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나잇 인 신촌
툭.
비가 온다.

입추가 한참 지났어도 미련 가득 지면을 안고 있던 늦더위가 눈살을 찌푸린다.
* 가을비가 오네. 이제 일어나라는 거지?
항상 그랬다. 여름의 남은 열기가 아무리 고집을 부리며 버티려 해도 가을비란 양반은 어느 순간 가만히 찾아와 있다.
그는 늦더위의 등을 톡톡 두들기며 말한다.
* 일어나, 진짜 갈 시간이야.
* 쟤는 매년 저래.
투덜투덜 느릿하게 늦더위는 기지개를 켠다. 얼굴이 홍조로 가득 차 붉다. 고집쟁이의 모양이다. 푸른 가을비는 떠나가는 이의 위로 나리며 발그레한 열기를 식혀준다.
* 잘 가. 푹 쉬어.
한동안 늦더위가 진득이 쓴 자리를 청소하듯 가을비는 지면을 적신다. 적시고, 또 적신다.
멀리서 이 송별의 장면을 지켜보던 에디터는 슬쩍 고개를 들어본다. 가을비를 데려온 어둑한 하늘과 눈이 마주친다.
신촌의 비 내리는 24시. 어제와 내일의, 여름과 가을의 경계 위에서 에디터는 큰 숨을 한번 들이쉬었다.
아, 파란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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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내리고 있다. 끝 여름 온기를 씻고 있는 신촌. 이를 가만히 바라보는 과정은 어찌한 이유에서인지 오락과 같다. 신촌이란 작자가 오늘따라 더 신비롭고 낯설어 보이는 건 왜일까. 24시이기 때문일까. 비가 오기 때문일까. 도대체 무슨 필터를 씌우면 이리도 예뻐 보일까.
에디터는 예쁜 것을 꼼꼼히 뜯어보는 부담스러운 습성이 있다. 어느새 거리 위 하나하나를 찾아가 괴롭히기 시작한다. 찰박이며 거리 위를 걷는 저 청춘은 무슨 생각을 할까. 나리는 빗방울을 비추는 저 가로등은 무슨 생각을 할까. 지금 신촌의 거리는, 무슨 생각을 할까. 끝내 알 수 없는 다른 이들의 생각을 두들겨보는데 갑자기 말소리가 들린다. 화들짝 놀라 튕기듯 제자리로 돌아왔다. 가을비였다. 가을비가 말을 걸고 있었다.
* 신촌 예쁘지?
– 깜짝이야. 응 예뻐.
* 신촌은 예쁘지. 그치만 너 정말 이기적이다.
– 뭐. 뭐가 문젠데.
* 사랑. 넌 사랑을 몰라.
– 어째서?
* 근시안적이야. 정말 사랑하려면 더 알고 싶을걸.
– 더 알려면.. 뭘 어떻게 해야하는데.
* 그렇게 멀리서 가만가만 바라만 보는 게 네가 사랑하는 방식이야? 걸어야지. 이 거리를.
– 아.
* 내가 와있는 신촌은 더 예쁘단 말이야. 흔한 기회가 아니라니까?
가을비의 자신감 넘치는 추궁에, 떠밀리듯 신촌의 거리를 걷는다. 한 걸음, 한 걸음. 가을비가 깔아둔 시간 위로 올라섰다. 시간이 넘어가는, 계절이 넘어가는 그 푸르름 위로 발을 내디뎠다. 그때 뎅뎅뎅, 자정의 종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달팽이관을 소용돌이치며 온몸을 간질이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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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도시는 어디에서도 없어. 과거에도 없고. 비 올 땐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 ”
문득,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 ‘길’의 대사가 떠올랐다.
진심으로 한 도시를 사랑한 그의 대사는 어째 지금 에디터의 마음과 꼭 닮았다.

파랗게 부유한 24시 위에서 에디터는 이 도시를 사랑할 방법을 고민했다.
24시, 이 모호하고 신비한 경계 위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불 꺼진 여백과 보이지 않는 시공간은 마음껏 나의 세계를 그릴 수 있는 캔버스가 된다. 오늘은 파리를 사랑한 예술가, 영화 속 주인공의 마음을 빌려오려 한다. 비 오는 24시의 신촌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이만큼 좋은 게 없어 보인다. 그의 마음으로 이 거리를 거닐어야지.
한 예술가의 마음을 닮아보려 결심함과 동시에 에디터의 마음은 몇십 년 전, 태동하던 1900년도 중후반 신촌의 위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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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시간의 거리에 도착한 에디터는 주위를 둘러본다. 지금의 신촌과 별반 다를 게 없어보이는걸?
아리송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둘,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한 걸음,
마법같은 일이 벌어졌다. ‘임대’ 글자가 붙은 건물이 즐비한 골목이 갑자기 대학생들의 패션 선두의 거리로 파랗게 물들었다. 거리는 복작대는 상권과 사람들로 빽빽했다. 이대 앞이 이런 곳이었나? 당혹스러운 에디터는 주변을 휙휙 둘러본다. 이제 막 가을 학기를 준비하는 듯한 어린 대학생들이 친구들, 가족들과 함께 삼삼오오 모여 거리를 채우고 있다.

