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zip
살다 보면 문득 시와 마주치는 순간들이 있다. 스쳐가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서, 하루의 마지막을 덮어주는 이불에서. 행과 열을 갖춘 완결된 텍스트로 표현되지 않아도 그렇게 마주친 시 조각들은 가슴 한 켠에 쌓여가곤 한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지역구에서 선발된 아이들이 모인 창작영재반에서 시를 짓기도 하고 지역 신문의 시 짓기 공모에 당당히 입상하기도 했었는데, 십 수년이 지난 지금은 빈 종이에도 모니터에 떠있는 빈 문서1에도 맘 속 시를 풀어놓기가 쉽지 않다. 옛날에 썼던 연애편지를 다시 펼쳐볼 때처럼, 맘 속 가장 말랑말랑한 부분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마주하는 것은 왜인지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각조각의 시들을 맘 구석 어딘가의 폴더 한 켠에 치워두고 살던 와중에, 정말 말 그대로 시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것도 그냥 시가 아니라 컨테이너 하나를 시집으로 채운 시 더미였다. 마치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맞아주는 듯한 모습의 컨테이너로 다가가자 한 쪽 팔에는 죽 진열된 시집들이, 다른 한쪽 팔에는 이 시 더미를 먼저 마주친 사람들이 남기고 간 메시지들이 보인다. 컨테이너의 가슴팍은 따뜻한 조명 아래 시집으로 찬 서가와 원고지가 놓인 테이블로 이뤄져있다. 창천 공원에 들어선 이 흰 컨테이너의 이름은 ‘시zip’이었다.
두 팔 벌려 환영해 주는 듯한 시zip
따뜻한 조명과 앉을 곳이 마련되어 있는 시zip의 가슴팍
10월 30일부터 11월 5일까지 7일간, 신촌의 창천 문화공원에는 이 시zip이 설치되어 있었다. 설치 막바지인 11월 4일엔 이 공간에서 몇몇 시인들과 뮤지션들이 모여 시를 낭독하고 음악을 들려주는 시음(詩音)회가 진행되었다. 행사, 혹은 전시같은 명료한 단어로 표현하기 묘한 이 시 더미는 어떻게 이 곳에 놓이게 되었을까. 다행히도 시zip을 기획한 분을 시음회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응 컴퍼니(O/O company)’에서 문화 기획을 하고 있는 민구입니다. 수석 기획자예요. ‘파스텔 뮤직’ 산하의 ‘파스텔 배움’이라는 기관에서 각종 공연 기획, 강연 기획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도 쓰고 있어요. <배가 산으로 간다>라는 시집도 썼고요. 시zip을 기획할 때도 시인으로서의 경험이 도움이 됐습니다.
시zip은 파스텔 뮤직에서 기획하신건가요?
파스텔 뮤직은 협찬만 했고, 시zip은 *공공미술 아트 플랜의 일환이에요. 서울 디자인 재단이랑 공연과 강연을 기획하는 응 컴퍼니에서 주관을 하고 있고요. 네 개의 출판사(문학동네, 문학과 지성사, 창작과 비평, 민음사)에서 각종 시집을 협찬 받아서 시민들에게 시를 돌려드리는 행사입니다. 말 그대로 시들이 모여있는 집이에요.
(*공공 미술 아트 플랜 ‘짓다’ – 서울 디자인 재단에서 주관하는 프로젝트. 서울의 공터나 시민들의 이용이 저조해 방치됐던 공공 장소 8곳에 이색 공공미술 작품을 설치하여 예술가와 시민이 새롭게 만나 관계를 만들고 문화예술을 나누고 예술 활동을 통해 서울에 새로운 공공미술을 시도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다.)
