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연세대학교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한숨처럼 떠돌다.
신촌을 마음의 고향이라고 자부했다. 마음의 고향은 따듯한 곳이어야 했다. 발 닿는 곳곳마다 정이 넘쳐나야 했다. 그냥 고향이 아니라 “마음의” 고향이라 그래야 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신촌의 공간은, 마음의 고향 한 편이 아니라, 한숨 같았다. 7737번 버스, 홍대 입구 출구 앞 포장마차, 그리고 신촌 전체. 실상 특정할 수 없는 공간. 공간이란 게 원래 그런 재미가 있지만, 그럼에도, 마음의 고향이라 하면 신촌의 어느 한 곳은 정착지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내게는 없었다.
신촌의 수많은 술집 중 하나가 그런 장소가 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글감을 정리하기 위해 빈 종이를 펴 술집 이름들을 하나씩 적어 내려가자, 생각보다 진득하게 자주 방문한 곳은 없구나.
나는 신촌을 한숨처럼 떠돌고 있었다.
가장 한숨처럼 지내지 않은 곳, 가장 가볍게 지나치지 않은 곳은 어디였을까. 떠돌이처럼 정착하지 못한 신촌에서, 발이 가장 자주 닿은 곳. 꾸준히 진득하게 닿은 곳. 인정하기 싫지만 그건 학교였다. 신촌으로 오게 한 이유, 신촌 히치하이킹의 출발지. 그래서 낯부끄럽지만 지붕조차 없는 연세대학교의 교정 속, 시선이 닿았던 숨겨진 뜨거운 구석을 소개한다.
<연세대학교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_v.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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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양로의 초승달
2019.10.30. 17:58

백양로는 연세대학교 교정의 심장이라 불러도 좋을, 유쾌한 공간이다. 그 길 위에는 많은 것들이 지나간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교정을 터로 삼은 길고양이들도 때로 엎드려 잠을 청한다. 수많은 졸업 가운이 스치고 지나갔으며, 생판 남의 졸업 현수막을 보고 흘리던 웃음도 묻어 있다. 작년 9월의 어느 날 내가 처음 본 삐라전단 – 북한과는 관련 없지만 특정 정치적 성향을 드러낸다는 글이라는 점에서 정황상 “삐라”라고 부르기로 한다 – 무더기들도 남아 있고, 바쁘게 걸어가다 쏟은 음료수가 묻어 있고, 6월 12일 오후 학생의 인터뷰를 따러 온 방송국의 커다란 카메라 줄도 그곳에 얽혀 있다.
시험 기간에는 살벌하기 짝없는 고행길에 불과하지만, 때로 낙엽이나 푸른 잎이 아름다운 계절의 어느 순간에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온 사람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결혼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까지 발견할 수 있는, 본래 의도와는 달리 엉뚱한 곳까지 뻗어있는 길이다.
그중 가장 똑똑히 남아 있는 것은 초승달. 초승달은 낮게 떠 금방 져버리기 때문에 눈에 자주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데 저 날은 초승달이 새파랗게 중앙도서관 옆에 걸려 있었다. 그날 학교의 가장 많은 사람이 한마음으로 한 장소에 모여 백양로 한복판에 서서 카메라를 들었다. 누군가는 통화하며 지나가다 그 광경의 초승달을 보고, 전화선 너머에 있는 다른 누군가에게 그 초승달을 물어다 주었다. 아이폰의 셔터 소리와 보라색 하늘과, 웅성거리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백양로 한편을 가득 채웠다.
그제야 왜 타국의 신혼부부가 그때 이곳에 와 행복한 표정으로 결혼사진을 찍어 갔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2. 주황 군단의 습격: 정문
2019.11.21. 16:58
연세대학교 정문은 책 모양을 본 따 만들어졌다고 한다. 출처도 분명하지 못한 어디서 들었던 얘기다. 그 책 모양을 닮은 기둥에는 조명이 있어, 밤이 되면 은은한 노란 빛으로 정문의 위치를 알린다. 보통 정문, 문이란 위 방향까지 막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연세대학교 정문은 하늘을 향해 뚫려 있는 모양이다. 그 밑을 – 32*5*2=320 – 약 320번 지나다녔다. 올해의 것까지 합치면 330번 정도는 될 것 같다.
정문은 삼거리 횡단보도에 곧장 있다. 처음 연세대학교에 왔을 때는, 그 광경이 정신없다고 생각했다. 8차선은 되는 도로 바로 옆에 위치한 정문은 혼란해 보였다. 여기가 대학교 입구가 맞는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쳐 버릴 것 같은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 혼란에 나도 무뎌져, 그 혼란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는지 정문이 이제는 생뚱맞아 보이지 않았다. 익숙해지는 게 사람의 일이라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제 정문은 그저 책 두 권이 알아서 서 있는 펑퍼짐한 땅바닥, 학교의 입구일 뿐이다. 오히려 정문 바로 앞이 그렇게 혼란한 건 득이 될 때가 많았다. 서울의 다른 곳으로 놀러 가고 싶을 때, 8차선 도로는 어디로든 가는 버스 노선들을 던져주었다.

