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TO ZANCHI! · 신촌을 사랑하고, 추억하고,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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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 2021 · 07 · 08

잔치 릴레이소설 <여우비>

Editor 챌라또

 

결국 오긴 왔네. 

한여름, 태양이 작열하는 그것도 오후 한 시에, 연대 입학 기념으로 산 베이지 린넨 자켓을 껴입고 어울리지도 않는 Y가 박힌 흰색 볼캡을 쓴 인혁이 신촌에 당도했다. 등에는 땀으로 그린 지도와 함께. 지나다니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무심코 “이 날씨에 미친 거 아냐?” 를 일행에게 시전한 걸 들어버린 탓에 가까스로 정신줄을 붙잡고 올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안 그래도 엊그제 꽤나 오래 만난 애인의 바람 현장을 목격하고, 그것도 본인 집 세탁기 위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은 터라 미쳤다는 게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이사를 가지 않는 이상 거기서 빨래는 못하겠지. 난생 처음 보는 여친의 한 뼘짜리 속옷을 곱씹으며 가만히 자취방 천장만 보고 누워있은지 이틀만의 외출이었다. 나쁜 년. 근데 첫만남 이후로 지금까지 본 모습 중에 제일 예뻤던 것 같기도… 빨강이 잘 받는 건가… 다른 남자한테 안겨 있는 애인이 예뻐보이다니. 정말 나도 미치긴 단단히 미쳤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떼는 인혁이었다. 

동창회가 여섯시니까… 아직 다섯 시간이나 남았네. 오랜만에 신촌 구경도 좀 할 겸 일찍 나왔지만 늘 그렇듯 이 동네는 막상 오면 할 게 없다. 꼬륵… 그러고 보니 이틀 간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아직 맥도날드가 있으려나, 하고 찾아간 연세로 한복판에는 찌는 듯한 더위에도 여전히 사람이 바글거렸다. 물론 맥도날드는 그 자리에 없었다. 하긴, 일주일 새에도 가게가 없어졌다 생기는 게 신촌이었지. 대충 검색을 해 찾아낸 햄버거집은 점심 피크타임이라 그런지 만석이었고, 소음에 꽤나 취약한 인혁은 치킨버거 단품을 포장해 떠밀리듯 밖으로 나왔다. 선천적으로 위가 약해 커피와 탄산을 끊다시피 했기 때문에 버거를 포장하면 늘 편의점에 들러 과일주스를 사는 것이 그의 오래된 루틴 중 하나였다. 그렇게 오렌지주스와 버거를 양 손에 쥐고 근처라기엔 조금 먼 공원으로 향했다. 

도착하고 보니 이미 오렌지주스는 더위에 식은지 오래였고 아무렇게나 쥐고 온 버거는 약간 찌그러져 한층 볼품없는 비주얼을 자랑했다. 대충 벤치를 툭툭 털고 앉아 주스부터 한 모금 마시고 주위를 둘러보니 역시 늘상처럼 사람이 없었다. 길냥이들 몇 마리와 굶주린 비둘기들 정도가 이 공원의 주 고객층인데, 이건 인혁이 신촌으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때… 즉 옛날부터 그랬다. 땀에 절은 모자를 잠시 벗어두고 본격적으로 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치킨을 좋아하지는 않는데 버거는 유독 치킨버거가 끌렸다. 나도 참 이상해. 

적당히 배를 채우고 앉아있던 나무 벤치에 갑자기 통 하고 물방울이 튀었다. 뭐야. 비 온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한 두 방울씩 통통거리던 비는 이내 후두두둑 떨어지기 시작했고 인혁은 모자를 집어 다시 푹 눌러썼다. 챙을 우산 삼아 올려다 본 하늘은 투명하게 맑았고 햇살은 아랑곳 않고 쨍쨍했다. 이런걸 여우비…라고 하나. 처음 보는 것 같네. 햇살이 내리쬐는 벤치에 비를 맞으며 앉아있으니 무언가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공원은 인혁의 단골 첫 키스 장소였다. 학창시절 애인이 생길 때마다 데려오던 필살기 같은 공간이랄까. 인적이 드문 공원에서 연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몇 개 없다. 그리고 여느 연인들처럼, 인혁은 그 일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다. 전 애인과도 여기가 첫 키스 장소였던 것 같은데… 그 때는 비가 오는 줄도 모르고 보냈던 시분초들을 어렴풋이 떠올리는 그였다. 내가 그렇게 별론가. 찌질함과 자괴감이 반씩 섞인 상념들이 빗물과 함께 밀려 들어왔다. 괜히 여길 왔다고 이제 와 후회해도 달리 갈 곳은 없었기에 그냥 생각을 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 