시민들에게 시를 ‘돌려준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럼 시zip을 기획하시게 된 의도를 그렇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시는 예나 지금이나 계속 읽히고는 있지만, 그렇게 인기가 많은 장르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변방에 있는 장르예요. 사람들이 접하고 있지만 자주 접하지는 않고, 대중적인 것과는 굉장히 거리가 먼. 그래서 처음에 시zip을 기획할 때 많은 시인들이 시민들 앞에서 저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다같이 공개하고, 시민들에게 시心을 좀 돌려 드리고자 했어요. 그래서 저희가 시집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협찬 받은 시집들을 시민들에게 증정해드리고, 선물해드릴 수 있도록 한거죠. 마음에 드는 시집 있으시면 가져가시면 되세요.
시집을 그냥 준다니. 오래도록 업로드하지 않아 먼지 낀 인스타그램을 켤 수밖에 없었다.
맞아요! 저도 판매가 아니라 무료로 증정한다는 게 굉장히 다르게 다가왔거든요. 시zip 전시 기간 중 하이라이트인 11월 4일 시음(詩音)회는 음악과 시를 시민들에게 함께 보여 주시는 건데 그렇게 기획하시게 된 이유가 있으신가요?
좀 더 얘기를 드리자면, 시를 쓸 때 나에 대해, 자기 자아를 통해 소재를 찾을 수도 있지만 타인과의 관계, 예를 들어 오늘 이렇게 인터뷰 하는 이 순간도 시의 소재가 될 수 있어요. 시인들이 시를 쓸 때 이렇게 시민들 덕을 본 것들을 당연히 시민들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zip을 기획하게 되었어요. 사실 이런 행사가 거의 없었어요. 이렇게 출판사들이 모여서 컨테이너 안에 시집들을 모아 놨을 때 대부분 반응이 ‘어 이게 뭐지?’, ‘컨테이너 안에 왜 시집들을 모아놓은 걸까?’, ‘판매하는 건가?’ 하고 오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으세요. 그 때 저희가 시집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돌려드린다, 이렇게 따뜻함과 선물받는 기분을 느끼실 수 있게끔 말씀 드리는거죠.
파스텔 뮤직과 연계해서 음악을 함께 보여드리는 이유는 우선 파스텔 뮤직과 응 컴퍼니가 같이 협업하기에 용이한 기관이기도 하고, 실제로도 자주 함께 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런 것을 떠나서 뮤지션들이나 시인들이나 서로 표현하는 방식만 좀 다를 뿐이지 각자 하고 싶어하는 얘기의 주제나 맥락은 비슷하고 맞물리지 않나 생각을 해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람이 아닌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그런 면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인디 레이블인 파스텔 뮤직의 뮤지션들이 오셔가지고 오늘처럼 같이 소통도 하고… 보셨어요 공연? 어떠셨어요? 좋았죠?(웃음)
네 되게 좋았어요.(웃음) 시와 음악이 어울린다는 생각도 했구요. 그리고 저는 낭독도 좋아하는데 문장을 지은 분이 직접 낭독하시는건 느낌이 다르더라구요.
달라요. 낭독을 전문적으로 하시는 분들도 있죠. 굉장히 멋있는, 목욕탕에서 들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낭독을 하시는. 그런데 조금 서툴러도 자기 시를 직접 타인 앞에서, 낯선 사람 앞에서 읽을 수 있다는 것도 굉장히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날씨가 조금 춥긴 했지만 보러 오신 분들도 좋은 기분을 안고 갈 수 있는 그런 행사였던 것 같아요.
11월 4일 진행된 시음(詩音)회에서는
뮤지션들의 공연과 함께 낭독회가 열렸다.
말하자면 공공미술의 일환으로 설치된 시를 음악과 함께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행사가 시zip인 셈이다. 시인도 뮤지션도,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영감으로 작품을 만들었으니 시민들에게 시와 음악을 돌려주고 싶다고 한다. 감성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를 돌려준다’니! 돌려받을 시가 있다는 것은 거꾸로 우리도 다른 누군가에게 시라는 의미다. 에디터가 지나가면서 마주친 시들처럼, 어떤 의미로든 다른 이의 가슴 속에 시로 남았을 수 있다는 생각에 괜스레 가슴이 뛰었다.
