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 우리는 겐로쿠우동(이었던 것)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학부생활을 십 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진짜 대단하고 위엄 있어. 그러다보니 그와 얘기할 땐 종종 몇 년 전 사건들이 많이 회자되었는데, 그 속엔 아기고학번과 조상고학번들이 늘 섞여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의 young한 옷 스타일이나 초롱한 피부, 인권감수성 등을 고려하면 그의 나이는 종잡을 수 없었다. 정확한 나이를 물어본 적은 없었다. 왠지 나도 멋없어지고 그도 멋없어지고 그럴 것 같아서 마음 편하게 많아봐야 마흔 아래겠지 지레짐작하곤 했다.
그만큼 그는 오래된 신촌 붙박이였다. 아마 내가 집합과 명제를 배우기 시작할 즈음부터 신촌이 변하는 모습을 보아 왔으리라. 십 년을 살았으니 숨만 쉬고 있어도 이런저런 기억과 추억들이 많이 쌓였을 법한데, 그의 신촌에 대한 애정은 유독 깊어 보였다. 함께 신촌을 걷고 있으면 삼 년 전엔 이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 저 가게가 옛날엔 어떤 메뉴를 팔았는지 등을 자주 얘기해주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신촌을 걷다 새로운 가게가 입점을 위해 어딘가 공사 중인 모습을 보면 그가 종종 생각나고, 누군가에게 그 장소의 변천사를 신나서 설명해주는 오 년 십 년 뒤 나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그를 어떤 사람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일단 확실히 기묘한 사람이었다. 만날 때마다 포켓몬이 그려진 옷을 입고 있었고 실수로 왼발과 오른발에 서로 다른 신발을 신고 나온 적이 있었으며 음악 전공에 철학과 복수전공을 감행하였다. 또 언제나 artistic한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간단한 배경음악 제작부터 의도를 알 수 없는 기괴한 프로젝트나 제목이 길쭉한 연극 등등이 바로 그것이다. 사이비종교와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그가 연출한 연극을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고, 독립영화에 출연한 그가 선배에게 매콤한 말들을 쏘아붙이는 후배 역을 눈부시게 해내는 것을 보고 감탄한 적도 있다. 내가 본 그의 창작들은 모두 불쾌하게 질척이지 않고 예상치 못한 웃음들을 자아내어 보는 맛이 있었다. 그는 실제로 ‘예술을 업으로 삼는 사람’인 것 같았지만, 그는 ‘예술’ 혹은 ‘예술가’라는 단어만 들으면 오그라들어서 치를 떨거나 박장대소하는 성향인지라 우리는 늘 되도록이면 그런 자의식적인 단어들은 피해 가며 얘기를 나누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주인공을 소개합니다, 신촌의 붙박이‘예술가‘ 김하민.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저는 김하민입니다. 다양한 형태로 창작을 하며 지내는 나부랭이입니다. 퍼포먼스나 전시, 연극 같은 것들을 종종 했고 음악활동은 꾸준히 하고는 있어요. 강원도 철원 출신이고 상경한지 꽤 되었습니다.
신촌에 대한 첫인상을 말해주시겠어요?
신촌에 대한 인상을 얘기하려면 먼저 서울에 대한 얘기를 해야 돼요. 제가 강원도 철원 출신이라 하면 사람들이 되게 시골 아니냐고 궁금해 하는데, 실제로 시골입니다. 지금이야 이디야도 생겼지만, 어렸을 땐 드물게 소 키우는 집도 있었고 학이랑 독수리는 지금도 날아다니는 곳이거든요. 근데 유아였을 때부터 지병이 하나 있어서 정기적으로 서울에 있는 병원을 다니게 되었어요. 그 무렵 갔던 서울은 너무너무 신기한 곳이었어요. 티비에서나 보던 맥도날드가 아무렇지 않게 여기저기 있고. 지하철역은 너무 신기하고, 특히 충무로역에 있는 크고 길다란 에스컬레이터가 너무 재미있어서 놀이기구 타듯이 세 번은 탔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한참 뒤 고등학교 때부터는 진로를 음악 쪽으로 정했기 때문에 입시를 위해 주말마다 왕복 8시간 걸려서 서울에 왔다 갔다 했는데, 그 때도 여전히 서울에서만 볼 수 있는 새로운 문물들이 정말 많아서 재밌었어요. 도어락이라든가 교통카드라든가. 그래서 자연스럽게 서울에 대한 동경이 있었어요.
