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백
“뭐해요?”
새벽 열두시, 적막을 뚫고 남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남자의 물음에 인영이 움찔한다.
여자가 이곳에 온지도 벌써 일주일 째.
그녀는 남자를 관찰해왔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그리고,
이레.
남자는 밤부터 새벽까지 혼자만의 연극을 해왔다. 관객이 있든 없든 간에 잘 벼려진 감정을 내보였다. 피곤과 미련에 찌든 얼굴들이 사라진 야심한 시각, 아무도 없는 신촌의 공터. 그는 고요 뿐인 허공을 향해 땀과 숨과 심장을 바쳤다.
여자는 홀연히 나타났다. 공원 나무 사이에 몸을 숨기고 남자의 땀과 숨과 심장을 모두 보았다. 여자는 남자를 지켜봤고, 남자는 여자의 시선을 느꼈다. 그렇게 관객이 한명뿐인 연극을 시작한지 일주일 째, 남자가 여자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넸다. 남자의 목소리에 몸을 떤 여자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왜 가려고 해요?”
내 연극이 좋아서 봤던 거 아니었나요, 남자가 빙글빙글 미소지었다. 여자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어정쩡한 자세를 바로하고 조곤조곤 말한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당신 말대로 좋아서 계속 봤어요. 당신의 1인극이.. 재밌으니까.”
아하, 남자가 잘 알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남자는 미소를 띈 채 서 있었다. 얼마간의 정적이 흐르고 그가 별안간 입을 열었다.
“내 연극은 최고죠. 당신도 봐서 잘 알테지만, 떠올려봐요. 첫째날에는-”
“주인공 쥐똥이가 하루종일 먹고 자고 싸죠. 한량이 따로 없던데요.”
여자가 잽싸게 대답했다. 남자는 제법이라는 듯이 한쪽 눈썹을 들었다 놨다.
“호오, 잘 아는군요. 맞아요. 근데 쥐똥이가 이틀째에는-”
“역시 탱자탱자 놀았죠. 이마에 아버지의 꿀밤이 작렬했습니다.”
또 한번 눈썹이 포물선을 그렸다.
“당신, 기억력이 꽤 좋은 편이네요. 하지만 과연 그다음날 쥐똥이의 행방도 알까요? 내가 알려주죠. 사흘째에는-”
“또 길거리에서 뻘짓을 하다가 자기 발에 자기가 걸려서 넘어졌죠.”
“거기까지는 누구나 추측할 수 있을 법한 그저그런 평범한 전개라고 할 수 있어요. 진짜는 그 다음부터입니다. 나흘째에는-”
“크게 넘어졌는데 마침 한탕치고 온 도둑 앞에서 넘어진 거였죠. 쥐똥이는 뻘짓으로 도둑을 잡았습니다.”
“인정할게요, 당신은 보통이 아니군요. 하지만 본격적으로 재밌어지는 건 닷새째-”
“도둑이 훔쳤던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줬는데 알고보니 그 주인이 회사 오너였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쥐똥이는 말단직원의 꼬리의 꼬리로 취업합니다.”
“…”
“엿새째에는 쥐똥이가 직장에서 해고됐어요. 하루만에 백수가 됐죠.”
“…”
“이레째는, 보고있던 중이라 말할 수가 없네요.”
여자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마쳤다. 알 수 없는 승리감이 전신을 감쌌다. 수다스러운 남자를 입 다물게 했다는 사실이 웃기면서도 내심 뿌듯했다. 방금 막 말을 튼 사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남자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역시.”
장갑 낀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던 남자가 또 갑작스레 정적을 깼다. 그가 손을 내려 팔짱을 낀다.
“쥐똥이가 이레째에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긴 하죠.”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알려줄까요?”
다시 환한 웃음을 만면에 띄웠다.
여자는 일주일 동안 지켜본 남자의 프로필 데이터에 새로운 사실을 추가했다.
- 키가 큼
- 유려한 인상
- 장난스러운 목소리
- 흡입력 있는 연기
hh+) 자뻑쟁이
남자는 여자의 게슴츠레한 시선에도 아랑곳않고 라, 라라라, 빙글빙글 돌며 노래를 불렀다.
“지금부터 놀라운 사실을 말해줄게요.”