상기된 얼굴의 젊은이들이 옷을 맞추고, 머리를 하며 가지각색의 멋을 부리는 중이다. 신촌의 대학교를 입학했다면 당연히 해야 할 통과의례 마냥, 그들의 몸은 분주하고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있다. 세상에, 이렇게나 활기찬 공간이었다니. 이대 앞이 지금도 왜 옷가게가 많은지 에디터는 어렴풋 이해하게 된다. 신세대 여성들의 유행을 선도하는 소비문화지역으로 자리잡은 이대 앞거리. 패션거리의 선두주자로 위상이 드높던 신촌의 모습이었다. 자신감 넘치고 활기가 넘치는 신촌의 기개는 대단해보였다. 생기 가득한 거리를 뒤로하고 에디터는 다음 걸음을 내딛는다.
두 걸음,
상업화로 옛 다방과 주점이 사라진 신촌의 거리가 맥주와 원두커피 향이 가득한, 갖가지 예술문화의 향유가 넘치는 모습으로 파랗게 물들었다. 스치며 보아도 낭만을 한껏 안고 있는 사람들이 신촌을 활보한다. 배우, 음악인, 사진가, 음유시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거리 곳곳에서 뭉치고 흩어진다.

조심히 이 빛나는 도시를 둘러보았다. 라이브 음악이 흘러나오는 음악다방, 록카페, 라이브카페가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소극장과 서점, 음반 가게 안에도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다방과 주점에 모여있는 저들은 신촌의 예술 네트워크를 형성한 문인, 예술가들로 보였다. 그들이 모인 곳이 청년문화의 아지트였다. 거리를 가득 메운 예술가들의 고향,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한 신촌의 공기는 푸르도록 아름다웠다. 신촌 곳곳에서 스며나오는 예술적 향의 원인을, 에디터는 여기서 찾았다.
세 걸음,
상가별로 왁자지껄 흘러나오는 대중음악소리와 길을 걷는 수많은 이들의 대화로 불협했던 신촌의 거리가 한 마음으로 부르짖는 젊은이의 소리로 파랗게 물들었다. 저항운동의 보루로서 학생운동의 대중화를 이끌어낸 중심지 신촌이 에디터의 눈앞에 펼쳐졌다.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풍경에 에디터의 손끝은 파르르 떨린다.