그렇게 재수를 마친 후에 신촌에서 방을 구하러 다니는데, 막상 서울에 진짜로 산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두근거리는 거예요. 신촌은 제게 두근거림 그 자체였어요. 삭막함과 설렘과 두려움과 호기심, 온갖 다양한 모양의 감정들이 수렴된. 그리고 고향하고 다르게 밤에도 너무 밝아서 집에 갈 때 하나도 안 무서워서 좋았어요. 무엇보다 대학생활이 제 인생에서 제일 영향이 커서 그런지, 그 시간을 보낸 곳이 바로 신촌이어서 애착이 깊어요. 그 애착을 새삼 확인했던 계기가 작년 2월에 있었어요. 그 무렵 처음으로 신촌-연희동 일대가 아닌 망원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엄청 슬플 줄 알았는데 막상 이사를 가고나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거예요. 급하게 간 이사여서 5년간 살았던 자취방에 대한 애도작업을 할 시간이 없었거든요. 분명 제 성격상 이렇게 어물쩡 넘어가면 정신적으로 큰 일이 생길 것 같은데, 워낙 겨를이 없어서 멀쩡했어요. 근데 아니나다를까 바로 그 날, 이사 도와준 친구들을 바래다 주고 방에서 쪽잠을 자다 저녁에 일어났는데, 무심코 화장실에 걸레 빨러 들어갔다가 갑자기 그 동안 막혀왔던 게 한꺼번에 터진 거예요. 이전 연희동 자취방의 시공간을 구성하던 사람들과 사물들, 그리고 모든 계기들이 5년치가 한꺼번에 몰려와 버려서 이틀 동안은 엉엉 울고, 친구한테 울면서 전화도 하고, 그 뒤로도 한동안 계속 우울했어요. 아, 내가 장소에 영향을 많이 받는구나 하고 깨달았죠. 안 그런 줄 알았는데. 그래서 주로 누구 만날 일 있을때 거의 신촌 일대에서 만나요. 뭔가 신촌은 체감상 대체된 고향 같아요. 옛날에는 명절마다 철원에 갈 때 고향 가는 기분이 들었는데, 언제부턴가 철원에서 신촌으로 왔을 때 오히려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 들게 되더라고요.
신촌 가게들은 이전하거나 폐업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중 가장 아쉬운 곳은 어딘가요?
단연코 ‘겐로쿠 우동’. 제 마음 속 1위입니다. 항상 소바를 먹으러 갔던 신촌 우동집이에요. 때는 2012년도 어느 겨울날, 옆 자취방 친구가 무심하게 데려간 식당이었는데 거기서 운명을 만난 거죠. 처음 간 날 냉우동을 먹어보고 나니 소바도 꼭 먹어 보고 싶었고, 그래서 다음에 또 가서 소바를 먹었는데 너무 맛있었습니다. 사실 ‘소바’라는 음식의 형식에 관심이 그 전부터 많았어요. 쪼잔한 그릇에 담긴 차가운 육수에 면을 적셔 먹는다는 것에 대한 동경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고향에 있는 일식집에서 먹은 소바는 별로 맛이 없었고, 공학원 지하 휴나지움(여기도 2017년도 12월인가에 문을 닫았네요)에서 팔던 모밀은 계절메뉴라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었어요. 그러던 중 만나게 된 겐로쿠는 그 날, 항상, 그 자리 그대로,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어요. 훈훈하고 근면해보이던 1대 사장님부터 자주 아프시던 5대 사장님까지, 겐로쿠를 하도 오랫동안 사랑하다보니 그 곳을 거쳐 간 사장님들이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아마 제 지인들은 저 때문에 여러 번 겐로쿠로 끌려갔을 거예요.
