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세상에서 가장 큰 시집
필자는 매주 수요일마다 실습을 한다. 모형설계제작이라는 전공과목인데, 밀링(Milling) 머신으로 알루미늄 합판을 가공하여 모터의 회전 운동을 직선 운동으로 바꿔주는 기구인 리니어 액추에이터(Linear Actuator)를 만드는 것이 실습의 목표이다. 그렇게 열심히 쇠를 깎고 집에 가서 샤워를 하면 머리에서 쇳가루가 떨어졌다. 손에선 특유의 기름 쩐내가 나는데 이건 잘 지워지지도 않아 그냥 공대의 훈장으로 남기기로 마음먹곤 했다.
이런 공대생으로 살다 보니 한글보다는 숫자가 편해졌고, 글로 적은 문장보단 기호가 나열된 수식이 익숙해졌다. 심지어는 손으로 하도 글을 쓰지 않다 보니 쓰기 능력이 점점 퇴화되어 악필이 되는 경지에 이르기도 했다. 이렇게 평소 삶이 문학과 영 멀어 보이는 필자는 유독 시를 좋아한다. 그 계기를 설명하자면, 아주 어렸을 때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바쁜 현대인들은 그런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길게 읽는 것을 싫어하므로 거두절미하고 3줄 요약하겠다.
1. 엄마가 사서 선생님. 따라서 어렸을 땐 거의 도서관에서 자람.
2. 책 읽기 싫었는데 눈치 보여서 읽게 됨. 그래서 빨리 끝나는 시집을 고름.
3. 그러다 보니…
쓰다 보니 어쩌면 3줄 요약이라는 것이 시의 본질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말 이-만큼 모아서 한 문장에 꾹꾹 눌러 담는 것이 마치 할머니가 주신 고봉밥 같다. 내가 시를 좋아하게 된 까닭도 이런 압축성과 함축성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나저나 요즘 날씨 추워지는데 할머니 잘 계시려나. 올해 코로나 때문에 구순 잔치도 못 했는데.
뭐 아무튼. 머리말은 이쯤에서 마치고 본론으로 들어가볼까. 오늘 여러분들께 소개해 드리려는 것은 한 권의 시집이다. 무려 350km짜리 시집.

시집 표지
“서울시청에서 주관하는 ‘세상에서 가장 큰 시집’ 프로젝트는 2016년부터 시작되었다. 지하철의 스크린도어 교체 사업과 맞물려 추진되었으며, 기성 시인과 시민들의 시를 공모받아 스크린도어에 전시하는 프로젝트이다. 이를 통해 지하철을 이용하는 모든 시민은 일상생활 속에서 다양한 양질의 시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는 새내기 당시 대흥역으로 통학을 하곤 했다. 아침 10시 30분 수업을 듣기 위해 정확히 10시 17분에 대흥역에 도착하면, 서강대 후문까지 10분 안에 주파할 수 있는 루트를 생각하기 바빴다. 당연하게도 스크린도어에 적힌 시를 감상할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신촌역 2호선 막차를 타러 뛰어가는 길에도 시 감상을 위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있었다고 해도 보통 술에 취해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뭐…
시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나도, 별 관심을 주지 않고 무심코 지나간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평소 시에 별 관심 없으신 분들은 오죽할까. 그래서 필자의 잔치 마지막 글로 이 시들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아래에 신촌역, 이대역, 홍대입구역의 스크린도어에 적혀져 있는 시들을 필자의 짤막한 감상과 함께 소개한다. 필자는 시에 대해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며, ‘좋은 시’라는 것(그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을 가릴 수 있을 만한 위인은 더더욱 아니다. 고로 선택된 시들은 100% 본인의 취향이며 독자분들의 취향과는 많이 다를 수 있다. 참고로 내가 좋아하는 시들은 너무 어려운 비유를 사용하지 않고, 너무 길지 않으며, 상황이 잘 상상되는 시이다.
필자가 이 시를 읽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면 끝까지 읽으면 되고, 시만 마음에 든다면 시만 읽어도 좋다. 심지어 그냥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다음으로 넘어가면 된다. 그것 또한 모두 시의 매력이니까.
신촌역

신촌 -> 이대 방향
파동이 공명하기 위해선,
우선은 서로 다른 파동 두 개가 접하여야 한다.
그러곤 흔들리는 것이다.
서로의 고유주파수가 일치하게 될 때까지.
간혹 파동이 감쇠할 때도 있다.
진폭이 작아질 때도 있는 것이다.
그래도 그게, 뭐 거창한 잘못을 한 것은 아니다.

신촌 -> 홍대 방향
촌놈이 서울로 상경했다더라, 가족들 머리에 이고서.
잘 못하는 술은 대충 털어 넣고
매스꺼움 참으며 집을 밟았다더라.
이곳저곳에서 넉넉히 멍을 챙겨 돌아오시는 길
그래도 애들 먹일 간식거리는 잊지 않았고.
뱃사람은 땅멀미를 한다고 하더라.
분명 그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으리라.
눈 잠깐 붙이니 금방 동이 튼다.
곧 썰물이다.
아버지 떠날 채비하신다.

