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다발적인 마음들
01.
“그렇게 살면 안힘들어?”
때는 오후 여섯시, 복잡했던 하루 일과가 어슴푸레 끝나는 시간. 어딘가 돌아갈 곳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과 어깨를 스친다. 이리도 치이고, 저리도 치이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는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기 마련. 유진은 어젯밤의 진솔한 대화를 곱씹으며 무료한 귀가길을 채워나갔다.
유진아, 너는 너무 주기만 해…
어제는 무언가 힘겨운 날이었기에, 기억의 말소를 약속하며 진탕 술을 퍼마셨더랬다. 짠, 짠, 짠, 정신없이 소주잔을 기울였고 가물가물한 필름 속에서 친구는 유진을 꼭 안아주었다. 포옹의 따스함에 유진은 지금이 여름이라는 사실을 까먹을 뻔 했다. 무더위에서도 애정의 열기는 아직 온기처럼 느껴지는지. 온도계가 고장난 몸을 삐걱거리다 유진은 손을 뻗어 친구를 마주 안았다. 그런 유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친구는 아침부터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힌, 뇌리에 박힌 말 한마디를 선사했다. 받는 법을 모르면, 주는 법도 모르는거야. 그건 정말 보다못해 꺼낸 것만 같은 말투였기에, 유진은 더욱 더 신경이 쓰였다. 내가 주는 법을 모른다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 그건 유진의 별명이었다. 또 그녀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겨왔던 별칭이기도 했다. 제 친구 바운더리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호의를 베풀었고, 연인으로 명시된 관계에는 남김없었다. 전부를 건넨 뒤 유진에게 남은 건 약간의 부스러기. 그래도 유진은 그걸 건빵 속 별사탕인 양 녹여먹곤 했다. 조그맣고, 하얗고, 반짝거리고, 달콤한데, 희소한 것들.
흔한 겉치레처럼 들릴지라도 유진은 그녀 주변인들의 행복에서 기쁨을 느꼈다.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따위의 말들을 건네며 헤헤 웃는 것은 무조건반사. 주변인들은 그런 그녀를 좋아했고, 유진은 자꾸만 남들의 웃음과 애정에 몸을 기대곤 했다. 몸을 기대는 건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되니까.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똑바로 서보려해도, 금새 구부정해져서는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는 것처럼. 제 안에서 행복같이 추상적인 것들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인데, 도움 준 이들의 성공과 행복을 지켜보는 것은 훨씬 가시적이고 분명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선물을 주었을 때 받는 감사의 인사 따위는, 그의 행복에 기여했다는 일종의 일시적인 성취감을 주는 일이라서. 그런 것에 늘 목말라있던 유진에겐 꽤 소중했다. 아무튼 그런 자신이 주는 법에 대해서 알면 잘 알았지, 모를리가 없다- 라고 유진은 생각했다.
아니, 생각하려 했다. 꽃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기전까지는. 사실 특별할 건 없었다. 흔한 지하철 역사 내의 꽃집이었고, 매일 아침 지나치는 풍경에 그림처럼 박혀있는 꽃집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받는 법과 주는 법에 대해 생각하며 교통카드를 꺼내는 순간, “이거 주세요!” 하고 어디선가 새어나온 소리가 유난히 경쾌해서였다. 귀를 울리는 소리에 문득 고개를 들자 눈을 마주쳤고, 각양각색의 꽃들은 후각 대신 시각을 포박해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녀의 마음을 옥죄는 것이 있다면- 유진은 꽃을 선물받아본 적이 드물었다.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꽃을 받아들곤 활짝 웃던 상대의 얼굴 여러 개만이 떠올랐지, 정작 제 품에 안긴 꽃다발의 이미지는 쉽사리 그려지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그렇게까지 꽃을 선물받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였다. 생각해보면 꽃은 실용성이라곤 제로인 녀석, 하루만 지나도 시들해지고 간직하자니 골칫덩이가 되어버린다. 들고 다니기도, 보관하기도 까다로운 짐덩어리. 유진은 자신이 주었던 꽃다발들이 시듬과 소멸 사이 어디쯤을 지나가고 있을까에 대해 떠올리다 고개를 저었다. 내 선물은 소유가 목적이 아니야, 내가 바랬던 건 순간의 환희와 행복이었어. 그건 유진의 눈에 확연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꽃이란건 받는 그 당시의 일시적인 기쁨만이 전부인 선물, 허무하면서도 온전한 마음의 전달. 혹은 그럴듯한 포장의 껍데기? 반감적인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즈음, …그렇다 한들, 순간을 꾸미고 치장할 수 있다면 무슨 상관일까, 유진은 다시 다독인다.