여자는 남자가 영화 속 주인공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한순간에 표정을 저렇게 바꿀 수가 있지. 마치 액션, 큐! 사인이라도 받은 듯 모든 동작을 갑자기 멈춘 남자가 놀라우리만치 진중하고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연 것이었다. 방금까지 한쪽 입꼬리를 파들파들 떨며 애써 당혹감을 감췄던 사람이라고는, 자신 정도의 체구면 발레리나처럼 뛸 때 깡총깡총이 아니라 겅중겅중이 된다는 걸 모르고 괴상망측한 스핀을 돌았던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만큼.
그가 성큼 다가오며 팔을 하늘로 쭉 뻗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기 위해 한껏 과장된 몸짓이었다.
“사실 쥐똥이는 초능력자였던 겁니다! 그는 우주와 우주를, 여러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이 있었어요!”
남자의 마법 같은 변화에 동그래졌던 여자의 눈이 다시 좁아졌다. 여자는 남자가 붙이는 부연설명들을 한 귀로 흘리며 프로필을 다시 갱신했다.
- 키가 큼
- 유려한 인상
- 장난스러운 목소리
- 흡입력 있는 연기
- 자뻑쟁이
hh+) 망상증
남자는 그러거나 말거나 쥐똥이의 초능력 설명에 푹 빠져있었다. 그는 일주일을 통틀어서 가장 진지한 모습이었다. 남자는 한참 말을 잇다 난데없이 다중우주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여자는 남자가 매우 산만하고 고집있으며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잘 봐요. 탱자탱자 놀다가 우연히 취업했는데 하루만에 잘려버린 세계의 쥐똥이를 T 우주의 쥐똥이라고 해봅시다. 하지만 이 세상에 오직 하나의 우주, 그러니까 T 우주만 존재할까요? 전혀요! 무수히 많은 평행세계들이 존재하고, 엄청나게 많은 우주가 있어요! 또다른 우주, T-1 우주라고 해두죠. 이 T-1 우주에서의 쥐똥이는 탱자탱자 놀다가 우연히 취업했는데 이틀째에 잘렸을 수 있어요. T-2 우주에서는 정반대로 쥐똥이가 한 회사의 오너일 수도 있는 겁니다!”
남자가 상기된 얼굴로 다다다다 입을 놀렸다. 어린아이 같이 천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조금씩 피로를 느꼈다.
“그놈의 티티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요?”
여자의 말에 남자의 몸이 멎었다. 재잘재잘 신이나서 트위스트 춤을 추던 입도 일순 정지했다. 남자는 태엽 풀린 인형처럼 뚝 멈춰버렸다.
힝.
남자의 굳어버린 몸에서 믿을 수 없는 음성이 새어나왔다. 여자는 유리같이 섬세한 남자가 받았을 충격을 생각하며 사과를 전했다.
“예민하게 굴어서 미안해요. 하지만… 이건 직업병 같은 거예요. 나는 티백공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하루 온종일 차냄새 맡으면서 뜯고 붙이고 뜯고 붙이고. 난 거기에 완전히 질렸어요. 티백의 티자만 들어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단 말입니다.”
가만 듣고있던 남자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궁금한 게 있어요.”
듣기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일을 왜 하는 거죠?
남자의 물음에 여자 또한 일순 정지했다. 단순히 남자의 한없이 장난스럽던 목소리가 무겁게 들려서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남자가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놀리는 건가요?”
여자의 물음에도 남자는 꼿꼿이 서서 아무 표정도 짓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빨려들 것 같은 새까만 동공이 대답을 종용하는 듯 했다. 그는 순수하게 그녀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표정보니 아닌 것 같네요. 왜 내키지도 않는 일을 하냐구요? 당연히 돈 때문이죠. 지긋지긋한 현실 때문에. 이봐요. 당신처럼 하고싶은 일만 하고 사는 사람이 지구에 몇 퍼센트나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절반도, 그 반의 반도, 아니 반의 반의 반의 반도 안될 겁니다. 당장 당신이 꿈을 펼친답시고 서있는 이 공간도 마찬가지에요. 꿈과 희망과 활기가 넘치는 젊음의 거리? 이곳에서 몇명의 젊은이가 좌절당해봤을 거라고 생각해요? 좌절과 실패와 미련의 공간이 바로 이 곳이에요. 내가 산증인이죠.”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큰 키를 가진 남자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한없이 왜소해보였다. 여자는 안타까움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세상 물정을 너무 몰라요. 나는 그런 당신을… 동정하고, 동경합니다.”
