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투압
1.
소크라테스, 혹은 역사에서 영광과 광휘에 휩싸인 것으로 묘사되는 위대한 위인들의 밤이 딱 어제 같았다. 그러니까 흔히 우리 같은 동양인은 어려서부터 삼국지를 읽고 자라지 않았는가.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호걸들은 본인의 비범함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불가사의한 주량으로 뽐내곤 한다. 거기서는 다들 그런다. 물론 고주망태 취한 장비가 어이없게 죽기는 했지만, 호걸이라고 꼭 죽는 순간까지 영웅일 필요는 없다. 옳음으로부터 크게 벗어난 고정관념을 심어 주는 소설들을 읽고 자라난 새 나라의 어린이들이 커서는 “놀자 대학생”이 되어버린다고 아버지가 일갈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에게 플라톤의 <향연>을 읽어 보면, 소크라테스 또한 모두가 취했을 때 본인만 말짱한 상태로 한때 명석했던 취객들을 혓바닥으로 쥐어패고는 유유히 사라진다고 말했다. 밑 빠진 독처럼 들이붓고도 취하지 않음은 지역과 시대를 막론하고 좋은 것이라고 말이다.
아! 누군가는 빛나는 어젯밤의 나를 기록했어야 했다! 무엇이라도 쓸만한 것을 찾아 헤매는 젊은 예술가들이 이 일대에는 차고 넘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척 애석하게도, 내가 여태껏 이룬 것이 없이 미천하여 아쉽게도 직접 글을 남긴다. 나는 사실 술을 썩 잘 먹는다고 꺼드럭대고 다닐 수는 없는 아쉬운 부류의 인간이다. 유전은 배꼽을 달고 태어난 우리 모두가 짊어지는 원죄 같은 것이어서 어쩔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무리에 소속되려고 애쓰는 쥐새끼처럼 신촌의 어두운 밤거리를 배회하는 이유는 순전히 순수한 까닭이다. 정말이지 나는 진짜 대화가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
갑순이가 “오늘 점심 뭐 먹었어?”하고 물으면
“맨도롱에서 그냥 때웠어. 거기 고기국수 곱빼기로 해도 무료잖아.”라고 갑돌이가 답하는.
그런 식의 정보를 전달하는, 말라비틀어진 북어에 비견될 법한 표면적 발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곧 찾아올 봄에, 연세대학교의 몇 없는 벚꽃을 찾아 날개에 땀나도록 휘젓고 다니는 꿀벌들도 그 정도는 능히 해낸다. 하지만 사실이 정말로 그러한지 누가 알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갑돌이는 내심 부끄러웠을 수도 있다. 말하자면 갑순이는 지갑이 남부럽지 않게 두툼하여 온갖 세련된 먹거리를 푸지게 섭렵하고 다니는데, 갑돌이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올리버 트위스트적인 인물상이라 오랜만에 학식에서 벗어나 맨도롱에서 값비싼 독자적 특식을 즐겼던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그가 사실 예전에 탐라국이라고 부르던 유서 깊은 섬나라 출신이라 오랜만에 고향 음식을 향유하면서 추억에 좀 젖어 보려고 하였으나, 맨도롱 식당의 평이 썩 시원찮은 것을 알고 저렴한 가격을 핑계 대며 은밀한 취향을 묻어두려 했을 수도 있다. 요는, 사실 우리는 전혀 소통하고 있지 않다는 거다. 자신의 진의를 품속에 감추는 고약한 의도가 배제되더라도, 인간이라는 고능한 생물은 각 개념에 워낙 고유한 사유를 연결 짓는지라, 의지 있는 자가 깊게 탐구해 보면 실상 우리는 같은 단어를 말하고 전혀 다른 개념을 상대에게 던져 버리는 셈이다.
절망적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여러분도 그렇게 느꼈으면 한다. 뭐 그렇게 느끼지 않더라도 내가 방금 펴낸 논증을 강화하는 꼴이 되어 버리니 아무래도 좋다. 아무튼 나는 진실로 사실임이 명백한 이 명제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에 계속 술을 퍼댔다. 뇌에 아로박힌 주름들이 촉촉이 알코올에 젖어 펴지면서, 우리가 조금 더 저능해지면 개념과 대상이 일치되며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했다. 지금까지는 <어린 왕자>의 주정뱅이처럼 목적과 수단이 꼬리를 물고 순환하는 고역을 치렀지만, 어제는 달랐다. 놀랍게도 내가 취한 만큼 내 정면, 혹은 우측 좌측에 있던 상대도 취하더란 말이다. 또 역으로 그들이 명료한 만큼 나도 손쉽게 정신을 일으켜 세웠다. 고향의 부드러운 갈매기살이 채 동나기 전에 엉망으로 꼬인 혀로 겨우 귀가를 외치던 내가, 무려 꿈에 그리던 3차까지 도달한 것이다. 퍽 기쁜 날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오늘의 상태도 양호하다. 어쩌면 내가 숙취해소제를 들이붓고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2.
