸까요. 영원히 빨간색을 잃어버린 채로 살면 어떡하죠? 겁이나요.”
“그런데 아마 우리에게만 일어난 일은 아닐 거예요. 사람들은 원치 않게 소중한 것들과 이별할 때면 미련을 가지잖아요. 이별 후유증으로 특정 향기를 맡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특정 맛을 느끼지 못한다거나.. 어쨋든 우리는 그 미련이 색깔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일 뿐인 거 같아요.”
“정말.. 이해가 어렵네요.
“빛의 파장이 미련을 집어삼켜 빨간색 파장을 흡수하고 있는거죠.”
저는 그녀가 했던 말들을 곱씹어보았습니다.
” 미련한 마음에 영원히 빨간색을 잃어버린 채로 살아야하면 어떡하죠. 겁이 나요. 수민씨는 초록색을 다시 찾으셨나요?”
“그쵸. 모든 것을 간직하며 살 수 없다는 건 너무 슬프죠. 음.. 저는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초록색이 가끔 보일 때가 있어요. 어려웠지만, 더 이상 산세베리아를 그리워하지 않기로 했거든요. 그러고 잊고 살다 보면, 가끔씩 초록색이 보일 때가 있어요. 아주 잠시동안만요.”
“다짐을 해도 말 처럼 쉽지가 않죠. 다음날이면 또 거리로 나오게 되더라구요. 하지만 아무 것도 찾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죠.”
“ 흠.. 그럼 혹시 저희 언제 같이 걸으면서 서로에게 결핍된 색깔이 보이면 설명해줄래요? 혼자 끙끙 앓으면서 다니는 거 보다 재밌을 거예요.”
” 같이 있으면, 확실히 신호등 색깔은 잘 볼 수 있겠네요. 오늘 짧은 만남이었지만, 되게 위로가 되었어요. 저와 같은 처지의 사람을 이렇게 만나다니, 소설에 나올 법한 일이, 우리에게 생긴 것만은 분명하네요.”
“때로는 현실이 소설보다 더 기이한 법이니까요. 제 연락처 알려드릴게요. 힘들 때 연락하셔도 좋아요. “
야위어가는 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에요.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인가요, 혹은 사랑의 경미한 꿈틀거림인가요. 어느 것이든, 저를 옥죄던 음습한 생각을 날리기에는 충분했습니다.
am 04:12
집으로 돌아와서 바로 침대에 누웠어요.
과분하게 밝은 조명 아래에서 쓸쓸한 밤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을 바라봅니다.빨간 생각은 사그라들고 왜 잘 알지도 못하는 그녀가 보고 싶은 걸까요. 이렇게 쉽게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미련만을 가지고 산 탓일까요, 초조하게 상대를 기다리는 것이 사랑의 초기 증상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아, 저는 지금 회색 잠망경 앞에서 수민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녀가 도착하고, 우리는 신촌 일대를 돌아다니며, 서로가 인식하지 못하는 색깔을 서로에게 설명해주었습니다. 특히 수박을 먹을 땐, 얼마나 재미있던지.
그녀는 결핍된 저를 채워주는 존재입니다. 저 또한 그녀를 채워줄겁니다.
이제 맹렬하게 부르짖는 파도에 몸을 던져야 할 순간이 찾아오기를
시간의 단단한 모서리를 느끼면서 겨울의 적막함을 촉감으로 알아차리던 과거는 이제 없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어쩌면 세상은 너무 쉬운 탓에 하찮은 사건과 형편없는 동작에 대해 반복되는 내용으로 기록된 것이 아닐까는 생각이 듭니다. 도대체 몇 번의 좌절과 몇 번의 도약이 나의 삶에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까요. 이 생각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여전히 반항과 자립을 계획하지 않고, 피동적인 생활만 고집하고 있으면 안되겠죠.
이제는 아무 생각도 꾸미지 말자, 하고 매일같이 중얼거립니다. 더 이상 나의 문제에 대해 깊게 파고들지 않을 것을 강조하면서. 이제는 색의 순수함을 동경하고 나의 주변 모든 것들을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나 자신까지도. 세상의 끝에 오도카니 서서는 남아있는 미희에 대한 흔적을 씻어 보냅니다.
이제 떠나간 것을 그리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빨간색으로 모자라서 마음까지 빼앗길 수는 없습니다.
눈물은 빗방울이 되어 떨어지고, 강물로 화해 내 안의 바다로 흐릅니다. 두 볼에 느껴지는 뜨거움. 찬 공기에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닦고 나서야-
나는 그 색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늦은 오후 햇빛의 마지막 몸부림은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공평하게 느껴지므로 서러움을 그리지 말아야 해요.
빨간색을 돌려주세요, 당신을 잊을 거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