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에서 우리는
“으악 비 온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청명했던 하늘,
갑자기 온 세상을 한데 모아 적셔버린다.
“우산 없는데…”
“나도.”
서로의 난감한 표정을 마주하고
“뛰어!”
때마침 눈에 들어온 불 켜진 카페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뛰어 들어간다.
띠링
어서오세요.
“여기서 조금만 머무르다 가자.”
각자 목을 축일 음료를 주문하고 카페 한 구석에 자리 잡는다.
“으, 최악이야.”
“왜?”
“비 오잖아. I hate rainy days.”
“근데 집에서 커피 마시면서 창 밖으로 비 내리는 걸 보는 건 좋아.”
“하하! 그거 좋지.”
.
.
.
부슬부슬
비 오는 날의 풍경들
일기예보를 보지 못한 사람들
예상치 못한 빗방울의 노크에 비 피할 곳을 찾아 하나 둘 뛰어가기 시작하는 사람들
비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사람들도 있겠지
오늘이야말로 새로 산 장화를 개시할 때
눈 앞에 펼쳐진 크고 작은 물웅덩이에도 기죽지 않고 위풍당당 걸어가는 사람들
형형색색의 우산들이 들쑥날쑥 제멋대로의 높이에서 흔들거리며 걸어다니고
각자 자신의 개성을 뽐내
꽤 거센 비에도 머리 위에 얹은 것 하나 없이 묵묵히 길을 걷는 사람
저 사람은 왜 우산을 쓰지 않았을까
생각이 많을 수도, 아니면 별 생각이 없을 수도
.
.
.
“아, 비 오니까 갑자기 그때 생각난다.”
“언제?”
“저번에 비 왔을 때, 연세로에서 국수 먹었는데 맛없어서 가뜩이나 심기불편한데 남자친구가 약속 깨서 싸웠거든. 근데 신촌 메박*에 영화 예매해둔 게 있어서 꾸역꾸역 보러 갔던 기억이…”
“웃기다.”
비 오는 날 신촌에서 생긴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방울방울 떠오르고
“비는 왜 「비를 피하는 방법」 같은 노래는 내지 않았을까. 나왔으면 히트 쳤을 텐데.”
“자기 자신을 피할 순 없잖아.”
“그러네.”
실없는 농담 주고 받기
* 메박: 영화관 메가박스를 의미한다. 화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줄임말.
.
.
.
비 오는 날이 좋아
빗소리가 우리의 노랫소리를 온전히 우리만의 것으로 만들어 줄 것 같아서
같은 우산 아래 나눈 얘기는 우리만의 이야기일 것만 같아서
빗속에 고립된 우리
우산 아래 우뚝 서서 하나의 섬을 만든다
동시에 여기저기 표류해
가닿는 곳
듬성듬성 움푹 패인 길 위에 생긴 물웅덩이
평소에는 직선으로 주욱 걷던 길
물웅덩이 피해 요리조리 지그재그로 걷다 보면
평소보다 곱절의 시간이 더 걸려
그렇지만 썩 나쁘지만은 않아
함께 있는 시간도 곱절
그리고
물과 풀과 흙의 냄새
아스팔트 사이에 돋아난 잡초들
윤기가 반들반들
생명력을 얻은 듯 평소보다 더 푸릇푸릇한 자태를 뽐내
고개 숙여 낮게 내려와 우산을 스치는 초록 잎들도 사랑스러워
물웅덩이 위로 투명하게 비치는 세상
그리고 그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에 세상은
일그러지고, 제자리를 찾고, 일그러지고, 제자리를 찾고,
저마다의 파동을 가져
신촌의 사람들
저마다의 파동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
모두 각자 나름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우린 모두 꿈꾸는 자들
무거운 책가방을 등딱지처럼 메고 힘겹게 오르막길을 오르고
하교하는 길에 컵떡볶이 하나 사들고 친구들과 수다 떨고
몇십 년 뒤의 나는 무얼 하고 있을까 빈 공책에 미래를 그려보고
곰팡이로 뒤덮여 퀴퀴한 냄새 풍기는 동방에 모여 다 같이 청춘을 노래하고
각자 악기 들고 합주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평소보다 통통 튀고
점심 시간에 동료들과 맛있는 음식 먹으며 짜증나는 직장 상사 얘기로 눈살 한번 찌푸려주고
산책하는 강아지들과 눈 맞추며 여유롭게 경의선 숲길을 거닐고
벤치에 앉아 전화 너머의 친구와 고민을 나누고
신촌역 앞에 파는 형형색색의 꽃들 보며 행복한 마음 충전하고
나는 요즘 이런 생각을 해
비 오는 날
내 세상이 비에 푹 젖어 조금이라도 울적한 마음 들지라도
그 안에도 행복은 있어
그 밖에도 행복은 있어
오랜만에 힘 준 머리가 맥없이 가라앉고
곱슬머리 친구의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곱슬곱슬 제 세상인 양 자신을 뽐내고
하하! 그 모습에 웃음 터뜨리고
“곱슬인 줄 몰랐어.”
“매직으로 편 거야. 다시 미용실 갈 때 됐다.”
몰랐던 친구의 사랑스러운 점을 우연히 알게 되고
서대문 버스 타고 살짝 열린 창 틈으로 들어오는 조금은 서늘한 바람 만끽하기
홍익문고에서 책 한 권 사서 빗방울이 창문 두드리는 소리를 벗 삼아 읽기
사색가라도 된 양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창 너머의 축축하고 분주한 세상 바라보기
그깟 옷 젖는 게 대수랴 따릉이 타고 시원한 공기 가르며 달리기
비가 개고
아직 마르지 않은 땅을 밟으며 생각해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이것이 우리가 사랑하는 방식
.
.
.

좋아하는 우산 쓰고 경의선 숲길 걷기
비가 오면 세상이 더 푸르러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세상이 궁금한 듯 고개를 쭉 내밀고 아래로 내려와 우산을 스치는 초록 잎들
사랑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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