또래로 보이는 이들이 사람들 앞에 서서 열정을 토해내고 있었다. 대학생들을 주축으로 사회운동과 민주화가 이루어진 그 중심에, 신촌은 우뚝 서 있었다. 학생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정의를 위해 신촌 거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신촌은 이런 시간을 머금고 있었구나. 청년들로 푸르른 신촌이다. 그들은 푸른 별과 같았고 신촌은- 푸른 은하수같았다.
청년의 거리. 이름 그대로 벅차도록 푸르른 신촌의 거리 위를 멍하니 바라보던 에디터의 귀에 다시 종소리가 들려온다. 또 귓가가 간지럽다. 잠깐, 잠깐만. 고집쟁이 늦더위처럼 지면을 안아보려했지만 이미 늦었다. 에디터는, 본디 있던 곳으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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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가 에디터의 위로 말없이 내린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2022년, 비 내리는 신촌의 거리에 도착해있다. 신촌, 아 신촌은 이런 곳이었구나. 뜨거운 열정을 머금었던 거리였구나. 곳곳에서 배어나오는 푸른 향기의 근원이 이거였구나. 다채로운 활기로 가득했던 신촌의 20세기의 모습은 꼭 황금기 같았다.
그 시간 속 주인공이 되는 기분은 어떨까. 그 열정의 주인공이 되는 기분은 어떨까. 몇십 년 전 신촌에 발걸음을 내딛던 이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에디터의 마음은 거만하게 부풀어 올랐다. 지금 사람들은 몰라. 그때가 진짜 신촌이야. 사랑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뜯어봤던 현재 신촌의 모습이 밍밍하게 느껴진다.
이건 진짜 신촌이 아니야.
답답함에 위를 올려다본다. 구름이 덮여 먹먹한 하늘은 별 하나 보여주지 않는다. 어두워. 빛을 잃은게 꼭 지금의 신촌같아. 방금 전까지 비를 내려주던 구름이 괜스레 미워진다. 한껏 오만해진 몽상가는 구름을 향해 투정을 부려본다. 그러다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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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다.
갑자기, 막연한 그리움이 용솟음친다. 겪어보지도 못한 과거에게 느끼는 그리움이다. 사무치는 마음을 달래려 노래를 하나 꺼낸다. 파란 노래다.
새까만 밤하늘을 수놓은 별빛마저 불어오는 바람 따라가고
보고픈 그대 생각 짙어져 가는 시월의 아름다운 이 밤에
부르다 보면 어제가 올까 그립던 날이 참 많았는데
저 멀리 반짝이다 아련히 멀어져 가는 너는 작은 별 같아
잊혀질까 두려워 곁을 맴도는 시월의 아름다운 이 밤을 기억해 주세요
Farewell Farewell
잔나비_가을밤에 든 생각
시월의 이 시간, 받을 수 없는 수신인에게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보낸다.
가을의 파란 밤, 혼자만의 감성에 취해있던 그때
* 쯧
가을비가 혀를 찬다.
– 왜, 뭐.
* 이러려고 신촌을 걸었어?
– 네가 보여줬잖아. 화려했던 때를. 빛나는 별들의 축제같던 신촌을.
* 그래서?
– 그래서.. 지금이 너무 초라해보여.
* 멍청이네.
– 뭐?
* 이러라고 과거의 신촌을 보여준 게 아니야
가을비는 에디터의 마음을 한 사진 앞으로 데려간다.

별을 찾는 사람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꼭 별을 보리라 커다란 망원경까지 준비했지만 속도 모르고 하늘은 까맣기만하다.
– 왜 저러고 있지? 별은 거기 없잖아.
* 응.
– 본인이 지금 별밭에 있는데 그걸 모르네. 바본가.
* 내 말이.
– 가까이 있는 별을 왜 멀리서 찾고 있어?
* …
– … 아
한대 세게 맞은 듯 머리가 아프다.
* 과거를 아는 건.. 네가 신촌을 사랑하는 것에 도움이 될 순 있어. 하지만 진짜 빛나는 건 지금 네가 서 있는 이곳인걸. 막연히 먼 곳을 바라보고만 있지는 말아. ‘지금’ 이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때, 한껏 사랑해야 하는 때라는 걸 기억해.
가을비의 말 뒤로 파리를 사랑한 예술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
그 어떤 책이나 그림,
음악이나 조각품이 위대한 도시에 비할 수 있을까요?
파리를 사랑한 사람들. 모든 거리가 각각 하나의 예술품이에요.
이 황량한 우주 속에 파리가 존재한다는 것.
목성이나 해왕성에선 아무 일도 안 일어나요. 그러나 저 우주에도 이 불빛은 보이죠.
카페들, 술 마시고 노래하는 사람들!
파리는 우주에서 가장 열정적인 곳이라고요.
“
파리의 자리에 신촌을 넣어 읽어도 이상할 일이 하나 없다.
모든 것이 이해됐다. 지금 나란 사람이 찾아 헤매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사랑해야하는지. 그 답을 마침내 얻고야 말았다. 가을비는 다시 말이 없다. 남아있는 모든 곳을 적시겠다는 일념인지 신촌 곳곳에 꼼꼼히 내리고 있다. 가을비가 차갑게 삭힌 공기에 손발 끝이 파랗게 시려져 간다. 다시, 거리를 바라본다. 어여쁘다. 저 멀리 우주에서도 보이는 이 불빛 위에서 산다는 것. 이 황량한 우주 속에 신촌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이곳을 마음껏 사랑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알기 전보다 더, 푸른 시간들을 머금고 있는 이곳을 사랑하기로 다짐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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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정의 여행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24시는 사랑의 시간이다.
12시는 낭만의 시간이며,
00시는 넘어감의 시간이다.
그리고, 그리움의 시간이다.
24시의 가을비는 이 사랑의 시간을 만들어주고
낭만적인 신촌의 시간을 여름에서 가을로 한 칸 옮겨 두고
그렇게 그쳐간다.
시월의 아름다운 이 밤을 기억해 주세요
Farewell Fare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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