“꽃 사시려구요?”
서성거리는 그녀의 발걸음을 붙들어버린건 가게 사장님의 한마디. 이제 그녀는 완전히 꽃집에 매여버렸다. 어색한 웃음을 흘리던 유진은, 네에.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하시게요? 선물이라는 단어가 문득 그녀에겐 크게 다가온다. 아뇨, 누굴 줄 건 아닌데, 머뭇거리던 유진의 입에선 의도치 않게- 그냥 사고 싶어서요. 같은 솔직한 말이 튀어나와버렸다. 사장은 익숙하다는 듯이 다들 그냥 이유없이 많이들 사가시는데요 뭘.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잖아요, 꽃은. 가끔은 그냥 예쁜 걸 갖고 싶은 때도 있는 거예요, 등의 능수능란한 대사를 펼치고, 그게 그의 진심 어린 가치관이든 입에 발린 장사용 말이든간에 유진은 왠지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유진은 선물엔 늘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걸 주면 감동받겠지, 그럼 날 더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게 될거야. 등의 생각이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이런 상황이니까 이런 걸 건네주어야 잘 어울릴거야, 이걸 주어야 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 … 계산기로는 두드려댈 수 없는 복잡한 것들을 암산하며 유진은 그녀의 정답에 빨간 동그라미가 그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채점해주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정답 없는 논술형에 객관식 선지가 생기기를 바라듯이.
이유 없는 선물. 유진은 궁금했다. 건넨 꽃을 받아들면 얼굴이 환해질까, 혹은 건넨 꽃이 받아들여지면 마음이 차오를까? 본인의 손으로 저와 주고 받는다는 것이 웃기기만 한데, 모두들 그렇게 하며 무언가를 느끼는걸까.
가끔은 그냥 뭔가를 갖고 싶은 때가 있다면, 유진은 지금 그냥 그 얼굴을 갖고 싶었다.
다채로운 꽃향기에 웃음을 함빡 머금는 얼굴. 그런 자연스러운 환희.
이제 유진의 손에는 꽃다발이 들려있다.
02.
약속 시간까지 앞으로 10분. 6시에 저녁 약속을 잡는건 어째서인지 늘 당연하게만 여겨져서, 5시 45분에 수업이 끝난 희수의 발걸음은 긴박하다. 손목에 찬 워치에서는 자꾸만 붕붕 울리는데, 그러면 그녀의 마음도 덩달아 진동상태. 괜히 더 조급해진다.
‘교수님은 왜 수업을 늦게 끝내주셔가지구…’
궁시렁거리며 한참을 걸었을까, 희수의 눈 앞에 목적지가 보인다. 종종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꽃내음이 풍긴다. 예쁘긴 하네. 희수는 급하게 눈으로 꽃의 목록들을 훑는다. 장미, 안개꽃, 튤립, 수선화 … 이런 건 또 꽃말이 중요하지, 싶어 이런저런 단어들이 적힌 팻말을 유심히 바라본다. 프리지아, 새로운 시작을 응원합니다. 대충 어울리겠다 싶어 가격을 슬쩍 본 희수는 고민에 빠진다. 생각보다 높네. 꽃말이라는 건 누가 붙인거야, 이것도 그냥 꽃집의 상술 아냐? 괜한 책망을 하던 희수는 가방을 뒤져 휴대폰을 꺼낸다. 알바비가 입금되었을까 하는 의문에 전원 버튼을 가볍게 누르자 그녀의 도착을 재촉하는 알람들이 빼곡하다. 희수 언제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선물과, 자꾸만 떠오르는 초조한 마음. 희수의 입에서는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온다. 크게 숨을 내뱉고나니 무언갈 한결 덜어낸 것 같긴 한데, 아직 부족하다. 체한 것도 아니면서 꽉 막혀있는 듯이. 이런 기분으로 축하를 해줄 수 있을까? 작은 꽃 하나 사는 데에도 가격을 보고 멈칫거리는데, 이건 온전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진심 100퍼센트가 담긴 축하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의심하다, 희수는 며칠 전을 떠올린다.
***
나 인턴 합격했어!
