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역사
진실의 창구
또한 이 마음의 빚은, 그 당시 민중들이 신촌에 걸던 희망을 저버렸다는 일종의 죄의식에서 온다. 그렇다면 당시 신촌이 가지던 상징성은 무엇이었나?
1910년대까지의 신촌은 개발 전 단계로, 희박한 인구를 가진진 고요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연희전문, 이화학당(현 연세대, 이화여대)의 설립과 1930년 교외 순환선의 개통으로 신촌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했다. 이후 신촌은 저항운동의 근거지로서, 진실의 창구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1919년 일제강점기 당시 연희 전문에 재학 중이었던 김원벽, 정석해, 이병주는 만세운동을 이끌었고, 주현측, 신창희, 곽병규, 정영준, 김창세, 신현창 등 세브란스 출신 의사들은 해외에서 본업을 유지하며 독립운동 활동 자금을 마련하는 등 독립운동가로도 활약했다. 또한 정종명, 이정숙 등 세브란스 간호부는 전문직 여성이자 지식인으로서 항일운동과 여성운동에 헌신했다. (출처 연희춘추)
일제강점기 이후 1970년 계엄 시대에도 이화여자대학교에서는 1973년 데모 주도자의 가족이었던 학생이 경찰 조사 도중 받은 성적 모욕으로 시작된 10.12 검은 리본 시위와 11.28 가두시위가 일어났다. 1975년에는 군사 독재 반대 시위에 나갔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약 100명의 언론인을 재정적으로 돕기 위한 손수건 제작, 판매가 이루어졌다. (출처 이대학보)
이 당시 신촌은 침묵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로 가득 찬 저항의 최전선이였다.
.. 대통령의 사망으로 국민들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를 품었다. 1980년 초 ‘서울의 봄’이었다. 전국의 대학생들은 학생회를 부활시키고자 움직였다. 그리고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전국의 주요대학들이 학생회를 구성하고 학원민주화투쟁을 벌였다. (중략) 신군부는 신민당이 ‘비상계엄해제촉구 결의안’ 등을 제출하는 등 계엄이 해제될 위기감을 느끼자 무력을 통한 정면돌파를 꾀했다. 이들은 먼저 17일 오후 이화여대에서 열리는 전국학생회장단모임을 급습해 전국 55개 대학 학생대표 95명을 연행했다. (출처 폴리뉴스)
계엄군에 맞서 광주를 탈출한 윤기현 씨의 증언을 알리기 위해 김종태 열사가 향했던 곳이 이대 앞 사거리였다는 사실도, 신촌이 가졌던 공간성과 맞닿아 있다. 각종 불의를 자신의 일처럼 나섰던 수많은 청춘들. 그들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자신과 자신의 친구, 그리고 광주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촌은 그 믿음에 침묵하지 않았다. 정부가 앗아간 광주의 5월, 민주주의의 5월을 되찾으려 끊임없이 저항했다. 그로부터 약 7년 뒤, 전 전 대통령 정권이 민중의 저항 앞에 항복했지만, 그는 10년도 채 되지 않는 징역형을 살고 사면되었다. 사면 이후에도 5.18에 대한 일말의 반성과 사과의 말도 없이,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진실을 왜곡하고 유가족들을 모욕했다.
신촌은 피해자들과 함께 침묵하지 않았다. 하지만 피해자들을 모욕하고 역사를 왜곡한 채 살아간 그의 공간이, 피해자들이 진실과 희망을 향해 울부짖었던 신촌과 멀지 않았다는 사실이 죄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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