본인 또한 시인이신데요. 시를 쓰시는 분들은 보통 시를 읽는 분들과 가까이 만날 기회가 별로 없으실 것 같은데 기획자로서가 아니라 시인으로서 이번 행사의 의의를 찾으신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사실은 얼떨결에 행사를 기획하게 됐어요. 처음엔 시 쓰고 공부만 하다가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을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어요. 내가 공부할 때, 독자의 입장이었을 때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은 행사를 조금씩 구현한 것 같아요. 제 머릿속에 있는 것보다는 뭔가 부족하고 헐거운 것 같아도 이런 행사들을 기획하게 되어서 너무 기뻐요. 특히나 시민분들이 많이 오셔서 볼트가 되고 너트가 되어서 부족한 틈을 채워주시는 게 참 고맙죠. 그런 부분이 참 찡해요.
시zip을 기획하신 기획자이자 시인이신 민구님
제 주변 친구들도 시zip을 방문해서 SNS에도 많이 올리더라구요. 주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시라는 장르가 멀게 느껴졌는데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던 적이 처음이었다는 반응이 많았어요. 읽은 시집의 내용이나 좋았던 구절을 SNS에 올리기도 하고요. 이런 면에서 행사를 기획하시면서 새롭게 기대한 것이 있으시다면 어떤 것인가요?
뭔가를 새롭게 기대한다기보다 기존의 기대를 자꾸자꾸 확인할 수 있어서 그게 너무 좋았어요. 어제는 어떤 어르신께서 찾아오셨는데, 며칠 전까지만 해도 꽉 차 있던 시zip 서가가 비어있다고 지금은 자기가 찾는 시집이 없다고 안타까워 하시더라고요. 혹시 시집을 더 들여놓을 수 있겠냐고 물으셨는데 가능하면 그렇게 하겠지만 저희가 보충을 해드리기는 힘들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그 분이 가신 후에 빈 서가를 다시 보니까 새삼 굉장히 감동적이었어요. 많은 시민들이 저희 시zip을 좋아해 주시고 찾아주시고 하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졌고, 꽉 차있는 자리뿐만 아니라 비어 있는 자리 또한 하나의 설치나 공연, 예술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하얀 모습, 백지처럼 비어있는 모습들이요.
서가가 비어가는 동안, 포스트잇은 가득 찼다.
법률 밖으로의 외출이 잦은 에디터의 시선을 멈추게 한
울고 있는 포스트잇
그만큼 많은 분들이 시를 나누었다는 의미겠네요. 제가 그저께 왔을 때는 서가가 다 차있었는데 많이 가져가신 것 같아서 좋아요.
처음에 저희가 10월 25일부터 29일까지 청계천에서 했어요. 청계천 한빛광장에서 했었는데, 미래 에셋 앞 커다란 광장에서 했기 때문에 직장인분들이 시집을 많이 가져가셔서 컨테이너를 신촌으로 옮길 때는 시집이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한 번 더 (협찬 출판사들에) 부탁드려서 채워 놨는데 지금 또 많이 가져가셨네요. 그걸 보면서 오히려 차 있는 것을 볼 때보다 비어 있는 모습을 볼 때가 더 뿌듯해요.
개인적인 질문인데, 작가님들을 뵐 때는 항상 어떻게 그런 문장들을 만들어 내시는지 창작 과정이 궁금하거든요. 가만 있다보면 문장이 떠오르시는지 아니면 매일매일의 일과처럼 생각하시는건지.