단톡방에 올라온 친구의 한마디는 제법 큰 파장을 불러왔다. 누구나 알 법한 이름의 회사였고,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서 친구가 일한다는 사실은 당연하게도 축하의 대상이었다. 각종 이모티콘들과 장문의 글들이 채팅창을 도배할 때 즈음 희수는 ‘축하해!!’ 한마디를 보내곤 휴대폰을 꺼버렸다. 느낌표 하나는 적어보였고, 세개는 너무 과장돼보였고, 딱 두개정도가 적당했다. 문장부호 하나에도 고심하는 제 자신이 웃겨 하, 실없는 소리를 하나 흘리자 검은 화면 너머 이상한 각도에서 비춰진 얼굴이 보였다. 그런 그녀 자신의 표정이 왠지 씁쓸해보이는 것만 같아 희수는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나 질투하나?’
걔는 늘 승승장구하던 친구였다, 알게모르게 부러움과 시샘의 대상이 되던. 모두가 그 아이의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희수도 그랬다. 노력한만큼의 대가를 받겠지, 쟤는 뭐든지 잘 할거야. 사실 노력하지 않고 얻었다든가, 어디 모난 구석이 있다든가 하면 한결 편한 마음으로 시기하고 질투할텐데 그 아이는 그렇지 않아서 문제였다. 반짝반짝 빛났고 스포트라이트를 홀로 받았다. 오래 쬐여지면 덥고 뜨거울텐데, 이상하게 그 아이는 땀 뻘뻘 흘리는 법 없이 늘 뽀송했다. 너는 어쩜 그렇게 구김이 없니? 희수는 입 밖으로 나올랑말랑하는 말을 애써 붙잡는 중이었다.
“희수야, 너 알바 안가니?”
그녀의 상념을 깬 건 방문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 멍하니 허공을 부유하던 생각과 감정들이 화들짝 놀라 파스스 흩어지고, 희수는 갑작스레 현실로 돌아온다. 달라진 밝기에 적응하듯 잠깐동안 눈을 깜빡거리다, 급격하게 밀려오는 짜증을 말 속에 쏟아낸다.
“아 오늘 대타 구했다고, 안 간다고!”
“얘는 뭐 이리 또 짜증이 났어?”
유난이다, 유난~ 정말이지 엄마의 잔소리는 오늘따라 유독 얄밉게만 느껴지고, 결국 희수는 문을 쾅 닫는다. 스물네살이나 먹어놓고 유치하다곤 생각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울렁거리는 제 속을 감당하지 못할 것만 같아 어쩔 수 없었다. 친절하게도 엄마가 일깨워준 현실 덕분에 극명한 대비가 더 크게만 다가왔다. 대기업 인턴에 합격한 친구, 편의점에서 별볼일 없게 아르바이트를 하는 나. 매일을 바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친구, 집에서 빈둥거리는 나.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받는 친구, 정말 많은 이들에게 축하의 말들을 건네기만 하는 나. 희수는 늘 번갈아가며 축하의 이미지를 가진 이모티콘을 보내야했고, 몇천원을 줘가며 여러 이모티콘을 사곤 했다. 생일 축하해, 입학 축하해, 합격 축하해, 졸업 축하해, 수상 축하해, 취업 축하해 … 비교하면 끝이 없다는 건 알지만, 멈추기는 힘들다. 축하를 하기 위해 말을 고르다보면 한없이 비참하게만 느껴지기에. 비교하지 않고 온전히 축하하는 법에 대해 그녀는 회의적이었다.
그날도 희수는 한참동안 채용 공고 사이트를 들여다봤다.
***
“카드로 결제하시나요?”
네… 하고 말 끝을 흐리며 희수는 카드를 건넸다. 결국엔 돌고돌아 프리지아다. 어쨌든 응원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니까. 새로운 출발과 시작, 그건 정말 축하할 일이었으니까. 시기와 질투가 약간은 포함되어있다 한들 그 아이는 희수의 소중한 친구임은 분명했다.
‘온전한 마음으로 남을 축하해줄 수는 없을지도 몰라.’
그냥, 희수는 그런 결론을 지었다. 내 자신의 성공이나 행복같은 것도 물론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줄 수 있지만, 때로는 내가 축하받을 일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되는 일이 있고. 아무리 사랑과 애정이 잠식하든 어쨌든 완전히 이타적인 사람이 될 수도 없고. 꽉 채우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게 없는 것처럼 굴 필요도 없다. 있고,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다 희수는 꽃다발을 건네받았다. 샛노랗고 따뜻하다. 감정들이 꼭꼭 눌린듯한 생김새. 그 아이에게 잘 어울리는 향이야, 희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03.
지현은 눈을 의심하듯, 제 두 눈을 꿈뻑거렸다.