여우같은 소나기가 한차례 왔다 가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덥고 쨍쨍한 몇 분 전으로 돌아간 날씨였다. 젖은 옷도 말릴 겸, 인혁은 좀 걸을 요량으로 벤치에서 일어났다. 다 먹은 버거 봉지와 페트병을 챙겨 분리수거함으로 향하는데 웬 아이가 자기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기껏 해봤자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무슨 다 죽어가는 할아버지처럼 터벅터벅 걷는 게 이상해 한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눈치채서였을까, 아이는 툭 떨구었던 고개를 가만히 들어 인혁을 보았다. 데구르르, 그만 놓쳐버린 페트병이 저 어딘가로 굴러갔다. 인혁은 너무 놀라 고개를 흔들며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내가 정말 돌아버린 나머지 헛 것을 보고 있는 걸거야. 차라리 그 편이 믿기 쉬울 것 같았다. 그를 올려다본 아이의 얼굴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눈도, 코도, 입도, 귀도. 그야말로 ‘무(無)’의 얼굴. 그저 한낱 인간의 착각일지도 모를 약간의 주름과 홍조만이 대충 그린 그림처럼 놓여있을 뿐이었다. 말도 안돼. 앞으로 착하게 살게요. 지금까지 못되게 산 건 아니었지만 이제 더 격하고 성실한 버전으로 착하게 살게요. 하나님 제발 이거 꿈이라고 해주세요.

“어이 그 쪽.”

“…….?”

말을 할 수 있다. 입이 없는데 어떻게 말을 하지. 목소리는 아이의 것도 어른의 것도 노인의 것도 아닌 어딘가 약간 환상적인, 마치 신이 있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은 목소리였다. 

“내가 보여?”

“……?” 

원래 안 보이는 생물첸가 봐. 유령일지도. 아니면 이게 그 소문으로만 듣던 몽달 귀신…? 

어느새 귀신의 존재를 긍정하기까지 하고 있는 인혁이었다.

“보이나 보네. 하필이면 여우비가 와서. 귀찮게 됐어. 불쌍한 나… 저 찌질이같은 인간이랑 같이 다니게 생겼구나.”

저기, 불쌍한 건 나 아니냐고요. 이틀 전 애인은 제발 알고 떨어져달라는 듯이 바람 피우는 걸 아주 뻔뻔히 들켜주셨고, 이 더운 날 망할 놈의 벌금 때문에 친구도 없는 동창회에 나가야 하는데, 이 괴상하고 끔찍하기까지 한 생명체를 목도한 걸로도 모자라 같이 다녀야 한다고? 그것도 하루종일? 같이 다니면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더 이상하게 볼까. 아, 동창회도 못 가겠네. 돈 없는데. 

“쓸데없는 걱정 좀 그만해. 너한테만 보이니까.” 

생각까지 읽을 수 있는 건가. 진짜 무서워 죽겠어. 일단은 이 이상한 생명체가 본인 앞에 있다는 게 현실이라고 인정하는 셈 치기로 한 인혁은 이왕 이렇게 된 거 궁금증이나 해소하자는 심정으로, 기어가는 목소리로 질문을 쥐어짜냈다.

“저기 근데 죄송한데… 왜 얼굴이 없어요?”

“얼굴 있잖아. 여기.” 

“아니 눈도 없고.. 코도….”

“눈 코 입이 있어야 얼굴이냐? 그건 또 누가 정했대. 너 같은 인간들이 하여튼 문제라니까.”

또 틀린 말은 아니라 슬며시 입을 다무는 인혁이었다. 

“아무튼. 너도 귀찮게 됐네. 여우비가 온 날 나를 처음 발견한 인간은 내가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나랑 놀아야하거든.” 

“논…다구요?”

“응 놀아. 대신 선물이 있긴 해. 내가 떠나는 날 네가 가장 증오하는 너의 한 부분을 없애줄거야. 다음 날 눈을 뜨면 나에 대한 기억은 깔끔히 지워질거고. 이정도면 페어 게임이지? 너 같은 애한테는 남는 장사라고도 볼 수 있겠네. 그러니까 이제부터 열심히 생각해 둬. 네 어떤 부분을 도려내고 싶은지.” 

 


꽤 나쁘지 않은 보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막상 무엇을 없애달라 할지 떠올리려 하자, 인혁은 일이 그다지 쉽지만은 않음을 깨달았다. 자기 자신에게 있어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은 차고 넘쳤다. 유난히 크고 뭉툭한 코부터, 우유부단한 성격까지. 그렇다고 그런 부분들을 증오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뿐더러, 고치는 것이면 몰라도 아예 없애는 것은 또 다른 문제가 아닌가. 어쩌면 저놈보다 끔찍한 몰골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동화에서만 보던 비현실적인 존재의 거래 제안은 생각보다 매력적이었고,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이 있었다. 그 끝이 항상 좋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을 애써 떨치며, 인혁은 일단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뭘 하며 놀고 싶으시죠?”

“뭐 숨바꼭질이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그런걸 기대한 건 아니지? 요새 누가 그러고 노니? 방구석에 누워 유튜브나 보지. 나도 그냥 니가 뭔 뻘짓을 할지 구경이나 할거야.”

인혁은 어이가 없었다. 저렇게 괴상하게 생겨선 뭔 유튜브람. 또 뭐 재밌는게 있다고 남의 일상을 훔쳐본다는 거지? 변태야?

“그치. 니 얼굴만 딱 봐도 따라다녀봤자 개노잼일게 뻔한데 말야. 그래서 좀 재밌을만한 데 떨궈줄거야. 너의 과거, 현재, 미래 각각 한 지점씩. 내가 재주가 좀 좋거든.”

