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편지



안녕.
요즘은 제법 날씨가 쌀쌀하다. 뚜욱 뚜욱 떨어지는 온도와 발맞춰 한겹한겹 쌓여가는 걱정, 그리고 상념들. 벌써 겨울이다. 뭘 했다고 연말이 이만큼 가까워진 걸까? 싸함이 마냥 달갑지는 않은데, 높고 푸르러진 하늘을 보면 몸을 파고드는 추위가 견딜만 한 것 같기도 해. 맑은 하늘에는 그 청명함을 눈에 담기만 해도 마음이 노곤하게 풀어지는 마법주문이 걸려 있나봐. 홀린듯이, 무언가를 하고 싶고 소리지르고 싶고 달리고 싶고… 평소에는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하게 만든다니까. 지난 날의 일이야. 과실에서 캐논을 빌려 무작정 나왔던 적이 있었다. ‘사랑’을 기록하고 싶다는 충동이 몸을 달궜어. 별 이유는 아니었는데, 참 이상하지.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사랑, 사랑, 사랑!
‘사랑’은 정의하려고 할수록 어려운 개념인 것 같아.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 떠올릴 때면 한참을 갸우뚱거리게 되기도 하고. 괜히 심오해지기도 한다.


사랑, 이라는 단어를 입속에 굴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부모님인 것 같아.
무한한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어 준 사람들. 아마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사랑해줄 분들이 아닐까. 그 사랑을 남김없이 받아먹고 무럭무럭 키워서 나 역시 사랑을 나눠줄 수 있게 되었어. 그래서 사랑.


그때 그 시절. 어렸기에 순수했던 내가 생각나기도 해. 우연히 옛날 추억이 깃든 장소를 지나갔었는데,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은 현재의 내 모습이 겹쳐보이더라고. 느끼는 바가 많았다 정말. 그래도 동심은 잊혀지기에* 애틋한 법이니까. 그래서, 사랑.


일상 속에서 느끼는 포근함도 사랑하고 있어. 소중한 사람들과 정처없이 걷고 이야기하며 실없이 웃던 기억들 말이야. 별 거 아닌 일상은 가볍기에 묵직한 것 같아. 그 추억이 사라진다면 마음이 벙 뚫려 모든 것이 흘러내려버릴 거니까.
그래서,
사랑.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은 추억도 언젠가는 바래지기 마련이잖아. 이 친구랑은 평생 친할 줄 알았는데, 이 가게는 안 없어질 줄 알았는데… 너무 소중해서 내 마음 한켠에 가득 차버린 기억들이 나를 괴롭게 할 때, 내 곁에 영원히 남아줄 수 있는 건 결국 나 자신이니까. 내가 얼마나 어여쁘든 못났든 간에,
사랑.



이외에도 나는, 수많은 것들을 사랑하고 있어.
그나저나 사랑을 기록하겠다고 했으면서 흑백사진만 한아름 보여주다니.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 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하 웃을지도 모르겠어. 우리들은 종종 흑백을 낡고, 오래되고, 죽은 듯 멈춰버린 이미지로 생각하곤 하잖아. 이해해.
실제로 빅토리아 시대, 사진은 멈춰버린 삶을 담는 도구였다.

신랑과 팔짱을 낀 신부
엄마 품에 기댄 어린 아이
눈을 감고 강아지를 쓰다듬는 노인…
사진사는 차갑게 식어버린 모델의 몸을 지지대로 받치고 생기없는 얼굴에 분장을 덧대 생을 가장했어.
갑자기 섬뜩한 말을 꺼내서 놀랐다면 미안. 하지만, 마냥 무서운 이야기를 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때의 필름에 담긴 사람들은,

누군가의 귀애하는 연인이기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이기도
애틋하기만 한 부모이기도 해.
값이 비싸 사진을 쉽게 찍을 수 없었던 당시의 서민들은 삶을 이루는 조각이 더 이상 곁에 존재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친척들과 이웃의 돈을 모아 단 하나의 사진을 남겼다. 흑백사진은 찰나를 담아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사랑했던 삶들을 기록하는 기술이었던 거야.
그 영향일까.
아직도 세계 곳곳에는 사진에 영혼이 담긴다는 믿음이 존재해.
물질적 표상에 영혼이 스며든다는 믿음.
우리는 사진을 찍으며 스스로의 이야기를, 영혼을 간직하며 살고 있는 거야. 한숨처럼 흩어지는 시간 속에서 필름에 담긴 삶들은 영원을 살게 되겠지.

불가지하고, 불가사의한 힘에 이끌려.
무채색빛 필름을 얻기 위해서는 인화지의 노출을 설정하고, 현상하고, 수세하고, 건조시키고. 적정을 찾는 과정까지 한 작품에만 몇 시간이 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흑백은 마음으로 쓰는 편지.
꾸며낼 수 없는 가장 순수한 진심인 거야.

오후 열두시, 삶의 한 가운데. 태양이 작열하고 만물이 생동하는 지금 네게 전하고 싶은 건 오직 단 하나
사랑을 통해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다채로워진다는 사실이다.

오직 흑과 백 사이에 존재하는 다채로움,
그 무엇보다도 터질듯한 생(生)을 너에게-
삶이 가장 뜨겁게 타오르는 지금 이 순간
한낮의 편지를.
추신. 답장 기다릴게 :3
[__하는 __에게]
필름사진학회 이미지스트 제 56회 정기사진전
2022.11.10~11.12, 이화여대 대산갤러리.
흑백필름으로 전하는 편지,
편지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건 ‘사랑’.
무채색 사랑을 충분히 느꼈기를 바라며.
‘당신의 사랑은 어떤 빛깔을 갖고 있나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이야기를 남겨주세요.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