개인적인 거니까 저도 솔직하게 얘기를 할게요. 그게 오신다 그러거든요. 영감. 우리끼리는 영감님이 오신다고 얘기를 하는데.(웃음) 그러니까 시인이 태어날 때부터 시적인 그런 것들을 타고 태어난 사람도 있을거에요. 천부적으로 영감을 받는거죠. 그런데 대개는 그렇지가 않은 것 같아요. 가만히 밤나무 아래에 있으면 밤이 뚝 떨어지는 것처럼 떨어질 때도 있고, 반대로 걸어가면서 밤을 주울 때도 있어요. 가만히 있는데 나에게 시가 올 때도 있고, 소재를 찾아 다니기도 하는거죠. 사실 꼭 정답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천재들도 있겠지만 아닌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제 경우에도 소재를 좀 많이 찾아요. 그렇다고 소재를 막 끌어당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제가 왜곡시키지 않으려고 해요. 저 사물이, 저 현상이 하고싶은 얘기가 뭘까 하고 귀 기울여 보는 것 같아요. 재밌어요. 시 쓰는 건 약간 어렵지만 소재가 하나 있으면 앞 모습 뿐만 아니라 뒷 모습도 보게 되는거죠. 지금 보는 에디터님의 모습은 즐거워 보이지만 혼자 집에서는 고민도 있을거고 짜증날 때도 있는 것처럼, 그런 이면들이 있으니까.
공원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컨테이너. 그 자체로 시이자 미술품이다.
이 시의 제목은 <스무살>.
에디터의 폭죽은 유독 더 빨리 끝났다.
처음에 청계천에서 하시고 신촌 창천공원으로 넘어 오셨잖아요. 신촌 창천공원에서 행사 시zip을 이어가게 되신 이유가 특별히 있으신가요?
창천공원은 사실 혼잡하고 붐비는 공간은 아니에요. 저희가 저 앞 연세로 차 없는 거리에서 했으면 더 많은 사람은 만났겠지만, 개인적으로 이 공간이 너무 아까웠어요. 어르신들께서 술 드시고 계시고, 금연 공원인데 젊은 친구들은 담배 피고 있고… 이 공간이 버려지고 있는 것 같아서 우리가 그 공간에 들어가서 새로운 것들을 재생시켜 보는게 어떨까, 시라는 장르와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둘 다 인기 없잖아요.(웃음) 그런 인기 없는 공간과 컨텐츠가 만나서 새로운 것들을 파생시켜 보자. 멋있는 전시, 멋있는 공연이 될거야. 그래서 시민들이 오셔서 하나하나 또 다른 시집을 채워갈 수 있겠다. 그래서 창천공원에서 하게 된 것 같아요.
저도 이 공간이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곳에서 행사가 이뤄져서 좋았어요. 마지막으로 혹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고마워요. 추운데 사람들이 와 주시는 것도, 이렇게 찾아와서 취재를 해주시는 것도. 또 이렇게 찾아뵙는 기회가 있을거예요!
감성팔이, 진지충, 오글거림. 팍팍한 삶 탓인지 종종 부정적 태도로 시를 대하는 이들을 발견한다. 하지만, 압축 프로그램의 아이콘처럼 딱딱해 보이는 그들의 껍질 안에도 시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쩌면 나약해 보이는 것이 두려워서, 혹은 부끄러워서 내면의 감정들을 쉽사리 풀어놓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혹여 그 껍질 안이 텅 비어있더라도, 그 모습조차 누군가에게는 한 편의 시일 수 있다.
.zip 파일이란 클릭해서 풀기 전까진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는,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한 것이다. 에디터가 시zip에 머무른 길지 않은 시간 동안에도 꽤 많은 이들이 이 곳에서 ‘압축 해제’를 하고 갔다. 시zip은 사람들이 마음 놓고 속에 있던 시들을 풀어 놓고, 다른 시를 얻어갈 수도 있는 시’집’이기도 했다. 이제 컨테이너는 사라졌지만, 가슴 속 시.zip 파일은 여전히 남아있다. 지금 이 새벽, 조심스레 마음을 클릭해 압축을 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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