여자가 오른쪽 어깨춤에 멘 에코백을 조금 내려 봉투를 꺼냈다. 봉투에는 돈다발이 꽤나 두둑이 들어있었다. 그 돈은 여자가 한달을 꼬박 차냄새 맡으면서 티백을 열심히 뜯고 붙인 대가였다. 남자의 연극을 처음 봤던 그 순간부터 건네주려고 했던 것이기도 했다.
“나에 대해 궁금할 거 없어요. 낭만과 이상만 바라보다 고꾸라진 인생일 뿐이니까. 그런 인생은 세상에 널렸잖아요.”
여자가 고개 숙인 남자의 손에 봉투를 쥐여줬다.
“다만 당신은 그런 인생처럼, 나처럼 되지 말아요. 현실에 잡아먹히지 말란 소리예요. 뒤도 돌아보지 말고 꿈을 쫓아요.”
별안간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유난히도 빛났다. 눈 속에 온 우주의 별이 박혀 쏟아져내릴 듯한 모습이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시선을 맞추고는 질문을 던졌다.
“당신, 꿈이 있나요?”
“아니, 없어요.”
“없었어요?”
“없어요.”
“아니 그니까, 없었냐구요.”
“없다구요.”
“아, 있었는데?”
“뭐하자는 거예요?”
빙빙, 메아리처럼 꼬리를 무는 질문들. 여자는 남자가 아직도 장난을 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꿈은 당연히 있었다. 누구보다 열망했고 손에 쥐고 싶었던 낭만이 있었다. 꿈이라는 단어는 이중적이다. 힘껏 달려 쟁취할 목표를 의미하기도, 잠에 들었다 깨어나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허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꿈은 후자였다. 꿈은 약하디 약해서 현실에 부딪히는 즉시 물거품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찢겨진 허상의 조각 뿐이었다. 여자는 넝마된 꿈의 파편을 끌어안고 삶의 늪에서 침잠하는 중이었다.
여자가 고개를 떨군 것과 동시에 남자가 목을 치켜들었다.
“그거 알아요? 지금 열두 시예요.”
남자가 감격에 겨운 표정과 목소리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아요. 그냥 하루의 끝자락일 뿐이잖아요.”
여자가 바닥을 보며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아니죠, 끝이자 시작이기도 한.. 마법의 시간이죠.”
마법을 이야기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꿈결 같았다. 여자는 남자가 말했던 마법의 시간이 실재할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지금 이 순간, 모든 게 더없이 비밀스럽고 신비로웠으므로. 그녀는 문득 그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쥐똥이의 초능력을 설명했을 때처럼 멋진 영화배우 같은 얼굴일까? 아니면 장난스레 웃는 새털구름 같은 얼굴일까?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든 순간, 시선을 내려 여자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의 눈빛이 얽어들어왔다.
그는,
사랑에 빠진 소년 같았다.
“당신에게 보여주고싶은 연극이 있어요.”
남자가 낮게 말했다.
“호박, 요정, 구두, 그리고 마법. 어떤 이야기 같아요?”
“신데렐라?”
그가 빙긋 웃었다.
정답.
남자가 구연동화를 하듯 그의 땀과 숨과 심장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신데렐라의 슬픔을 이야기하기도, 기쁨을 말하기도 했다. 남자는 불행했지만 행복을 얻게 된 공주의 완벽한 이해자처럼 보였다. 정장을 빼입고 흰 장갑을 낀 그의 차림 때문인지, 한 편의 마술을 관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신데렐라는 요정의 도움으로 왕궁의 무도회에 갈 수 있었어요. 신데렐라는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서 눈부시게 멋진 왕자와 춤을 췄어요. 너무너무 기뻤죠. 하지만 열두시, 자정이 되어 마법이 풀렸버렸고 공주는 깊이 좌절했어요. 절망스러운 상황이었어요. 열두시는 신데렐라에게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어요. 환상에서 깨어날 시간… 하지만, 유리구두를 남기게 해준 시간이기도 하죠. 그 덕에 왕자는 신데렐라를 알아볼 수 있었어요. 신데렐라는 사랑을 찾았고 영원토록 행복했어요.
마술사가 여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모르겠어요?”
ㅡ좌절과 기회. 모두 마법의 시간에 생겨난 것들이에요.
여자는 남자의 말을 곱씹었다. 그녀는 남자가 그 이야기를 통해 자신에게 무엇을 전달하려 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뻔하디 뻔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니까, 좌절을 견뎌내면 낭만이 찾아온다? 내가 신데렐라고 당신은 나를 계몽시켜 행복하게 만들어줄 왕자다? 뭐 이런 허울좋은 낙관론을 얘기하는 겁니까. 미안하지만 난 동화를 믿기에는 지나치게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사람이에요.”