이외에도 사라져서 아쉬운 곳들이 정말 많은데, CGV에 통합되기 전의 아트레온, 그리고 세컨드플로어라는 술집과 헤븐즈도어라는 칵테일바 등등을 정말 좋아했어요. 그 밖에는, 음, 지금 생각나는 것들을 말하자면, 세기말 세기초 감성으로 꾸며진 지하밥집 ‘아침나무’, 제육덮밥이 그리운 ‘맛진’, 그리고 자주 가진 않았지만 ‘민들레영토’도 좀 그리워요. 카페베네 한창일 때보다도 훨씬 전에 유행하던 다방 컨셉의 카페인데, 공간도 넓고 이슬차라는 차랑 쪼끄만 컵라면도 팔았어요. 학생들이 과제하러 많이 갔던 곳이에요. 뭐가 없어지는 지도 모르는 새에 없어지는 것들이 많은 것 같아요. 말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죠.
학교에서 가장 좋아하던 장소를 꼽으라면 어딘가요?
청송대 뒤편에 있는 KVN 초장거리전파망원경입니다. 이름을 모를 때는 거대 접시라고 불렀어요. 사실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신촌 일대를 통틀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예요. 언제 처음 갔는지도 가물가물한데 2013년도 쯤이었습니다. 풀숲에 둘러싸인 그 거대한 접시를 봤을 때의 숭고함에 압도되었어요. 거대접시에 홀려서는 10분 넘게 목이 아픈 지도 모르게 계속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그게 커다란 굉음을 내며 이이잉 돌아가다가 갑자기 저를 딱 내려다보는 거예요. 그 때의 전율은 정말 최고였습니다. 만일 지구가 소행성 충돌로 멸망하고 한참 뒤에 생존자들이 원시인이 되어 문명을 재건하게 될 때, 이 거대 접시가 안 부서지고 잔류한다면 이게 신앙의 대상이 될 것 같아요.
여기와 함께 대강당 지붕도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장소예요. 올라가는 방법은 비밀이에요. 2013년도 4월쯤이었나, 어느 날 우연히 두 지인과 함께 처음 올라가게 되었어요. 한 아홉시쯤 되어가는 밤이었는데, 거기서 보는 풍경들이 너무 색달랐어요. 걸을 때마다 지붕이 들썩들썩거려서 언제 꺼질지 모르겠는 스릴도 짜릿했고요. 너무 좋아하는 곳이라 졸업사진도 여기서 찍었어요. 그래도 위험하니 절대 따라하지 마세요.
‘프로메테우스 동아리방’에 대해 ‘대학생활의 7할을 쏟은 곳’이라고 써주셨어요. 어떤 추억들이 깃든 곳인가요?
학교생활을 하며 많은 동아리들과 엮였는데, ‘프로메테우스’(연세대학교 중앙영화동아리)는 1) 자발적으로 가입해서 2) 충동적이지 않고 3) 즐겁게 시작한 유일한 동아리인 것 같아요. 영화 워낙 좋아해서 영화도 많이 보러 다니고,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가끔 방학마다 영화 제작도 하는데, 저는 음대였다보니 영화에 쓰일 음악도 만들고, 영화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동아리방에 사진이 아직 많은데, 얼마 전 까지만해도 이쪽 벽에 그동안 찍은 사진들이 가득 덮혀 있었어요. 근데 지금은 많이 떼어졌네요. 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요. 보존이 되어 있으면 좋을텐데. 아무튼 지금도 가장 많이 만나는 친구가 프로메테우스에서 만난 친구들, 그리고 바로 그 다음이 철학과, 그리고 한참 다음이 작곡과 순이에요.
오랫동안 신촌에 있으면서 크고 작은 창작활동들을 많이 한 것 같아요,
혹시 신촌과 관련되어 창작활동을 한 경험이 있나요?
