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연세대학교 서문 자취촌, J씨의 자취방
연세대학교 서문을 따라 가지처럼 뻗은 골목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이곳저곳 늘어선 천차만별의 건물들이 눈에 띈다.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빛바랜 벽돌집이 있는가 하면, 반짝반짝 광택을 자랑하는 회색빛 빌라가 뽐내듯 서있다. 각기 모습은 다르지만 이러한 대부분의 건물들의 공통점은 부모의 손을 잠시 떠난 학생들의 안락한 자취방이 되어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취촌 특유의 조용하지만 포근한 분위기에 취해 힘든 줄도 모르고 오르막길을 걷다 보면 오늘의 주인공인 이제 막 자취 1년 차에 다가가는 뜨내기 자취생의 ‘플레이스’에 다다른다.

어떤 공간에서 느껴지는 고유한 느낌은, 그 장소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보여준다. 모든 공간은 그 사람 고유의 분위기와 색채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나만의 공간을 꾸민다는 것이 설레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유에서 누군가의 공간에 방문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과도 같다. 그렇다면 과연 이 친구의 색채는 무엇일까. 이 친구의 공간에서 풍기는 느낌은 무엇일까. 매일 만나 이제는 친근함을 넘어 지겹다시피 느껴지는 평소의 느낌과는 달리 다소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본다.
똑똑똑~
하나,
둘,
셋!
!!!!!!!!!

충격 실태 하나. 혼자 사는 것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널브러진 신발들

충격 실태 둘. 고스란히 남겨진 설거지 거리와 쓰레기들 (feat. 압사당한 음쓰봉투)
…..? ?!?!?!? 아니,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건 마치, 폭탄 맞은 듯 어질러진 모습에 급기야는 엄마로부터 방 청소 포기 선언을 하게 만든 학창시절 내 방의 모습이 아니던가! 눈앞에는 내가 상상했던 설레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정리되지 않은 채 빽빽히 채워져 있는 신발들,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좁은 공간, 그 좁은 공간에 널브러진 각종 쓰레기와 옷가지들, 쌓여 있는 설거지 거리 등등…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집주인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바쁜 학교생활 속 자신을 위한 찰나의 여유를 즐기고 있다는 매우 합리적이고 타당한 변명과 함께 말이다.

엄마_고함_1초_전. jpg
한국 사회에서 자취하는 대학생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비로소 그들에게 고등학교 때와는 다른 실질적인 ‘자유’가 허용된다는 것.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빽빽하게 짜인 시간표의 틀에서 벗어나 자율적으로 내 시간을 활용할 수 있고, 교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벗어나 넓은 캠퍼스를 누비며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이겠지.
그리고 그렇게 주어지는 자유 중 가장 바랐던 자유는 아무래도 ‘부모님의 손길과 시선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닐까. 나 역시 수험생활을 겪어본 한 명의 대학생으로서 간절히 바라왔던 자유이기도 하다. 당연히 부모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은 자녀를 향한 사랑임을 알지만 집을 떠나 나 혼자, 그것도 나만의 공간에서 내맘대로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한번쯤 꿈꿔온 로망일 것임을 확신한다.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망각한 청소기…여기에 잠들다…
하지만 정작 그때의 우리는 왜, 자유에는 항상 책임이 뒤따른다는 것을 잊는 것일까. 부모님의 품을 떠나 나 혼자 산다는 것, 나만의 공간을 꾸민다는 것은 결국 그 공간을 책임질 사람은 오로지 나 자신이라는 것과 같다. 일찍 일찍 다녀라, 늦잠 자지 마라, 방 좀 치우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벗어난 꿀맛 같은 자취 생활도 잠시, 집에 돌아왔을 때 문을 열면 느껴지던 온기가 그립다. 이제는 귀가를 환영하듯 집안 가득히 비추던 거실의 환한 불빛 대신 현관의 조그만 전등만이 무심하게, 그것도 아주 잠깐 기척을 해준다. 뒤이어 전자레인지에 즉석식품이 데워지기를 멍하니 기다리다 보면 온 정성이 담긴 뜨끈한 집밥에 대한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가끔 새벽 감성에 취해 부모님 생각에 잠이 드는 밤에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며 눈물 젖은 잠자리에 든다.

내 친구는 이슬만 먹고 사나보다.
침대에 걸터 앉아 고갯짓 한 번이면 다 보이는 방을 느릿느릿 한 바퀴 빙 둘러보니, 처음 들어올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여러가지 잡동사니들이 늘어져 정신 없어 보였던 방이 모순적이게도 어딘가 살짝 비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제서야 저의 방이 살짝 부끄러워진 듯 주섬주섬 방을 치우기 시작한 친구가 괜히 짠해 보이려고 하는 순간,
“야, 그래도 여기가 좋은 이유가 뭔 줄 아냐? 궁금하면 일로 와봐.”

라는 말과 동시에 블라인드와 창문, 심지어는 방충망까지 시원하게 열어젖힌다. 뭐 대단한 게 있을까 하는 생각에 몸을 일으켜 창문에 다가간 순간, 어느덧 해는 지고 푸르스름한 하늘과 함께 까마득한 자취촌을 비추는 영롱한 반달이 눈에 가득 찬다. 집밥이 생각날 때마다, 가끔 외로움에 울적해질 때마다 위로가 되어주는 존재라고 한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수많은 자취촌의 어딘가에서도 같은 고민에 창문을 열어젖힌 채 하늘을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과 함께.
어딘가 공허해 보이던 그 방이 어스름한 저녁달의 빛으로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 장소 협찬을 흔쾌히 허락해준 연세대학교 2학년 정 모 학우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자취생활 화이팅! 우리 존재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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