자정에 찾아온 불행과 행운, 신데렐라는 과연 자정의 공주였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아니었다. 남자는 그녀의 차가운 말에 크게 동요하는 듯 했다. 주먹을 말아쥔 채 몸을 부들거리며 얼굴을 구기고는 여자를 팩 쏘아봤다.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죠?”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신데렐라는 접니다만!!”
내가 연기도 했잖아요! 남자가 쏘아붙였다.
여자는 남자의 대답에 픽 웃었다. 이 남자는 한없이 가벼우면서도 무겁다. 계속 잡아당겨도 유연하게 몸을 뻗는 고무줄 같다. 아무리 꽈악 닫아도 끼익 열리고 마는 문 같다.
“신데렐라? 똥데렐라겠죠.”
여자는 아무래도 자신이 이 남자에게 완벽히 적응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왕자님,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남자가 여자를 자연스레 연극에 동참시켰다. 자정의 공주와 왕자는 서로의 손을 맞잡고 왈츠를 추는 대신 똥똥거리며 침을 튀기는 중이었다.
“설마 내가 연기했던 쥐똥이와 나를 같은 취급 하고 있는 겁니까? 쥐똥이와 나는 달라요! 쥐똥이와 내게는 하늘과 땅 만큼의 본질적이고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구요.”
“그게 뭔데요.”
쥐똥이는 우주 여행자지만, 나는 창조자라는 사실이죠!
그가 손을 허리춤에 갖다댄 채로 우쭐거렸다. 여자는 또 다시 프로필을 갱신해야했다.
- 키가 큼
- 유려한 인상
- 장난스러운 목소리
- 흡입력 있는 연기
- 자뻑쟁이
- 망상증
+) 허언증 (심함)
남자는 분명 자뻑쟁이에 과대망상증 말기일 뿐 아니라 허언이 매우 심한 사람이었지만 여자는 그런 그가 좋았다. 그녀는 남자에게 말의 의미를 물었다. 그러고는 그의 입이 아무리 격한 쌈바춤을 추더라도 내버려 둘 것을 다짐하며 남자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
별안간 여자가 숨을 삼켰다. 남자가 갑작스레 다가온 탓이었다. 한 뼘도 안되는 거리에 그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T 우주로부터 T-1 우주로 건너왔어요.”
이와 이가 부딪치며 음절을 만들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속살거리는 호흡이 느껴졌다. 여자가 시선을 빗겨 조금 먼 곳을 바라봤다. 그녀는 지금 이 지구에 남자와 자신 둘 뿐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는 여자를 먼나라의 별세계로 초대하는 중이었다. 아니, 그녀에게 자정의 마법을 거는 중이었다.
나는 지금 T-1 우주에 서 있습니다. 이 우주는 내가 만들었어요. 내킨다면 T-2 우주로 갈 수도 있겠죠. T-3, T-4도 문제 없어요. 왜 그런 것 같아요?
마법의 시간을 살아가기 때문이에요. 좌절이 가득한 우주든, 낭만이 가득한 우주든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나아갈 수 있는 거예요.
돈을 벌어야한다고 했죠. 맞아요. 돈은 필요해요. 당신은 돈 때문에 낭만으로부터 멀어졌고, 좌절했을 거예요. 하지만 돈은, 당신을 다시 낭만으로 돌려보내줄 수도 있죠.
그런데 당신은 낭만의 우주로 가는 우주선을 내게 주는군요.
마법사가 흰 장갑을 벗어던졌다. 그의 손은 흉 투성이었다. 불에 그을린 자국과 무언가에 찔리고 베인 듯한 흉터가 수없이 많았다. 벗겨진 피부 위에 불긋이 새로 돋은 살점조직이 제멋대로 얽혀있는 광경이 보였다. 지독하게 엉겨붙어있는 상처들이 얼룩 같았다. 그 어떤 순백이라도 단숨에 집어삼킬 수 있는 얼룩들. 삶의 얼룩이었다.
그의 인생 또한 얼룩져있었다.
여자는 남자를 보면서 고단하고 외로웠으며 작은 행복도 용납지 않는 자신의 삶을 떠올렸다. 또한 자신이 고집스레 붙잡고 있는 꿈의 파편을 떠올렸다.