‘신촌’ 하고 관련되었다기보다 신촌에서 경험한 일을 토대로 대본을 써 본적이 한 번 있어요. 어떻게 창작활동을 했었냐 같은 건 별로 재미가 없을테니 창작의 계기가 된 경험 얘기를 하는 게 낫겠어요. ‘도를 아십니까’ 이야기인데, 제가 신촌 일대에서 도를 아십니까들한테 엄청 잘 걸리거든요. 보통 도를 아십니까들은 만만해 보이는 사람들을 타겟으로 하잖아요. 근데 제가 마침 어렸을 때부터 한결같이 만만상이었거든요. 게다가 누가 저한테 말 걸면 잘 못 끊어버리는 성격도 한 몫 해서 많을 땐 하루에 3번 넘게 걸린 적도 있어요. 그러다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만 도를 아십니까들이랑 타임킬링하는 걸 좋아하는 악취미가 생겨버린 거예요.
때는 2014년도 쯤이었는데, 그 날도 어김없이 도를 아십니까를 마주쳤어요. 키가 크고 뭔가 인고의 세월이 느껴지는 아저씨였는데, 자꾸 끈질기게 포교를 해서 곤란하던 와중에, 당시 제가 하던 철학과 학회에서 친구가 ‘도를 아십니까들을 만났을 때 철학과라고 말하면 순순히 물러간다’는 말을 해 줬던 게 생각났거든요. 그래서 철학 공부를 한다고 했는데, 물러가기는 커녕 철학도 다 똑같다느니, 공자, 맹자, 노자 이런거 암만 공부해도 의미 없다면서 으름장을 놓는거예요. 그래서 제가 “서양철학이요ㅎ” 이랬더니 잠깐 당황하다가 바로 “서양철학도 똑같어요! 소크라테스! 데카르트! 하이데거!” 막 그러면서 지금 철학공부 할 때가 아니라 본인 몸이랑 마음에 안 좋은 기운들이 많이 쌓여있어서 그거 빨리 풀어내야된다고 우기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그사람 얼굴 가까이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면서 “저도 마음공부를 해서 기운이 좀 보이는데, 지금 여기쪽이 진짜 심각해요. 본인 기운부터 다스리셔야될 것 같아요.” 했더니 정말 당신이 불쌍하다면서 화내며 가시더라고요.
그런데 신기하게 일 년 후에 그 아저씨를 또 마주쳤어요. 비오는 날 홍익문고 앞이었죠. 이번엔 듀오였어요. 나이가 엄청 많아보이는 아주머니가 먼저 접근하더니 자기들은 수행하는 사람이라면서 제사를 지내자고 하고 있는데, 뭔가 이상한 기시감이 들어서 옆에 서있는 남자분을 봤더니 그때 그 철학포비아 아저씨인거예요. 보통 듀오들은 한명이 계속 호소력있게 플로우를 타고 나머지 한명은 끄떡거리면서 내적 맞장구 쳐주는 걸로 포지션을 잡거든요. 근데 그 아저씨는 제가 쉽사리 넘어가지 않고 있는 게 답답했던지 동료 아주머니 말을 끊고 전투적으로 설득을 하더라고요. 당연히 이해가 안 가는 지점이 많아서 이건 왜 그러냐, 저건 왜 그래야되냐 물어봤더니 나중엔 왜케 따지냐고 화를 내더라고요. 고집이 세다는 둥 어쩐다는 둥 조상에게 벌받는다고 슬슬 저주를 격하게 하길래 이쯤이다 싶어서 그 남자분한테 작년 얘기를 했어요.
그 포교남 : 아니,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야 될 거 아니예요! 잘 될 수 있는 법을 알려주는데도 본인이 자꾸 이유를 대면서…
하민 : 저는 그쪽이 로마라고 생각하지 않고요, 그보다 저를 언제 보신 적 없으세요?
그 포교남 : 야, 뭐, 근데.