“그거 뭐야?”
“너 주려고.”
준우는 꽃다발을 쥔 손을 앞으로 뻗었다. 먼저 온 지현은 벤치에 앉아있었고, 휭 불어온 바람에 장미 꽃잎 몇 장이 흩날렸다. 흩날리는 꽃잎 사이, 꽃을 건네는 폼이 제법 어색한 모양새라 지현은 풋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거 받는거 진짜 오랜만이다, 하고 중얼거린 지현은 꽃다발을 안아들었다. 무형의 마음들만을 드문드문 주고 받기만 하던 요즘, 눈에 보이고 손에 담을 수 있는 마음을 마주한다는건 꽤 반가운 일이었다. 빨간 장미, 아무리 전형적인 것이라 한들 그 속내는 늘 특별한 것이라. 향을 맡으려 가까이한 지현의 얼굴에 붉은 빛들이 드문드문 어른거렸다.
“진짜 고마워. 그러고보니, 작년 이맘 때 즈음에도 장미였지?”
“응, 장미였지.”
준우는 지현의 옆에 털썩 앉아 작년을 떠올린다. 하루, 이틀, 삼일 … 365라는 숫자를 꼭꼭 뭉쳐 다시 1로 돌아왔었더랬다. 그건 정말이지 꽤 크고 벅찬 의미였고, 설레는 마음에 꽃집에서 장미를 잔뜩 배달시켜 지현을 놀라게 해주었다. 물론 지현의 손에는 편지와 케이크가 들려있었기에 그도 놀랐던 것은 마찬가지.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던 시간들을 보냈다. 처음 한 자리 수를 세던 것 보다는 조금 느리게 수를 세며 흘러가겠지, 그래도 우리 계속해서 세어나가자… 함께 나누었던 애정 어린 말이 문득 떠오르고, 꼭 마주 안았던 온기가 맴돈다. 그런데 우리의 셈은 지금 어디를 헤아리고 있지? 100까지 세는거야, 자, 시작. 하고 임무를 전달받은 어린아이가 더듬더듬 숫자를 세다가 으앙, 까먹고 포기해버리는 것처럼. 가물가물해진 숫자들의 의미를 더듬어 가다, 준우는 문득 울어버리고 싶었다.
편안함과 지루함 사이 그 어딘가를 그들은 헤매고 있었지만, 아직은 전자의 쪽에 가까웠다. 준우는 목전에 앞둔 것만 같은 권태가 무서웠다. 여러가지 핑계들을 이유로 그들은 서로에게 소홀해지고 있었고, 이대로 가다간 무언가 어긋날 것만 같다는 생각에 덜컥 꽃을 줘버렸다. 복잡한 마음을 떠넘기는 선물이라는 것을 지현은 알까.
“빨간 장미는 정열적인 사랑이라던데.”
“넌 우리가 지금 그런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지현이 던진 화두를 준우는 덥썩 붙잡아버렸다. 그들에겐 대화가 절실했고, 준우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속내를 알 수 없는 지현의 반응에 준우는 초조했다. 오늘, 무언가가 해결될까? 어떤 방식으로 끝이 날까?
“글쎄, 앞뒤를 바꾸어 정열이든 열정이든 요즘의 우리에게 없는건 사실인 것 같아. 물론 그런 마음이 없다고해서 잘못된 것도 아니고, 사랑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지만… 처음부터 없었다면 모를까, 서서히 소멸해가는 걸 지켜보고 있는 건 꽤-“
“슬프지.”
“응, 속상하고.”
“뭐가 이렇게 만들었을까?”
“상황?”
“그렇게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거잖아.”
“그런데 마음엔 변함이 없는걸.”
그러니 다른 것들을 탓할 수 밖에 없잖아, 중얼거리는 지현의 말 이후 침묵이 맴돈다. 지현의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영원이라는 걸 준우는 믿지 않았다. 불변한 것은 없고 결국엔 모든게 변할 것이라 여겼다. 달콤하게 영원을 속삭이던 그들의 관계도 사실은 그럴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래왔고, 그랬었기에 이런 답변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변함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 어떤 형태로든 그건 바뀌었을걸. 그대로였다면 우리가 이런 식으로 굴며 대화하지는 않았을걸. 준우는 마음껏 따지고 싶었지만,
“그러니까, 나는 존재의 유무만 생각하나봐.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는 그대로니까. 언제든 줄거나 찰 수 있지만 그릇 자체가 없어질 수는 없어.”