말을 끝내자마자 얼굴 없는 그놈은 인혁을 향해 거칠게 달려들었다. 인혁은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몇 초쯤 지났을까, 인혁은 뼛속까지 스미는 냉기에 눈을 살며시 떴다. 옷차림도 그대로, 보이는 풍경도 그대로였다. 다만 녀석은 온데간데 없었고, 하늘에선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잠깐, 눈이라고…? 

당황도 찰나, 평소 회귀니 전생이니 양산형 타임리프물을 즐겨 보던 인혁은 나름 침착하게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손에 쥐어진 것은 술 먹고 액정을 박살냈던 조그만 아이폰, 서랍 속에 고이 쳐박혀 있어야 할 아이폰이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배경화면 위에 올려진 날짜를 읽었다.

2018년 12월 17일.

젠장.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제일 먼저 인혁의 머리를 스친 것은 끔찍했던 군생활의 기억들이었다.

그놈이 킬킬대며 웃는 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각 챕터에 얼마나 오래 머물지는 니 선택에 달렸어!”

몸이 부르르 떨렸다. 추위 때문인지, 군대를 다시 가야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인지. 그렇다고 가만히 있다간 얼어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에, 인혁은 유플렉스 지하에서 몸이라도 녹일 작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날씨에 미친 거 아냐?”

이번에도 가까스로 정신줄을 잡게 만든 것은, 조롱과 오지랖이 반반쯤 섞인 행인의 무심한 한마디였다. 따뜻한 통로로 내려가기 전에, 인혁은 습관처럼 고개를 수그린 빨잠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몇 분 전, 아니, 아니지. 이 불가해한 일을 겪기 전과 별 다를게 없는 것 같기도 했고, 훨씬 젊어 보이기도 했다.

잠시 멍을 때리던 인혁의 어깨를 누군가 콕콕 찔렀다. 흠칫 놀라 뒤돌아본 인혁의 눈 앞에, 두 볼과 두 귀가 빨갛게 얼은 한 여자가 의아한 눈빛을 하고 서 있었다. 그녀였다.

“왜 이렇게 춥게 입고 왔어?”

눈 앞에 빨간색, 빨간색 속옷이 아른거렸다.

유하린. 하린은 인혁과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학년 때 같은 반이긴 했지만, 학창시절 당시엔 고작 두세 번 얘기를 나눠 봤을까? 그만큼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인혁은 맘 맞는 친구들과만 사귀며 조용히 학업에 집중했던 반면, 하린은 고등학교 썰을 풀어보라 하면 하루 종일도 모자를 만큼 초특급 인싸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인혁은 광란의 새내기 시절을 보내며 성격이 나름 활달하게 변했고, 그리 길진 않지만 후끈한 연애 경험도 꽤나 착실하게 쌓았다. 그러다 2018년 말에 열린 동창회에서, 술을 진창 마신 인혁과 하린은 그만 눈이 맞고 말았던 것이다. 

꽤나 괜찮은 연애였다. 무던한 인혁과 감수성이 풍부한 하린의 성격은 의외로 합이 좋았고, 사귄지 몇 달 안 되어 인혁이 군대를 갔음에도 하린은 별다른 위기 없이 꽃신을 신었다. 다만 하린이 밝힌 가치관에 따라 몇 년이 지나도 진도는 키스 이상을 넘지 않았고, 인혁은 그 문제에 대해 딱히 불만은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서울 전역에 있는 수많은 카페, 술집, 영화관을 누볐다. 아슬아슬했지만 연애 끄트머리에는 서로의 집에서 넷플릭스 데이트를 즐기기도 했다. 인혁이 보기엔 이렇게 무난히 결혼까지 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세탁기 위의 낯선 그녀를 마주치기 전까지는.

생각해보니 2018년 12월 17일, 아니 복잡하니까 일단 오늘이라고 하자. 오늘은 인혁과 하린이 동창회 이후 세 번째로 만나는 날, 혹은 그들의 연애 1일차였다.

하린의 장난스런 목소리와 그놈의 기묘한 목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저기요~ 왜 대답을 안하세요?”

“어쩔래?”

세탁기 위의 하린은 눈 앞에 서 있는 하린과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지금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말똥말똥 나를 쳐다보고 있는 하린은 나를 배신한 그녀가 아니다. 뜻밖의 시간 역행으로 홀랑 사라져 버린 그녀의 불륜 때문에, 내 20대의 절반을 가차없이 날려 버리는게 옳은 일일까?

인혁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래. 일단 되는대로 냅둬보자. 원래 세상살이는 흐름에 올라타는 게 중요하다고 하지 않나. 어떻게든 되겠지. 

“아… 나 원래 추위를 잘 안 타거든. 별로 안 추워서 대충 입고 왔어.”

“그래…? 그래도 그렇지. 감기 걸리겠다. 오늘 냉면 먹기로 했잖아.”

“냉면?? 이 날씨에?”

“응. 이 날씨에.”

하린은 인혁의 옷 차림을 위 아래로 훑어보더니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진짜 갈 수 있겠어?”

“어어… 가자.”