무엇이 사실이라고 해서 그것을 꼭 사랑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한다. 요즈음 그러하다. 물론 그럴 수 있다면 참 흥겨울 것이다. 예를 들어, 신촌 블루스의 멤버였던 김현식은 간이 말 그대로 박살이 나고도 술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에는 죽었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의 간이 미끈한 지방으로 변하는 것도 긍정하지 않으며, 그러다가 그만 요절해 버리는 것은 무척 싫어한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 거리의 공기를 양분 삼아 불렀던 그의 노래를 듣기 힘들어했다는 거다.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것이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A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눈에 씨알 굵은 소금을 뿌려도 유일하게 공공연한 공적 배출이 허락된 체액 분비 없이 <내 사랑 내곁에>를 들을 수 있는, 그런 위인이었다. 심지어 그놈은 그 노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까지 말했다. 거짓이 과연 중죄라면, 나는 그를 위해서 지옥의 가장 뜨거운 구간이 손수 마련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발언이 조금의 오해를 살 수 있다는 것을, 혹은 나에 대한 여러분의 관대한 평가에 알게 모르게 흠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분은 내가 어떠한 명제를 상정하고 있는지 다시금 기억해야만 한다. 무엇이 예정된 사실인 경우에도, 그것을 꼭 사랑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애초에 찜질방에조차 취미를 붙이지 못하는 사람인데, 그것의 원형에 해당하는 신화적 장소에는 죽어도 가고 싶지 않다. 문제는, 어젯밤 내가 A의 생각에 예상된 원초적 거북함을 느끼지 못했다는 거다. 여기서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이 있음이 분명한데, 아마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 예상된다. A와 나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해서 천착하느라고 실낱같이 많은 날들을 허비했다. 어째서 결론이 나지 않는 주제에 관한 아둔한 대화를 중지하지 않느냐고, 날카로운 질문을 날릴 수도 있겠다. 명석한 독자를 칭찬하는 것이 나의 의무임은 자명하지만, 나는 의문을 질문으로 무마하는 무례를 범할 수밖에 없다. 당신은 낡디낡은 친구와 낡은 대화를 나눈 적이 없는가? 식탁에 낯익은 푸른 병이 쌓여가는 경우를 상상해 보란 말이다.
실상 타인과의 대화는 책을 읽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비록 흔한 경우는 아니어도, 시간에 따라 성장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를 읽는 것이 가끔은 새로울 수도 있다는 점이 근소한 우위를 점하는 근거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A와 나는 항상 같은 장소에서 만난다. 그리고 우리는 노포마냥 불변함을 미덕으로 안다. 고맙게도 우리와 닮은 가치를 추구하는 연희노가리의 생맥주는 근사한 청량감을 자랑하지만, 사실 한국 맥주가 흔히 그러하듯 납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한국이 사실 칵테일 강국이라는, 알 사람은 아는, 말하자면 은폐와 비-은폐의 경계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사실이 그 까닭이다. 정신과 미뢰가 모두 소주로 인해 무지막지한 득을 본다는 이야기는 적어도 우리에겐 놀라운 정보가 아니다. 두껍고 얇은 빈 병들이 쌓여 가면서, 익숙한 노래들은 켜켜이 대화에 흥을 더한다. 그러다가 쿨의 <애상>이 흘러나오면, 우리는 장례식의 조문객처럼 일상을 멈추고 노래를 불렀다.