신촌 -> 홍대 방향
그래, 그때 우리 서로의 공간에 대해 이야기했었지. 혹은 간격에 대해, 너와 나의 팔십 센티 정도의 거리에 대해서 말이야.
또 언젠가 그 얘기 했었나, 우리 손잡는 것의 필연성에 대해 말이야. 잘 데워진 마음이 발생시키는 어떠한 인력과 척력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그니까 우리-
무슨 말인지 알지.

신촌 -> 홍대 방향
구름 하나에 호수 하나만큼의 물이 들어있단다.
그 커다란 게 하늘에 둥실 떠다닌단다.
높은 곳이 질려 땅으로 낙하하는 날에는
바닥이 신나서 건반을 친단다.
우리 비 오는 날 호수로 산책을 가자.
먼 길 돌아왔는데 반겨주러 가자.
네가 우산을 챙긴 듯하여 나는 빈손으로 간단다.
이대역

이대 -> 아현 방향
이걸 언제 다 갚나 싶을 참에
틈틈이 전화하면 이자를 깎아주신다길래.
목소리 듣다가,
엄마 목소리 듣다가
더 대출받다가..

이대 -> 신촌 방향
여름의 장맛비에게 당부하길,
함부로 봄바람을 그리워하지 말 것.
불어 간만큼 결국 불어오니까.
새싹의 기다림은 항상 적당하다는 것.
그러니 부디 너무 바쁘게 살지는 말 것.
가끔은 붉게 물들 것. 너를 그리던 볕과 잠시 머물다가
어느 여름날 빈손이어도 좋으니 내게
내려오기만 할 것.
번져 오기만 할 것.

이대 -> 신촌 방향
안아달라고 했다, 말랑거리는 마음이 싫어서
까끌한 껍데기를 너는 감아달라고 했다.
사랑은 곡선이라는데 위로 뻗는 법밖에 몰라서
바람 잘 날 없이 철썩여도
흙보다 부드러운 뿌리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래, 무고한 우리는 잘 살아가고 있다.

이대 -> 신촌 방향
길이 위로 오를지 아래로 꺼질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미분해 보면 알지요.
양이면 열심히 오르고
음이면 조심히 내려가도록 합시다.
당신, 어느새
제 행동의 기준이 되셨습니다.
아, 그것도 미리 알고 계셨다고요?
홍대입구역

홍대 -> 신촌 방향
사실 무게를 나눠 갖는 게 일이 될 순 없다.
무게의 단위는 힘(N, 뉴턴)의 단위이므로 일(J, 줄)이 되기 위해선 거리를 곱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뭐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렇다는 뜻이다.
단위로 인해 빵점 처리를 당한 슬픔을 그대들은 모른다.

홍대 -> 신촌 방향
논산 훈련소의 연병장 고목 아래 민들레가 한가득 피어 있었다. 날이 좋은 날에는 민들레 씨가 눈꽃처럼 나리기도 했다. 어느 주말 민들레에 관한 글을 써볼까 하여 공책을 펼쳤다가 엄마 보고 싶어 울었다. 그러곤 창으로 바람을 들였다. 어떤 숨들이 내 몸을 통과해 갈지 궁금해했다.
봄은 얼마나 남았는가, 너는 얼마나 멀었는가.

홍대 -> 합정 방향
기다란 직사각형의 모포가 있다.
쿰쿰한 냄새가 나는 국방색의,
이게 정말 보온 효과는 있나 의구심이 드는 그런.
6시에 기상하고 나면 아침 점호가 시작되기 전까지 이걸 곱게 접어야 한다.
이쪽은 내가 잡고 저쪽은 네가 잡는다.
둘이서 같은 곳으로 접어야 한다.
튀어나온 부분은 눈치껏 챙겨 넣어줘야 한다.
먼지가 많다면 힘을 줘 털어주어도 좋다.
허나 서로 타이밍은 같아야 할 것이다.
내 것을 끝내고 나선 당연히 네 것으로 향한다
누구 하나 말없이.

홍대 -> 합정 방향
살면서 누릴 수 있는 너무나도 큰 행운이다.
윤동주의 서시를 지하철에서 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오늘 밤 별이 바람에 스치울 때, 내 뺨 안에 은하수가 고일 것이다.
자기 전에 맥주 한 캔 마시겠다는 말이다.
신촌, 이대, 홍대역에 당도하실 독자님들이 앞으로 스크린도어 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셨으면 좋겠다. 그러다 이 글에 실린 시들을 직접 만나게 되면,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끝으로, 필자가 신촌 생활을 하다가 적은 시를 소개하며 필자의 마지막 잔치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빨간잠망경
– 에디터 황도
쏟아지는 비문들 속에서
너는 태어났다
가령 건강하자 아름답자
행복하자
더할 나위 없도록
설레어 건넨 미소와
처음 맞잡은 손과
위하고 기리는 말들 속에서
수줍게 미분된 마음들을 모아
너는 솟아났다
길게 늘어뜨린 오후
늦지 않게 도착하여
온갖 향기들과 거닐다
다른 걱정은 놓아버리고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여기서 모두
행복하자
잠망경,
그리고 당신

에디터 닐, <탄생>, 2021
신촌역
매일
이대 방향 05:32 ~ 23:50
홍대 방향 05:39 ~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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