인혁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냉면을 먹으러 간다니. 원래 냉면이 겨울에 먹는 음식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겨울에 먹는 건 좀 그렇지 않나? 그것도 연애 1일차에 먹기에는. 애초에 이 날 정말 냉면을 먹긴 했던가? 이상할 정도로 기억은 흐릿했다. 

모르겠다. 먹었나보지 뭐. 하고 인혁은 생각했다. 당황스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런가보다’ 하고 무심히 넘겨버리곤 했다. 힘든 일을 견뎌내는 나름의 생존 전략이기도 했다. 이렇게라도 해야 이해 되지 않는 수많은 것들을 그나마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지금 내가 처한 이 상황도. 얼굴없는 이상한 꼬맹이 귀신에, 시간여행에, 한겨울에 냉면까지. 여기까지 생각하니 오늘 겪은 모든 일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멍하니 기계적으로 걷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하린의 손에 붙들린 채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였다. 맥없이 펴진 인혁의 손 위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살짝 앞에서 통통 걸어가는 하린의 갈색 머리칼이 허리춤에서 찰랑거렸다. 그치, 3년 전에는 머리색이 밝은 갈색이었지 참. 연애 초기만 해도 평범한 갈색 머리를 고수하던 하린은 언제부턴가 꾸준히 파격적인 색으로 염색을 하곤 했었다. 분홍색, 초록색, 회색, 형광노랑색까지… 세상 모든 색은 다 할 기세더니 결국 두피가 많이 상해  똑단발에 검정색으로 염색했던 게 얼마 전이었다. 

하린은 그런 사람이었다. 새로운 걸 시도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 인혁이 보기에는 그랬다. 3년 동안 같은 사람하고 연애 했다는 것도 그 애한테는 기록이었을 것이다. 지루한 걸 제일 싫어했으니까. 먹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하린에게는 몇 가지 원칙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게 최소 이틀에 한 번은 가보지 않았던 식당을 찾아가는 거였다. 살면서 밥이란 건 먹는다기보다는 때우는 것에 가까웠던 인혁에겐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하린에겐 제법 중요한 일인 듯했다. 

분명 냉면도 하린이 먹자고 했을 것이다. 조금만 위에 자극이 가도 체해버리는 인혁이 먹자고 했을 리는 없었다. 다른 거 먹자고 좀 하지. 나도 참 일관성 있게 소심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창천공원을 지나 현대백화점 뒤쪽 골목을 지나고 있었다. 그제서야 어디로 가는 건지 감이 왔다. 이미 몇 년 전에 폐업한 평양냉면 집. 은근히 유명해서 망할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져있었다. 신촌에서 1년을 못 채우고 임대문의 딱지가 붙어버리는 가게를 수도 없이 본 인혁은 그만큼 버틴 게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다. 심지어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다른 식당이 근처에 있는데도 꿋꿋이 자리를 지켜왔다는 게 왠지 모르게 위안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다 사라졌구나. 내 지난 연애도, 이 냉면집도. 갑자기 속이 쓰렸다.

가게 안은 허름하면서도 생각보다 깔끔했다. 미색 벽지에 나무인 척 하는 합성 소재 장판, 그리고 모서리에 찍히면 큰일 날 것 같은 나무 식탁이 조화로웠다.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쭉 이런 모습일 것만 같은 기시감과 친숙함이 동시에 드는 비주얼이랄까.

자리에 앉아 인혁은 육개장을, 하린은 평양 냉면을 시켰다. 인혁은 육개장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하린은 아쉬워했지만.

“에이, 여긴 냉면 맛집인데. 내꺼 이따 한 입 줄게.”

“너 먹고 싶으면 다 먹어도 되는데… 주면 고맙지.”

인혁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컵 두 개에 물을 따르자 하린이 잽싸게 수저를 세팅해놓고는 다시 조잘거렸다. 

“여기 진짜 맛있대. 숨겨진 맛집이라고 그러더라고. 너랑 먹으려고 열심히 알아본 거야. 잘했지?” 

하린은 수줍은 듯 말하고는 헤헤 웃었다. 연애 초반에 봤다면 귀엽다고 느꼈을 법했다. 하지만 며칠 전 눈 앞에 있는 이 사람에게 배신 당한 인혁으로서는 갑자기 드는 복잡한 감정에 화가 치밀 뿐이었다.

그냥 너가 먹고 싶었던 거면서…. 전에도 그랬지. 매번 싫어도 참고 같이 했던 게 얼마나 많았는데. 

“왜 그랬어?” 

“어?” 

망했다. 침착하자 침착…

“그게… 왜 고백했냐고. 너가 먼저 말했잖아. 그때.”

휴. 잘 넘어갔다. 

“너가 약속했던 거 들어주면 말해줄게.”

약속한 게 있다니. 우리 사이에 그런 게 있었어?

슬쩍 떠 봐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주문했던 음식이 나왔다. 하린은 기다렸다는 듯이 양손에 식초와 겨자를 동시에 들고는 냉면 그릇에 냅다 뿌려댔다. 

종이처럼 팔랑거리는 팔과 단호한 표정이 묘하게 웃겼다. 인혁이 큭큭 웃자 하린이 머쓱해하며 말했다.