여자는 그제서야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가 왜 다중우주를 설명했는지,
왜 자신을 신데렐라라고 칭했는지,
왜 자정을 마법의 시간이라고 부르는지,
왜 이 남자에게, 첫눈에 끌렸었는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남자에게 우주선은 필요하지 않았다.
좌절에서 낭만으로 떠난 여행자이자, 좌절의 우주 대신 낭만의 우주를 만든 창조자였으므로.
남자가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당신 차례예요.”
ㅡ 다른 우주로 떠날, 마법의 시간이에요.
일순간 감정이 복받쳤다. 여자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런 삶은 상상해본적도 없다. 얼룩진 인생을 무슨 수로 되돌린단 말인가. 그런 마법 같은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었다. 참을 수 없는 슬픔에 숨이 거칠어졌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마법은 그녀의 눈 앞에 실재했다.
“…당신의 말은 무모하게만 들려요.”
여자가 한숨처럼 속삭였다.
“하지만 그게 바로 낭만인걸요.”
남자가 여자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손은 거칠지만 따뜻했다. 단단한 손 안에서 여자의 떨림이 차츰 멎어갔다.
남자가 여자의 손을 찬찬히 놓아줬다. 그의 머리 위로 새벽 달빛이 부서졌다. 어느새 여자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을 상처투성이 손으로 어루만졌다. 자정의 자뻑쟁이 공주 똥데렐라는 겁쟁이 티백왕자를 떠나보내려 하고 있었다.
왕자님,
산란하는 빛 아래서 공주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건 내가 흘린 유리구두예요.
꾹 다물린 여자의 손에 봉투를 쥐어주며 눈부시게 웃었다.
가세요, 왕자님. 구두를 갖고 도망쳐요!
ㅡ다른 공주한테 눈길도 주지말고 T-1 우주로 가요!
손에 버석거리는 종이의 양감이 느껴졌다. 손 안에 쥔 것은 과거의 전부이자, 신물이 나는 현실이자, 나아가야할 미래기도 했다. 왕자는 지금 심장을 쥐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뜨거운 공주의, 그리고 자신의 순정이었다.
열두시, 적막한 신촌의 공터. 좌절과 실패와 미련의 공간에서 왕자는 마법에 빠졌다.
“알겠어요 공주님.”
마법에 걸린 왕자가 눈시울을 붉힌 채 대답했다. 봉투를 받아들고는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공주를 바라봤다.
가겠습니다, T-100의 우주라도 기꺼이.
왕자가 떠났다. 등을 돌린 채로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공주는 왕자를 다시 볼 수 없음을 직감했다. 동화를 믿기에는 지나치게 염세적인 사람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그녀는 완벽한 동화 속 왕자님이었다. 환상과 마법 대신에 현실의 눅눅함이 잔뜩 베인, 그런 씁쓸한 동화의 주인공. 어찌됐든 간에 공주와 왕자의 이별로 끝을 맺다니, 꽤나 이상한 동화임에 틀림 없었다. 왕자는 낭만의 우주를 찾아갈 것이다. 백번째 우주라고 할지라도, 기꺼이 창조하고 여행할 것이다.
ㅡ동이 트고 있었다.

Epilogue
삶을 살아나감에 있어서 취할 수 있는 관점들이 여럿 있습니다.
비관론 낙관론부터 시작해서
현실에 충실할 것인지 이상을 좇을 것인지
운명이 정해져 있다 믿고 따를 것인지 개척해나갈 것인지 등등
우리 모두는 각자의 신념대로 삶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저는 전자의 삶을 살고있지만 후자를 동경하는 쪽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면서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누구보다 염세적인 사람이 사실은 누구보다 이상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이상한 생각이 적어도 저한테는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의 관점을 취하면서도 다른 쪽에 닿고싶어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우리 사는 세상은 꽤나 이중적이고 모순적이며 아이러니합니다.
신촌은 젊음의 공간입니다.
수많은 젊음이 오고가는 길목.
젊음들은 젊기에 꿈을 꾸고 젊기에 좌절하고 실패하며 젊기에 딛고 일어섭니다. 무수한 실패와 미련과 무수한 치기와 대담함과 열정의 공간이 신촌인 거죠.
신촌은 이중적인 세상처럼 이중적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런 신촌을 사랑하는 거구요.
어른이 되어버린 젊음을 위한 동화를 쓰고 싶었습니다.
읽으면서 어린아이처럼 설레셨으면 좋겠습니다.
단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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