정문 안쪽에서 찍은 사진이, 바깥에서 정문을 찍은 사진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사진은 연세대학교의 하찮은 이스터에그/버그. 건학 정신을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적어놓았다.
실수로 이렇게 해서, 조금 안쪽에 따로 건학 정신을 새긴 돌을 놓았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매일 많은 인파가 이동하는 삼거리 횡단보도를 보면 주황 동물 옷을 입었던 사람들이 생각난다. 세련된 주황이 아니라, 형광펜을 사면 세트로 딸려 오는 구성에 있는 주황이었다. 동물 잠옷인지 동물 인형 탈인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중간의 단계에 있는 옷을 입은 사람들이 삼거리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은, 그런 익숙함에 닥쳐온 신선함이었다.
병원 건물을 배경으로 두고, 반대편 횡단보도에서 – 현재는 횡단보도가 X자까지 그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평행선 두 개였다 – 그들의 사진을 찍은 나는 그때 동행자에게 저게 무엇이냐고 신나게 물었다. 동행자가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사람들은 정말 무언가를 광고하러 나온 건지 아니면 정말 외계인들이 한꺼번에 불시착하였는데 만들 수 있는 옷은 그런 종류밖에 없었는지 알 수 없게 만드는 형태의 옷을 입고 있었다. 특히 다른 인파의 무채색 옷 사이에서 그 주황색은 보석처럼 빛났다.

주황은 뚠뚠
왜 오후 5시에 다시 학교로 들어가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이들을 따라갔으면 훨씬 재미난 일을 겪었겠다. 학교 정문이 앨리스 토끼가 파다 만 굴 정도로 보이게 하던 주황이었다.
3. 제2공학관의 주황 실험실
2020.05.29. 22:22
백양로를 필두로 많은 길이 갈라져 있다. 지도에 진하게 표시된 길도 있고, 표시되지 않은 길도 많다. 그중 단연 재미는 표시되지 않은 길을 뚫고 걸어 나가는 일이다. 길이 있을까 아 안될 것 같은데 싶은 곳을 어떻게든 되게 하는 게 재미있을 때가 많았다.
공과대학 건물은 익숙하지 않아 어려운 길이 많다. 그렇지만 공과대학에서 길을 잃으면, 철로를 달리는 기차 소리를 따라 정처 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정문에 닿을 수 있다. 정문 바로 앞에 있기 때문인데, 이런 이유로 학기 중 아침 8시 55분에 정문에서 뛰는 사람들은 모두 공과대학 학생이다. 문과대학 학생 – 예를 들면 나 – 은 그때 뛰어도 닿을 수 없어서 빠르게 포기한다.
한번, 공과대학 건물 중 공학”원”을 공학”관”으로 착각하고 들어가서 헤맨 적이 있다. 그곳은 학부생이 아닌 대학원생의 공간이었다. 이름을 이해하기 힘든 실험실들이 많았고, 문이 열려 있어 그 안에서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는 들렸지만 인기척은 나지 않았다. 분명히 사람의 흔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던, 복도의 불은 꺼져 있어 실험실에서 누군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던 곳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 경험 이후 공과대학을 밤에 방문하면 켜진 불마다 실험실을 벗어날 수 없는 봉인된 누군가의 존재가 떠오른다. 모두가 도망치라고 하는 그곳을 기꺼이 걸어 들어간 그들을 위해 학교는 기꺼이 빛과 기계와 전기와 의자와 책상을 제공한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밥 잘 챙겨 드시고 있는 거죠? 제일 묻고 싶다.

