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 이 편지를 골랐을 누군가에게
아직도 주제를 정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던 토요일. 신촌에서 같이 과제를 하기로 한 동기의 늦는다는 말에 나는 근처 의자에 앉아서 사람 구경이나 하려 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갑자기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 때문에 잠시 피할 곳을 찾는 것으로 수정되고 말았다. 그때 눈에 들어온 유플렉스 앞, 빨간 버스 모양의 ‘플레이 버스’. 항상 어떤 곳인지 몰라 선뜻 가볼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이러다가는 진짜로 글을 못 쓸 것만 같다는 스트레스와 불안감은 겁쟁이도 용기를 내게 하였다. (그리고 이 행동은 굉장히, 너무 잘한 일이라고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를 칭찬하는 중이다)
그 좁은 공간에서 무엇이라도 뽑아보겠다고 눈을 여기저기 둘러보다 별 소득 없이 신촌과 서대문구를 소개하는 책자를 가져왔고, 그것을 10시가 훌쩍 넘어 집에 도착해서야 펴볼 수 있었다. 많은 공간과 가볼 만 한 코스를 설명한 그 책자에서 ‘글월’이라는 곳을 발견했다. 그 밑의 소개에 적혀있는 <펜팔서비스>. 모르는 사람에게 편지를 주고, 반대로 나도 모르는 사람에게 편지를 받는다는 일은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로 느껴졌다. (참고로 밤이라 평소보다 감수성과 상상력이 풍부한 편이었다) 특이하고 특별한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내일 신촌을 또 가봐야 하나라는 고민은 말끔히 지워졌고, 내일의 목적지는 ‘글월’이라는 생각만 머릿속에 남았다. 그러고 마치 초등학생 때 첫 수련회를 가기 전날 밤 쉽게 잠 못 이룰 때처럼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내용의 편지를 쓰지, 나는 무슨 내용의 편지를 받을 수 있을까?

일요일. 날씨 아주 아주 맑음 :D
# 이 편지를 골랐을 누군가에게
21년 05월 30일, 일요일의 낮은 매우 맑고 화창했다. 마치 내 기분처럼. 과제며, 졸업프로젝트 발표며, 시험공부 등 해야 할 일은 매우 많고 시간은 없는 와중에 편지를 쓰러 가는 길이면서 왜 이렇게 콧노래가 나오는지. 신촌역에서 내려 서대문 03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해가 쨍한 날이 너무 좋다며 횡단보도 대신 육교를 건너며 카메라로 보이는 주변 풍경도 담고, 가는 길에 근처에서 산 빵도 너무 맛있다고 흐뭇해하며 그렇게 글월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편지지를 고르고, 그 위에 쓸 펜을 골랐다. 그리고 첫인사를 써놓고, 잠시 생각을 했다. 무엇을 써야 하나. 나는 처음 무언가를 할 때 구체적인 예시가 주어지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몹쓸병이 있다. 그래도 8000원이나 내고 내 편지를 선택해 준 사람에게 후회를 느끼게는 하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내 고민을 얘기해야 하나. 그러면 정말 내 고민만 얘기하고 결론은 못 내고 끝날 것 같아 안돼. 그럼 힘이 되는 말을, 아니면 위로가 되는 말을 써볼까? 위로가 되면 좋은데…. 아니야, 상대방이 뭘 고민한다고 미리 짐작하고 그에 맞는 말을 준비해. 함부로 하는 위로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이것도 패스! 결국 이것저것 끄적이며 세 장의 편지지를 써서 넣었다. 손이 저리도록 열심히 써 내려갔는데 막상 쓰고 나니 별 내용은 없었다. 내 편지를 통해 누군가에게 울림을 전하든, 감동을 전하든, 하물며 재미를 전하든 무언갈 주고 싶었다. 그런데 오히려 실망감과 화만 전해주는 거 아닌가 싶은 두려움이 든다.
편지의 내용은 내 편지를 가져간 사람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냥 내 나름의 무언가를 선물했다. 선물을 맘에 들어 했다면, 그리고 운이 좋다면 이 글도 볼 수 있겠지. 다만, 내가 다 쓰고나서 아쉬웠던 건 나에 대해 조금이라도 소개를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다시 돌아가 편지를 쓴다면,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지만 나에 대해 알려줄 거다. 그리고 편지를 쓰기 전 생각만 하고 나쁜 기억력에 미처 글로 옮기지 못한 몇 글자를 더 적어본다.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았다고. 나는 이곳에 오기 전부터 설레었다고, 항상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날이면 겉모습부터 신경 쓰는 편이라 안경과 츄리닝을 입고 신촌에 온 어제와 다르게 좋아하는 옷을 입고 렌즈를 끼고 화장까지 했다고. 이렇게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날, 내 모든 게 완벽해서 좋았고, 내가 쓴 편지를 읽기 전과 후에도 당신의 기분이 나의 지금 이 기분과 비슷한 감정이길 바란다고. 글솜씨가 비루한 나는 쓰기 전에도, 쓰면서도, 쓰고나서도 이름 모를 당신을 계속 생각했다고…말이다.
*펜팔서비스: 글월에 방문한 누구라면, 8000원을 주고 편지지와 편지봉투를 선택할 수 있다. (편지지는 원하는 만큼 제공)열심히 편지를 쓰고, 우표에 자신의 상징을 그려넣고, 날짜와 나를 표현하는 형용사를 체크한다. 직원분께 편지를 드리면 이제 여러분도 원하는 편지를 선택할 수 있다!