꺼먹귀인 나와 A의 힘찬 선율은 일종의 평화적 선전 포고다. 왜냐하면, 수련회에 방문한 고등학생들의 정신 상태를 능숙하게 조율하는 노련한 조교처럼, 곧 김현식 씨의 다 죽어가는 걸걸한 목소리가 모닥불의 불씨와도 같이 조용히 허공을 붉히기 때문이다. 방학이 되면 신촌이 고요히 잠에 드는 것처럼, 두 노래의 시간적 연속성은 거의 인과적이다. 그런데 마침내 찾아온 친숙한 경험 앞에서, 나는 울지 않았고 A는 울었다. 그리고 A는 울지 않고 나는 운다.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과정은, 기술하자면 그 네덜란드 아이의 경우와 같았다. 알다시피 네덜란드는 국토가 해수면보다 다분히 낮은, 그러니까 인간의 지혜가 손톱만큼만 부족했더라도 영락없이 두 번째 아틀란티스가 되었을 나라다. 그런 불운한 지형에서 한 소년은 뚝에 구멍이 뚫려 있음을 명민한 관찰력으로 파악해 냈다. 그는 매년 붉고도 터무니없이 과체중인 노인에게 의심의 여지 없이 선물을 받기를 기대하는 어린아이처럼, 공동체의 뛰어난 일꾼이 되기를 소망했기에, 상황을 직접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내 기억에 그는 한스였다. 처음에 한스는 그 조막만 한 재앙을 검지 손가락 하나로 능히 제압해 냈다. 검지는 손바닥으로, 손바닥은 팔 전체로, 마침내 한스는 몸 전체를 사용해야만 세찬 물줄기를 막아낼 수 있었다. 유럽이 맥주의 풍부한 풍미에 시간을 쏟는 대신에, 믿을 만한 도시공학적 탐구에 몰두했다면 한스와 내가 모두 만족했을 것이다. 유럽에 소주가 없다는 사실이 절실히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사이의 한스가 돌연 휴가를 선언해 버렸기 때문이다.
A가 언젠가 뇌가 빠져 버렸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에게 뇌가 아니라 나사가 빠진 거라고 말했다. 조물주는 뒤틀린 유머 감각을 지닌 것이 분명하다. A에게는 뇌가 없어지는 경험을 부여하더니만 기어코 나에게는 추가적 뇌를, 그러니까 잇몸으로도 씹어 삼킬 수 있을 만큼 알코올로 연육화된 A의 뇌를, 덤으로 부여했던 것이다. 나는 돌연 신촌이 집이 아니라고 느-꼈다. 분명 신촌은 집이었고, 집이기에 언제나 돌아가서 쉴 수 있는 곳이었다. 그에 대한 불쾌하지만 생경하지는 않은 새로운 정의가 머릿속에서 부유했다. 신촌은 거쳐 가는 장소라고. 김현식 또한 모종의 이유로 신촌 블루스에서 나가 버렸다. 그는 오히려 신촌을 벗어난 뒤에야 대성한, 변변치 못한 비유를 대 보자면
“야 그 선배 요즘 대기업 입사해서 분당에서 떵떵거린대.”
하는 식의 삶을 꾸렸다. 그러니까 A의 사고 아래서 우리의 이 빌어먹을 동네는 “향하는 집”이 아니었던 거고, A의 김현식은 신촌이 아니라 그만의 독자적 분당을 “낯설고 멀게” 느꼈던 거다. 흔히 천당 밑에 분당이라고들 하던데, 이는 예외적으로 사실이면서 내가 인정해 마지않는 명제가 되겠다. 나는 천당만큼 분당에 문외한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동네에 대한 푸념으로 내게 눈물이 흐를 터가 있나. 알다시피 A는 닭똥보다는 작은 방울을 훔쳤다. 그의 눈물이 시원찮지 않을 것처럼 나의 무정함도 시원하지 않았다. 한스가 사라진 이후로 논쟁은커녕 대화도 필요하지 않았다. 책장에 지문이 새겨질 때까지, 몇 번이고 읽던 책이 도서관에서 사라졌음을 깨달은 노인처럼. A와 나는 예정보다 조금은 이르게, 조금은 늙어서 그곳을 떠났다.
3.
대관절 우리가 타인과의 순차적 독백이라는 수고스러운 고행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것이 단순한 견해의 획득이라면, 의견의 불일치에 수반되는 아쉬움, 실망, 불쾌감, 분노, 혹은 고통을 유려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어떠한 모종의 통일감과 일치감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대화는 고독의 부산물이다.