그래서 공과대학 건물의 빛들은 그런 질문을 하게 만든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러나 지금 그렇게 켜진 빛 아래 야심한 시각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 그런 질문을 주고받게 만드는 독백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올해 5월 29일 보았던 빛은 다른 빛들과 다른 색깔이었다. 동행인과 함께 몇몇 추측을 했는데, 지금까지 가장 그럴듯한 것은 저 방에서 다루는 물질을 위해서는 저런 빛이 필요하다는 가설이었다. 공학과는 거리가 먼 두 사람이 내린 가설이니 그 네온 주황빛 아래 있던 사람이 다가와 기각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 밥 잘 챙겨 먹읍시다.
4. 선배 히치하이커의 흔적
2019.05.01. 16:00
많은 나무 벤치가 교정에 있다. 원래 머피의 법칙에 따르면 많지만 필요할 때는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그런 법칙을 무시할 만큼 연세대학교 교정에는 벤치가 많다.
그리고 그 벤치들에는 금판이 붙어 있다. 동판이라고 부르는 게 더 나은 말일까, 그런데 색은 금색이다. 금판에는 연세대학교 로고가 있고, 기부금을 낸 졸업생들의 학번, 이름, 그들이 남기고 싶은 한 마디가 적혀 있다. 기부금 얼마를 주어야 이 벤치 명패에 내 이름을 새길 수 있는지 정확히 알아보고 싶었다. 친구에게 이 얘기를 한 다음에, 우리 졸업하고 같이하자. 우리도 새기자. 친구는 웃으면서 그러자고 했지만 나는 여전히 진지하다. 그리고 그런 제안을 하게 된 데에는 두 선배의 벤치가 큰 역할을 했다.

학생회관 지하 입구 근처에서 찾을 수 있다.
(© JW)

아름답고 까리한 선배님의 자취
(© JW)
아름다웠다는 건 농담이긴 했지만, 이렇게 “ㅋ” 하나 적힌 명패를 보고 유쾌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수업을 빠지고 강의가 있는 건물 바로 앞 벤치에 앉아 친구와 아이스크림을 먹었을 수도 있고, 그 수업에 들어가서 잤을 수도 있고 강의를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들었을 수도 있겠다. 이것들 모두 “ㅋ” 자음 하나에 모두 함축될 수 있지 않은가? 얼마나 많은 기억이 자음 한 개에 들어가는지 지켜보는 감동이란 게 이 세상에는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 “ㅋ”이 선배님들께서는 조소인지 정말 행복한 짧은 웃음으로 의도하신 것인지 모르지만, 비웃음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비웃음이면 어쩔 수 없고…….
변함없이 진지했기 때문에, 기부금을 얼마 내야 친구와 이렇게 멋진 자음 하나를 남길 수 있나 알아봤는데, 10년 기한제로 500만 원 이상 – 친구야 파이팅! – 이었다. “ㅋ”이라는 웃음의 의미가 자본주의 사회에 맞게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하고 싶긴 하다. 이미 “ㅋ” 자음은 있으니, 다른 자음이나 모음 하나를 골라야 할 것 같아 친구에게 물었다.
히읗은 어떻냐고. 좋지 않아?

하 헤 히 호 후
Hitchhiker. (히치하이커) 자동차 편승 여행자. 동아출판 프라임 영한사전
떠돌이면 어떠랴, 신촌에 정 붙일 만한 진득한 장소가 없으면 어때.
자동차가 아니라 공간과 기억을 타고 다니는 히치하이커로, 교정은 다만 정착하기에 훨씬 넓은 장소이므로 이곳저곳을 매일매일 새로 보며 새로운 마음으로 히치하이킹하고 싶다. 그리고 교정을 누빈 그런 마음으로 신촌을 떠돌아다니고 싶다.
한숨처럼 떠돈다 슬퍼하지 말아라,
다만 항상 새로운 공간과 기억이 있을 신촌을 열과 성을 다해 정처 없이 걷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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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 50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