“지금 비웃는 거야? 뭘 모르네. 평양 가면 다 이렇게 뿌려먹어.”

“뻥치지마.”

“진짜야! 야 왜 사람 말을 못 믿냐? 실망이다 너?”

말은 퉁명스럽게 해도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린은 유달리 이런 걸 좋아했다. 하린이 친 시덥잖은 장난에 인혁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면 자신의 임무를 마친 것마냥 뿌듯한 표정을 짓곤 했다. 꼭 예전 같았다. 아 예전 맞구나. 3년이 나름 길다면 긴 시간인데, 막상 과거로 오니까 금세 익숙해졌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젠 너가 웃는 걸 보는 게 씁쓸하다는 것 정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인혁이 툭 던지듯 말했다. 

“3년 후에는 너가 어떤 모습일 것 같아?”

“글쎄. 그건 모르겠는데 너도 만났으니까 뭐든 잘 풀리지 않았을까?”

이 말을 하고는 하린은 냉면을 크게 집어 인혁 쪽에 있는 앞그릇에 면발들을 깔끔하게 넣었다. 곧이어 계란 반쪽도 면발 위에 얹는다. 

“자, 1일 기념 선물이야.”

하린이 인혁의 눈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내 눈썹을 살짝 올렸다 내리더니 생글생글 웃었다.

크게 다툰 적 없는 무난한 연애였지만 생각해보면 평행선을 달리는 기분이었다. 사실 하린과 연애하는 내내 왠지 드는 거리감에 섭섭했다. 괜찮다며 넘기곤 했어도 자주 쓰린 속처럼 한 구석은 쓰라렸다. 그러다 종종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줄 때마다 다 괜찮아졌었다. 조금은 외로웠어도. 난 너랑 만나면서 항상 어딘가 비껴서있는 기분이었던 것 같아. 그래도 너가 좋았어. 어쩔 수 없이. 이 생각까지 하고 나니 목이 메었다. 과거까지 왔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거 뿐이구나. 냉면집에서 질질 짜는 거. 인혁은 차마 정면을 볼 수가 없어 식탁 위에 놓인 하린의 핸드폰을 쳐다봤다. 핸드폰?

뭔가 이상했다. 하린은 식당에 갈 때면 핸드폰을 가방에 넣어두는 습관이 있었다. 음식물 튈까봐 그런다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고수해오던 원칙 중 하나였다. 근데 왜..? 넌 원래 이렇지 않았잖아.

“왜? 지금 너도 그렇잖아.”

순간 주위가 온통 깜깜해졌다. 빛 하나 들지 않는 암흑이었다. 아니, 하린의 핸드폰 화면만이 기묘한 빛을 내며 지직거리고 있었다.

 


아. 혼란하다 혼란해. 

방금 만난 하린은 내 기억 속의 그녀와 꼭 닮은 듯하면서도 어딘가 분명히 다르다. 게다가 첫 데이트에 냉면을 먹었던 일이라든가, 하린과 처음 했던 약속 같은 것들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나’라니… 스스로가 말도 안된다. 지금 내가 만난 우리는 내가 알던 너, 내가 알던 우리가 맞긴 한 거지?  

그런가 하면, 저 기묘하기 짝이 없는 마지막 말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처음에는 하린의 목소리인 듯 했다가, 이내 저 귀신 놈의 것과 합쳐져 온 몸에 소름이 쫙 돋게 하는 그 목소리. 게다가 도통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너도 그렇잖아”라니…? 이제는 이 어이없는 상황을 이해해야겠다는 의지조차 생기지 않는다.

머리가 지끈거려 눈을 붙이고 잠시 쉬고 싶은 생각뿐인 인혁이었지만, 오른손은 어쩐지 무언가에 홀린 듯, 하린의 핸드폰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잡아들었다. 그래, 이 기묘한 빛에서 무언가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 안되더라도 찾을 생각을 해야지. 짐짓 대범한 생각을 해보았지만, 속으로는 혹시 또 다른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걱정하던 인혁은, 천천히 팔을 굽혀 핸드폰을 눈앞으로 당겨왔다.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가까스로 들여다본 화면에는 누군가의 얼굴이 비친다.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아, 분명히 봤는데. 어디서 봤더라… 인혁은 눈알을 굴리며 기억을 톺아보다가, 다시 액정 속에 시선을 고정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얼굴이다. 

눈코입이 없는, 온통 무(無)인 얼굴! 그놈이다. 이목구비도 없는 주제에, 어쩐지 나를 향해 씨익-하고, 기분 나쁜 웃음을 지어 보이는 듯한 기분이다.

“그래 너 말이야. 너도 마찬가지라고.”

인혁의 표정이 금세 굳는다. 

“뭐, 변했음을 논하기엔 그냥 계속 이렇게 멍청했을 뿐이었나? 하여간, 자기 객관화는 못하고 질질 짜기나 하고 말이지.”

난데없이 훅 들어오는 독설에 인혁이 뭐라고 항변할 틈도 없이, 놈은 넋이 나간듯한 인혁의 얼굴로 돌진한다.

“너 하는 꼴이 답답해서 내가 못 봐주겠다!!”

.

.

.

“아아악!!!!”

