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 아이가 될 수 없는 아이와 아이를 꿈꾸는 어른
아이가 되고 싶다. 요즘 숨을 쉬듯 드는 생각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두 손에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로, 하고 싶은 것도 꿈도 많았다. 국어시간에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고, 과학시간에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는데, 음악시간에는 피아니스트도 꽤 괜찮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것이 속상했지만 멋진 나의 모습이 하루 빨리 보고 싶어 어른이 되기를 꿈꾸던 날들이 있었다. 그랬던 내가 나의 가능성들을 하나씩 내어주며 마침내 자그마한 가능성을 손에 쥔 채 어른이 되었다. 누군가의 눈에 들기 위해 나의 작은 가능성을 숨기고 마치 커다란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부풀릴 때, 그때부터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정말 아이가 되고 싶다.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는 당장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은데, 모두 어른이 되었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책임질 일이 더 많아질 내일이 무서웠다. 또 습관처럼, 몇 번째일지 모를 아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릴 때 놀던 놀이터에라도 가지 않으면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해야 할 일을 모두 제쳐 둔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놀이터를 찾아 나섰다. 신촌을 헤매다가 봉원사로 올라가는 언덕에까지 이르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촌을 번화가로만 알고 있지만, 번화가를 조금만 벗어나면 ‘봉원사’라는 절이 있다. 물론 나도 가본 적은 없었으나 놀이터를 찾기 위해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고, 끝이 없어 보이는 언덕에 대한 좌절감과 내가 괜한 짓을 하고 있나 라는 생각이 뒤섞일 무렵 가까스로 놀이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놀이터는 적막했다. 평소에는 아이들이 많아 놀이터를 구경만 하던 내게도 드디어 미끄럼틀을 타 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이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주변을 좀 둘러봐!!”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이 때의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른 채 해맑게 미끄럼틀로 뛰어 올라갔다. 당연히 아무도 없을 것이라 믿고 있기도 했다. 두 손까지 들고 소리를 지르며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온 순간, 저만치 서있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기에는 난 너무 신나게 미끄럼틀을 타버렸고, 놀이터는 조용했고, 아이는 날 매우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사실 그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가만히 앉아서 쉬고 있는데 웬 어른이 갑자기 나타나 온갖 요란을 떨며 미끄럼틀을 탄 것이니 당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0시간 같았던 10초가 흐른 후 적막을 깨고 나온 내 첫마디는 “안녕?”이었다. 그렇게 아이와의 대화가 얼떨결에 시작되었다.

안녕?
어른이 미끄럼틀을 왜 타요?
어릴 때 생각이 나서…넌 좋겠다. 미끄럼틀도 마음껏 탈 수 있고.
미끄럼틀은 애들이나 타는거죠. 전 안타요.
그럼 넌 뭐하고 놀아?
게임해요. 근데 3학년부터는 공부해야 한다고 하셔서 이제는 잘 못해요.
공부를 벌써 해? 아직 초등학생인데?
어머니가 3학년부터는 입시를 준비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제 친구들도 다 학원 다녀요. 저는 수학이랑 영어 학원, 논술 학원 다녀요. 아 줄넘기 학원도 다녀요.
학원을 그렇게 많이 다녀? 다 다닐 시간이 있어? 줄넘기 학원은 뭐야?
(줄넘기 학원은) 키 커야 한다고 다니라고 하셨어요. 학원은 어머니가 데려다 주시고요. 학교 끝나면 간식 먹고 바로 가는데 요즘은 학교를 안가서 집에서 강의 듣고 숙제 하다가 가요.
아 너희도 온라인 강의 하겠구나. 강의는 어때?
재미없어요. 학교 가서 친구들이랑 놀고 싶어요. 집에 있으니까 혼자 숙제만 해야 해서 짜증나요.
계속 숙제하고 학원만 가고 있는거야?
네. 숙제는 어머니가 검사하셔서 꼭 해야 해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이게 다 제 미래를 위한 일인데요.
미래에 뭐가 되고 싶은데?
판사나 검사요. 원래는 야구 선수나 웹툰 작가가 되고 싶었는데 어머니가 예체능은 돈을 못 번다고 안된다고 하셨거든요. 판사나 검사는 돈을 잘 번대요. 전 돈 모아서 서울에 큰 집도 살거고, 나중에 자식들한테 손 벌리지도 않을거에요. 하긴 요즘 세상에 그게 쉽진 않죠. 누나는요?
나? 난 아직 구체적인건 없는데. 일단 지금은 하고 싶은거 이것저것 다 해볼거야.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어떻게 살아요. 다들 하고 싶은 거 많은데 꾹 참고 사는 거랬어요. 그래야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고요. 저도 사실 지금 하고 싶은 거 엄청 많거든요. 근데 안 해요.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서요.
난 오히려 지금 하고 싶은 것을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은데. 다 때가 있는거야. 나이 들면 정말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너가 뭐가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아니면 못할 것 같다 싶으면 그냥 해. 너가 나보다 더 어른 같으면 어째.
그러니까요. 사는 게 힘드네요. 매일 고민하는데도 잘 모르겠어요. 해야 할 일이 많은데 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고. 유치원 다닐 때가 좋았는데. 그땐 뭘 하지 않아도 괜찮았거든요.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제가 할아버지가 돼도 인생은 참 어려울 것 같아요. 여긴 머리가 복잡해서 잠깐 온 거에요. 전 숙제하러 갑니다.

훌륭한 어른이 되고 싶어 아이가 될 수 없는 한 아이가 자신의 등보다 큰 가방을 매고는 멀어져 갔다. 훌륭한 어른이 되지 못해 아이를 꿈꾸는 그저 그런 어른은 미끄럼틀 위에 누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이와 저 커다란 가방, 그리고 나와 이 알록달록한 놀이터 중 누가 더 어울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생각이, 또 아이의 부모님 생각이 틀렸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이 세상에 적합한 길을 아이는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다양한 색깔의 꿈을 품은 채 행복한 고민들 속에서 살아갈 수도 있었다. 또한 조금은 느리더라도 자신이 쥐고 있는 꿈을 놓지 않으려 길을 개척해 나갈 수도 있었다. 그 길은 분명 그만의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세상에게 아이들을 빼앗긴 놀이터는 적막했다.놀이터의 벽면에는 아이들이 그린 꿈과 놀이터의 모습들이 가득했지만, 놀이터 그 어디에도 아이들은 없었다. 나는 다양한 꿈을 다시 한 번 품에 안아보고 싶어 아이가 되기를 꿈꿨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도 이 세상은 벅차고, 원하는 꿈을 가질 자유가 없으며,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되기를 꿈꾸는 순간들이 있다. 그러니 나는 아이가 되기를 바라기보다는 무채색인 내 세상에 여러 색깔을 칠해보며,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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