내가 받은 편지. 이건 공개해도 되겠지? (문제된다면 연락주세요)
내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어차피 이 공간을 온 누구라도 8000원만 낸다면, 아니 어쩌면 무료로도(아이쇼핑)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 나의 운명적 선택을 받은 누군가에게
그렇게 시작한 편지쓰기는 편지 봉투를 닫아 마무리 스티커를 붙이기까지 거의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나의 편지를 직원분께 드리고, 이제 몇 개의 편지 중 하나를 내가 고를 시간이었다. 꽤 신중하게 편지 봉투 하나하나를 보았다. 이 펜팔서비스의 편지지에는 누구든 형용사들이 적힌 도장을 찍고, 나를 표현하는 단어들을 체크해야 한다. 제법 나와 비슷한 형용사들을 체크한 사람들이 있었다. 왠지 모르게 나와 비슷한 사람의 편지를 고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 남은 편지 두 개 중 고민하다가 나에게 없는 ‘사랑스러운’이 체크되어있는 편지를 골랐다. 물론 우리가 선택한 형용사들은 자신이 느끼는 나이기에 객관적이라고도 마냥 맞다고도 할 순 없지만, 자신을 사랑스럽다고 당당히 체크했다는 것 자체로 충분히 사랑스럽지 않은가? 사랑스러운 사람이 꾸민 편지 봉투답게 귀여운 강아지와 토끼가 그려진 앞면과 내가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찍은 도장의 잉크가 흐릿해 위에 덧대어 찍다 안 되겠다는걸 알았는지(비하인드 스토리로, 나도 같은 행동을 한 후 결국 봉투를 바꾸었다) 밑에다 다시 찍은 장면이 저절로 상상되는 뒷면에 웃어버렸다.
*jam이라 자신을 지칭한 그 누군가는 편지를 참 깔끔하게 잘 썼다. 자신의 고민을 얘기해주고, 나에게 공감을 얻어냈으며, 끝으론 응원도 해주었으니 말이다. 항상 나만 하는 거라 생각했던 고민을 누군가도 하고 있다는 것, 나만 그렇다는 게 아니라는 것. 그것이 때로는 힘이 될 때도 있는 것 같다. 당신의 말이 당신에게 누군가인 나에게 진짜로 힘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나도 당신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나는 이 편지에 답장을 쓸 수 있다. 그래서 당신이 좋아할지 모르지만, 바쁜 일이 지나가면 무슨 말로 답장을 하는 것이 좋을까 생각해볼 것이다. 또 이 편지를 내 책상 위에 두고 종종 들춰 보며 오늘 느낀 이 감정을 잊지 않고 싶다.

*jam: 사랑스러운 나에게 편지를 써준 누군가
앞으로 내가 좋아하는 빵에 딸기잼을 발라먹을 때면, 당신이 떠오르겠죠!
대면보다 비대면이 익숙한 요즘답게 나는 익명의 누군가를 신촌에서 글로 만났지만, 지금껏 만난 어떠한 인연들보다 덜 소중하다 할 순 없을 것 같다. 여유롭지 못한 시간을 쪼개 썼지만 특별한 추억에, 일회성이라도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 보는 일에 쓰인 시간은 충분히 의미 있었다. jam이 마지막에 달아놓은 ‘힘 나는 하루가 되세요’ 처럼 여러 일에 치여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 느낀 나는 오늘만큼은 편지들 덕분에 힘 나는 하루를 보냈으니 말이다.
주변 사람에게 말 못 할 고민을 털어놓는 것,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이 <펜팔서비스>의 편지로 우리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초너들도 이러한 경험을 느껴보고 싶다면 이곳 *글월에서, 이 편지를 쓰는 걸 추천해본다.

*글월: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에 위치. 다양한 편지지와 관련 물품들이 있는 공간. 간판이 크게 없으니, 잘 찾아야 한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이야기를 남겨주세요.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