인혁은 소리를 지르며 폰을 냅다 집어던진다. 내내 추웠던 몸이 천천히 제 온도를 찾아가는 듯한 느낌이다. 온몸의 긴장이 풀린다. 질끈 감았던 눈을 떠 천천히 깜빡인다. 이내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온다.

“아, 이 새끼 벌써 취했네. 폰은 또 왜 던져. ㅋㅋㅋ”

“냅둬~ 실연당한 슬픔이 어지간히 크신가 보지~”

일 년에 한두 번. 얼굴이나 잠깐 비추는 사이라고만 여겼지, 그들을 ‘친구’ 범주에 넣어서 생각해보지 않았던 인혁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들의 목소리가 미친 듯이 반가웠다. 그래도 몇 년을 같이 보내며 함께 나이 들어간 목소리. 이 익숙한 시간, 낯설 것 없는 공기. ‘오늘’을 맘 편히 오늘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게 이렇게나 감사한 일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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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참.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스스로가 어이없다는 생각에 실소가 피식 새어 나온다.

기껏해야 이따 점심은 뭘 먹을까, 집에서 언제 나가야 지하철을 바로 탈 수 있을까 정도의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만을 하던 내가, 어쩌다가 이 괴상한 일에 휘말려서는 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하고 있게 된 걸까. 아니, 그런데 얘네는 내 실연 소식을 또 어떻게 알고 있담! 내가 모르는 오늘의 ‘나’는 여기서 도대체 입을 얼마나 털어놓은 거냐. 모르겠다, 수습이고 뭐고. 일단은 뭐라도 좀 먹으면서, 나한테 뭐라고 하는지나 먼저 좀 들으면서 상황을 살펴 보자.

어쨌거나, 결과가 빤히 보여 아무 손도 못썼던 과거의 순간보다는, 뭐라도 나서서 할 수 있는 현재로 온 것만 해도 다행이야. 그 이상한 놈한테 재밌는 볼거리를 선사해 줄 마음은 없지만 더 이상은 내가 답답해서 안 되겠어. 또 멍청히 질질 짜고만 있지는 말아야지.

육개장을 제대로 먹기도 전에 타임 리프를 한 탓에 여전히 배가 고팠던 인혁이 허겁지겁 젓가락을 집어 드는 찰나, 그나마 그와 가장 친분이 두터웠던 동창 하나가 말을 건네 왔다.

“야.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잘 헤어졌어. 바람피우는 쓰레기 같은 놈, 지금이라도 걸러서 다행이지.”

아니,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나 아니었던 나’가 그 사이 연애사 셀프 털이를 좀 심하게 했나 보네… 아, 적응 안돼. 

“그런데 그거 아니어도 너네 어차피 만날 만큼 만나지 않았냐? 솔직히 마지막엔 너도 식은 거 눈에 보이던데.”

그런가? 금시초문이다. 나만큼 한결 같은 사람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별로 친하지도 않은 놈들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자꾸 말을 붙이는걸까! 

한 마디 쏘아붙일까 했지만, 우물쭈물 하다가 결국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하기는. 하린이도 나한테 너 때문에 힘든 티 종종 내긴 했다. 본인은 착한 척, 아닌 척 다 해놓고 걔도 결국 바람이었던 게 나도 지금 어이가 없는 거지.”

나보다는 하린과 친하게 지냈던 여자애의 말. 이건 또 처음 듣는 얘기다. 아니, 힘들면 내가 힘들었지, 매번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다 지 맘대로 했으면서 네가 대체 뭐 때문에?

“근데,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것도 좀 웃기긴한데, 귀엽긴 했었던 것 같아, 걔.”

아니, 다 헤어진 마당에 귀엽단 얘기는 해서 나더러 대체 어쩌라고? 순간 짜증이 최고조에 다다랐지만… 그래, 뭐. 일단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들어나보자.

“내가 언젠가 한 번은 하린이랑 같이 쇼핑하러 갔는데, 그날따라 빨간 옷이란 옷은 다 한 번씩 거울 앞에서 대보더라고? 갑자기 뭔 바람인지 물어봤더니, 너가 빨간 옷 잘 받는다고 칭찬해 줬다던데? 그리고는 헤헤 거리던 걸 생각해보면, 걔 하는 짓 진짜 귀엽긴 했는데 말이야.”

빨간 옷? 그 얘기를 들으니, 인혁은 세탁기 위, 하린의 마지막 모습이 또 아른 거리는 듯하다. 

동시에 흠칫한다. 내가 그랬던 적이 있었나?. 뭐,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인혁이 잠깐 기억을 되짚어보는 사이, 그가 앉은 테이블에 갑작스러운 정적이 찾아온다. 한 마디씩 말을 얹던 입들은 황급히 다물어진다. 미간을 찌푸린 채 골몰하던 인혁의 눈은, 다른 여느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가게의 입구 쪽을 향한다. 인혁의 동공은 곧 두 배쯤 커진다. 

유하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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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냅다 던져버린, 휴대폰 화면에서 봤던 두 얼굴과 함께 있는.

 


“야, 야, 너 괜찮냐?”