하민 : 아뇨 반말하지 마시구요
그 포교남 : 싫어. 너보다 나이 많아.
하민 : 그래 알았어. 그럼 나도 반말할게. 너 저번에 막 소크라테스 어쩌구 저쩌구 그랬었잖아.
그 포교남 : (표정이 싹 변하고 헛웃음을 지으면서) 너였냐?
하민 : (폭소)
그 포교남 : ☆☆☆ ♧♧ 없네 이 ♡♡♡이. ♬♬고싶냐?
하민 : (아주머니에게) 이 사람 왜 이래요? 원래 이렇게 다혈질이예요?
그 포교남 : 어! 다혈질이야! 너같은 ♪♪♪는 아주 ♪♩♪♬(대충 격한 욕)
하민 : (계속 웃음 못참고) 이 사람 왜 이래요? 수행하는 사람 맞아요?
그 포교남 : 이 ♡♡♡이, 야, 꺼지라고.
하민 : 너가 가면 되잖아.
아주머니 : 그래, 우리가 갈게 갈게.
그 포교남 : ♡♡♡아 수행하는 사람을 ♂으로 보냐?
하민 : 왜? 너는 나를 혹시 ♂으로 봐?
그 포교남 : 어! 넌 ♂같애 이 ♡♡♡아.
하민 : 그럼 나도 인제 널 ♂으로 보는거야.
그 포교남 : 그래 고맙다 이 ♡♡♡아. 니덕분에 수행 ♧♧게 된다 이 ←↑→야.
하민 : 어, 그래… 화 내는 것 좀 고쳐.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알겠지?
그 포교남 : ♬♪♩♪♬(대충 비슷한 욕들)
그러고서 저도 갈 길 가버렸어요. 뒤쪽에서 계속 분해서 욕하는 소리가 들리긴 했어요. 길거리 포교꾼이 고성을 지르면서 욕을 하는 건 흔치 않잖아요. 그래서 너무 재밌고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욕도 되게 맛있게 먹었고, 나중엔 이런 경험들을 토대로 대본도 쓰고 그랬어요. 더 나중엔 영화로도 제작해보고 싶습니다.
꼭 재미있는 창작물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
앞으로의 바람 같은 것이 있나요? 창작과 관련되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아요!
저는 일단 꾸준히 창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거주하고 싶은 공간에 거주하고 싶고요. 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내가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들로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창작과 관련되어 지향점이나 신념이 있다면?
모든 창작은 뻥을 뻥이 아닌 것처럼 속이는 속임수라고 생각해요. 거짓을 진짜라고 믿게 하는 사기의 총론이자 기술이요. 그 속임수가 성공하려면 치열함이 굉장해야 하는데 동시에 장난기도 다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때 억지로 창작하려 하면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최대한 치열함과 최대한의 장난기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인지 모든 작품은 비극이든 희극이든, 마이너든 메이저든 에이토널이든 기본적으로는 웃기고 재밌어야 한다는 게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그리고 뭘 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 저에겐 중요해요. 세상이 나은 쪽으로 변화할 거란 희망을 일단은 버려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포착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가끔 세상이 뭔가 바뀌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는데 그건 일종의 착시현상 같은 거고, 크게 보면 결국은 안 바뀐다, 그리고 우리는 무력하다는 것. 그러면 우리는 우리를 우리답게 지키기 위해 뭘 할 수 있는가. 전 그걸 비웃음이라는 행위에서 찾는 것 같아요. 비웃음은 저의 중요한 정서예요. 어차피 세상은 바뀌지 않으니 있는 힘껏 비웃어서 자아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조소, 조롱, 비꼬는 마음 같은 것들이야말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윤곽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내가 당신의 나쁨을 비웃는 것은 당신이 좋게 바뀌길 바라서가 아니라 이 미친 세상에 내가 정신나가지 않기 위해서다’ 같은 느낌으로요. 앞으로도 비웃음의 정서와 관련된 창작을 하고 싶을 것 같습니다.
어머 내 인터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