목적이 상정된 행위는 그 특정 목적이 충족되는 순간 존재의 당위성을 상실한다. 나는 그래서 더 이상 그 누구와도 만나거나 말하지 않는다. 그저 내 침대가 딱 붙어 있는, 오른쪽 회벽에 최대한 밀접하게 붙어 누워 있을 뿐이다. 낡은 어항에 가득 찬 푸른 이끼를 필사적으로 제거하려는 빨판 물고기처럼, 나는 벽에 흡착한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508호가 있다. 나는 507호의 침대에 누워서 508호 또한
그러하다고 믿는다. 혹여나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따스한 마음씨로 나의 나태를 호되게 비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러분의 박애주의는 조금 더 긴급한 일을 위해 필요할 것이 분명하다. 나와 침대, 그리고 507-508 벽 사이의 삼각관계는 나태함보다는 오히려 엄격한 근면성의 결과물이니 말이다. 이 모든 것은 대화가 발생한 연유를 근본적으로, 그리고 완벽하게 온전한 삶의 영역에서 몰아내기 위한 단호한 결단일 따름이다. 나는 불편하게, 그러니까 육체적으로 안락하지만, 마음만은 불편하게 누운 채로 한스가 그만 포기해 버리기를 기다린다. 녀석은 어린아이다운 산만함으로 오래지 않아 직무를 유기한다. 그리고 나는 508호의 관념이 물리적 장애물을 단박에 무시하고 정신적 우위를 점거하는 그 쾌거에 동참한다. 508호의 생각이 흘러
들어온다. 예컨대, 나는 더러움을 다분히 고리타분한 방식으로 정의했었다. 더러움이란 장소를 이탈한 사물들이 획득하는 성질이라고. 신촌에 즐비한 술집 거리에서 아쉽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담배꽁초들이 종속될 곳은 흡연자의 퍽퍽한 입술 혹은 쓰레기통 외에는 없다고 말이다.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벽에서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더러움은 그저 마음먹기 나름이다. 그것은 본질보다는 감정에 매달린 판결이다. 오감에 따라 뇌로 전달되는 신호가 ‘호!’로 결의되면 문제없는 것이고, ‘오…’로 판단되면 척결해야 하는 것이다. 508과 나의 정의가 합의점을 찾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내 방이 너저분해진 만큼 508은 깨끗해졌으리라. 나는 이제 목적이 충족된 꽁초를 거리낌 없이 튕기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마치 손가락을 떠난
역겨운 흡연 잔재물이 의지와 무관하게 낙하하는 것처럼, 508호와 나의 정신적 융합은 의지와 무관한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물리적 거리에 좌우되는 축복이다. 때문에 내가 그와 가장 일체감을 느끼는 시점은 일어난 직후에 해당한다. 인간이 그 어떤 방식으로 발악하더라도 해와 달의 움직임은 바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의식적 유희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 의식은 충실하게 나와 그를 연결한다. 자고 있는 동안 충전기에 접합한 연락기기와 매한가지다. 충분한 휴식에 대한 상쾌함과 새롭게 정립된 중용적 의견에 조금 어지러운 아침을 맞이한다. 하지만 아침은 늘 어지럽지 않았는가? 정든 집을 떠나서 막 이곳에 도달했던 아침을 떠올려 보잔 말이다. 익숙하지 않은 천장을 마주하는 경험은 혼란과 설렘을 동반하는 특별한 현상이다. 결국 여러분이 점차 낯선 천장에 익숙해진 것처럼
나는 508의 사고에 익숙해져 간다. 나의 아침이 익숙해진 것만큼 508도 평안한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그 또한 방을 벗어나는 빈도가 줄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참인 사실이며 내가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참인 사실이다. 나는 흙 사이의 알갱이들이 더 이상 수분을 수용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 그것을 기꺼이 빨아들이는 바오밥나무의 억센 뿌리를 생각한다. 대지가 바람 사이로 흩어질 만큼 척박한 경우에는 기꺼이 눈물을 흘려보내는 바오밥나무의 두꺼운 몸통을 생각한다. 그리고는 바오밥나무는 도대체 언제쯤 쉴 수 있는지 가늠해 본다. 아마 508은 그 나무가 불쌍하다고 여길 것이고, 나도 그러하기에 우리에게 바오밥나무는 불쌍한 나무가 된다. 나는 이제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화되었다.
4.
두툼한 살집만큼 넉살이 좋아 보이는 집주인은 나에게 507호와 508호를 보여줬다. 창문을 열고 환기하고 있었다. 모두 최근에 나간 훌륭한 방이라고 했다. 그 중 하나에, 아직 치우지 못한 종이들이 나부꼈다.
미쳤다…
분명 나는 글을 읽었을 뿐인데 왜 소주를 마신것 마냥 얼굴의 모세혈관들 속 적혈구들이 들꿇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