넋을 놓고 문 쪽을 쳐다보던 인혁은 어깨를 툭툭 치는 동창의 손길에 정신을 차렸다. 손길에 놀라 눈을 감았다 뜨자 두 얼굴과 함께 있던 곳엔 하린 혼자 서서 몇몇 동창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어어…”

뭐지, 꿈인가. 

헤어진 연인 사이건 뭐건 당장 겪은 꿈 같은 기묘한 상황에 머리가 복잡한 인혁은 대충 대답하며 젓가락을 집어 안주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한 의미 없는 행동에 불과했지만, 함께 떠들던 동창들은 새삼 헤어진 그 둘의 관계를 상기한 듯 조금 전까지 하린을 물고 뜯던 것과 달리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하린의 입장과 동시에 분위기가 가라앉은 인혁의 테이블과 달리, 다소 소란스러워진 가게의 분위기는 곧 하린이 다른 테이블에 앉으며 일단락되는 듯했다. 

“잔 덜 비운 사람 누구냐? 잔 비워라!”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동창 하나가 테이블을 내려치며 일어섰다. 

“야, 이 자식 덜 마셨어!”

“밑잔 빼냐?”

기다렸다는 듯 부러 더 부산스럽게 행동하는 동창들이 술을 마구 들이붓는 모습이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마치 인혁 자신의 곁에 무언가 막이 하나 쳐져 있는 듯, 그들에게 어울릴 수도 없는 것 같았고 사실 별로 어울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생각이 든 순간, 인혁은 함께 앉은 동창들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인혁이 너 화장실 가게?”

주섬주섬 겉옷을 주워드는 인혁의 모습에 같은 테이블에 앉은 동창들이 일제히 그를 올려다 봤다. 그리고 주변 테이블에서 흘긋대는 시선들까지 더해 수많은 눈동자들에 부담스러움을 느끼며, 인혁은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게 웃었다. 

“아니, 나 오늘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냥 집에 가보려고. 너네끼리 재미있게 놀아.”

모두 그 말이 거짓말인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티내는 사람은 없었다. 하하하- 하나 같이 짠 듯이 인위적인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 몸 안 좋으면 가야지.”

“잘 가고, 나중에 연락해.”

“야, 인혁이 간대!”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 빈말을 건네는 사람, 그를 본 뒤 하린 쪽을 흘깃대는 사람이 있었다. 그 모든 불편한 것들에게서 도망치듯, 애써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인 인혁은 빠르게 가게 입구로 걸었다. 술집 특유의 빛과 소음, 소란스러움을 뒤로 하고 문을 나서던 그의 손목을 잡아채는 이가 있었다. 

“어디 가?”

하린이었다. 

이렇게 아는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곳에서 대놓고 손목을 잡다니, 인혁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다들 애써 모르는 척해주는 건지 아무도 그들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제야 안심한 인혁은 잡힌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아… 오늘 몸이 안 좋아서 일찍 가려고.”

대답을 해주면서도 참, 이상한 상황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쩌면 이 모든 게 꿈이었던 게 아닐까. 저만 당황한 꼴이 참 우스웠다. 그리고 제 손목을 잡아챈 여자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바람 현장을 들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주제에 이리 붙잡는 속내를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기분이 나빠 보인다?”

“뭐?”

요상한 말투에 바보 같은 소리나 하고 만 인혁은 제 귀를 의심했다. 대체 무슨 맥락에서 하는 말인지. 도저히 맥락을 따라갈 수 없는 말을 하면서도,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라 차라리 인혁 자신이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편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 황당한, 더해서 저를 알고 이 여자를 아는 모두가 조용히 숨죽여 그들을 바라보는(듯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저기, 나 너랑 할 얘기 없어. 일단 좀 나가자.”

수치심에 뜨겁게 달아오르는 귀가 느껴졌다. 최대한 정중하게 말을 골라 대답했지만 하린은 오히려 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지?”

말투도 조금 이상해. 인혁은 굳이 대화를 이어갈 필요가 느껴지지 않아, 잡힌 손목에 힘을 줬다. 그리고 마치 시멘트 속에 파묻히기라도 한 듯 꿈쩍도 않는 탓에 당황스러워졌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손목을 빼내려 해봐도 제 손목만 아파올 뿐이다. 

“이거 놔라.”

화를 눌러참으며 손목에서 시선을 돌린 인혁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라는 말만 반복하는 하린의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이 오싹했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여자의 얼굴이 점점 흐려졌다. 마치 블러 처리가 되듯. 눈, 코, 입의 형태가 점점 흐려지며 일그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눈을 몇 번을 깜빡여도. 

왜지, 라는 말을 반복하는 그녀의 목소리도 어째 점점 이상하게 들리는 듯했다. 하린의 목소리가 원래 저랬던가? 여자 목소리 같기도 하고, 남자 목소리 같기도 하고, 어린 아이, 혹은 노인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아니, 정확히는 여러 목소리가 점점 겹치며 기묘한 소리로 들리는 것 같았다. 

“손목… 손목 좀 노, 놔 봐…”

겁에 질려 가늘게 신음처럼 나오는 목소리는 신경쓰이지 않을 정도로 그저 이 기묘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계속해서 손목을 빼내려 몸을 비틀면서도 여자의, 하린이었던  ‘것’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아아아악!!”