무덤덤하게 말을 덧붙이는 지현 덕택에 입을 다물었다. 너는 그렇게 종결짓고 싶구나. 아직 그게 깨지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어? 텅 비어있으면 어떻게 채울건데, 언제 채워줄건데. 날선 말들이 가시처럼 쿡쿡, 입천장을 찌르는 느낌에 준우는 손가락으로 벤치를 톡톡 치며 진정시킨다. 이내 장미꽃을 만지작거리는 지현의 손가락이 눈에 들어온다. 하얗고 길게 뻗은 손가락, 늘 제 손 안에 들어와 보드랍게 깍지꼈던. 손 안의 온기, 그의 부재를 느낀 건 언제부터지? 나란히 있음에도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도. 시선이 교차하지 않는 것도. 같은 공간 안에 있음에도,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지 않은 것만 같은 것도. 것, 것, 것 … 그냥 많은 것에 서러움 가득한데 지현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에, 준우는 절로 흘러나오려한 한숨을 겨우겨우 입 안에 담았다. 숨이 막혔다. 그으,래. 뭐라도 먹을까. 먼지를 툭툭 털며 벤치에서 일어난다. 뭐 먹을래? 둘은 미지근한 온기를 남기고 떠난다.
***
“한 입 먹을래?”
“아냐, 너 많이 먹어.”
또다, 늘 더 잘해주려하지만 기회조차 주지 않아. 지현은 거절당한 숟갈을 머쓱히 제 입으로 집어넣는다. 근래의 제 애인은 영 이상하다. 우리가 끝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는걸까. 편안해진 관계, 처음엔 불안감을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또 마냥 그렇게 슬프지만은 않은 것이 그녀는 그녀의 일상을 되찾았다. 남에게 맞추려 급급해하거나, 애정을 갈구하며 애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지? 따위의 질문이 머리에 둥실 떠오르면 지현은- 글쎄, 어찌되었든 난 아직 준우를 사랑하니까? 정도의 답변을 내놓으며 애써 끄덕거리곤 했다.
“그러고보니 꽃은 언제 샀어?”
“아까 늦은게 저것 때문이었어. 지나가다 보여서.”
“로맨틱하기는!”
시선을 돌려 지현은 옆에 놓인 꽃다발을 바라본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꽤 감동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그 이상의 벅차오름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에 든 생각은, 이걸 어떻게하지, 가방에 들어갈까, 따위의 머리굴림 정도라. 제법 현실적으로 변해버린 제 면모를 보면 기분이 오묘하다. 처음으로 받았던 꽃다발을 애지중지 머리맡에 걸어두고 말렸던 기억과는 확연히 달랐고, 제 안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버린 것만 같다는 생각에. 그래도, 아직은 사랑하는게 맞아…
“먹고 뭐할까? 준우 하고싶은거 있어?”
“아, 나 얘기 안했나? 좀 이따 스터디룸에서 동아리 회의있어.”
그럴거면 왜 보자고 한거야, 따위의 매서운 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참고. 지현은 순간 확 상해버린 기분을 꾹꾹 눌렀다. 그러면 너는 남는 시간 잠깐이라도 날 보고 싶었다 말하겠지. 생각해봐, 이건 성향 차이일 뿐이잖아. 삽으로 흙을 평평하게 다지듯, 지현은 몇번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렇구나, 이해할 수 있어. 지현이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는 말. 이해할 수 있어, 이해할 수는 있는데… 언제까지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걸까? 지현은 점점 알 수 없어졌다.
“그러면 먹고나서 데려다주고 집 갈게. 어디서 해?”
“신촌역 쪽인데… ”
“좋아, 그럼 같이 가자.”
걷는 동안 대화가 부재할 것임은 분명했지만, 그래도 일단 같이 걷기로 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니까, 사랑할테니까? 지현은 어쩌면 자기가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근거가 뭔데? 사랑해야만 할 것 같아서 하는 건 아니고? 지난 추억들이 퇴색될까 두려워서 이어나가고 있는건 아니고?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비수가 되어 그녀 마음에 차츰 꽂힌다. 드문드문 말을 주고 받으며 저녁을 먹고 있기는 한데, 어디로 들어가는지 무얼 먹고 있는지 인식하기도 어렵고. 다 먹고 나니 속에 무언가 얹힌 것 같이 답답하다. 지현은 황급히 자리를 뜨듯이 가방을 주섬주섬 챙긴다. 계산하고 있을게.
-지현이 떠난 자리엔 꽃다발이 남아있었고,
준우는 남은 것을 챙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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