점점 하나씩 지워져간 얼굴은, 그가 낮에 마주쳤던 ‘것’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 네가 원한 거잖아?”

멀리에서, 혹은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듯한 여러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마치 수십, 혹은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맴돌며 속삭이고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깔깔깔깔깔! 어디에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귀신이 웃듯, 아이가 웃듯 귀와 머리를 울려대는 웃음소리가. 

제발, 제발 이 꿈에서 깨게 해주세요. 뇌를 뒤흔드는 웃음소리 가운데에서 인혁은 누구인지 모를 존재에게 간절히 빌었다. 뭐든 좋으니, 누구든 좋으니, 대가로 뭘 가져도 좋으니 제발. 

“제발…!”

그리고 어느 순간, 눈꺼풀을 뚫고 들이닥치는 강렬한 햇빛과 날카로운 진동에 인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마치 잠에서 깬 듯 머리가 멍했다. 오후의 햇빛이 자취방의 작은 창을 넘어 방의 어둠을 살라먹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들어올린 스마트폰은 온 힘을 다해 진동하며 낮잠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고 있었다. 여전히 멍한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알람을 끄자 사방이 고요해졌다. 

덜컹, 덜컹. 

고요한 방의 정적을 가르고 무언가 큰, 이를테면 세탁기 같은 것이 둔탁하게 흔들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세탁기?’

의식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기시감에 본능적으로 날짜를 확인했을 뿐이다. 

며칠 전 그날이다. 

세탁기, 낯선 남자, 내 여자친구, 빨간 한 뼘짜리 속옷. 

창밖에는 여우비가 내리고 있었다.

 

 

 

The End


“신촌은 소설의 배경으로 삼기에 꽤나 매력적인 공간입니다. 보여지는 치기 어린 젊음과 변화 사이에 후회와 안주, 그리고 무언가 모를 익숙함이 한 데 섞여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현실과 가장 가까이 닿아있기에 오히려 더 마법 같은 일을 상상하게 만드는. 그래서인지 다섯 명의 에디터가 차례로 이어 엮은 <여우비>에는 재미있게도 각자의 현실과 각자의 마법이 그대로 담겨 나온 것 같습니다. 어떤 기억들은 죽을 만큼 얄궂어 영원히 곁을 맴돌지만, 다른 기억들은 지나치게 자연스러워 열심히 움켜쥐어도 손틈새로 달아나버리곤 합니다. 그 기억들의 소행으로 우리는 종종 행복해지고, 가끔 후회스러워지고, 또 문득 보고싶어지는 것일 테지요. 이 소설이 여러분의 어떠한 기억을 불러낼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기억이든, 잠시동안 가만히 꺼내어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하는 글이 되기를 바랍니다. 잠깐의 후회도, 순간의 기쁨도, 오래 곱씹게 될 애잔함도 모두 괜찮습니다. 여우비가 내린 그 다음은 오로지 당신의 순간으로 남겨두겠습니다.” 

 

<여우비>는 잔치에서 시도한 첫 릴레이소설입니다! 신촌을 배경으로 둔다는 점만 기본적으로 설정하고, 각 에디터들이 다음 순서를 지목하는 방식으로 이어 쓴 글입니다. 각 부분은 구분선으로 나누어져 있고요. 참여한 에디터는 (순서 관계없이) – 냠, 김나름, 바녕, 닐, 나무, 챌라또 – 이고, 특히 닐은 표지 일러스트를 맡아 주었습니다. 기존에 에디터들의 글을 읽어보신 분이라면 누가 어떤 부분을 맡아서 썼는지 다시 퍼즐을 맞추어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가 될 거에요:) 그럼 즐감하세요~!

 

*스크롤을 끝까지 내리면 순서와 함께 에디터의 한 마디가 공개됩니다 두둥

 

 

 

 

 

 

 

 

 

 

 

 

 

 

 

 

 

 

 

 

 

 

 

 

 

 

 

 

 

 

 

 

 

 

 

 

 

 

 

 

 

 

 

 

 

 

 

 

 

 

 

 

 

 

 

 

 

 

 

 

 

 

 

 

 

 

 

 

 

 

 

 

 

 

 

 

챌라또: 아니 근데 세탁기가 그렇게 충격적인가요? (세탁무새) 다들 빨간 속옷 안…입…ㅇ..? (읍읍)

  ↓

바녕: 인혁아…미안하다…행복해라…

  ↓

: 잔치 덕에 인소를 다 써보네요.. 재밌었습니당 그나저나 다들 오늘 뭐 드셨나요! 전 막국수 먹었어요ㅎㅅㅎ

  ↓

나무: (창작수업이라면 도망치던 궁문꽈생…) 함께해서 넘무 재밌었습니다 작가님들 최고예요🧡 

아, 그리고 저 진짜 뒤풀이 기다려요😇

  ↓

김나름: 샤이니가 부릅니다, 루시퍼. 

마치 유리성에 갇혀버린 삐에로만 된 것 같아

 and

: 좋은 기회 감사합니다. 영광이네요.

챌라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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챌라또

잔치의 시선으로 신촌의 장면과 사람, 장소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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