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혹스턴(HOXTON)
나에게 봄은 모순적인 계절이다. 무채색에 가까웠던 세상이 연두색으로 물들고 길가의 나무들은 앞다투어 꽃망울을 틔워,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봄의 한가운데를 거닐다 보면 자연스럽게 들뜨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 그러나 잠시 들뜬 마음의 스위치를 탁- OFF에 놓고 나를 자세히 뜯어보면 내 주변에 짙게 깔렸던 침침한 안개가 아직 다 걷히지 않았음을 어렵지 않게 인정할 수 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통통 튀는 봄을 맞이하려고 하지만, 사실 겨울 내내 혹은 살아오는 동안 켜켜이 쌓아왔던 걱정과 고민거리들을 털어내지는 못했다. 때로는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단 듯한 묵직함을 실감한다.
나는 이런 것을 뭉뚱그려 검은 생각, 혹은 검정색 감정이라 부르는데, 아무튼 올해는 끈질기게 들러붙었던 이놈들을 떼어내지 못한 채 찜찜하게 봄을 맞이했기에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우울감에 매몰되어 허덕일 수는 없는 법이다. 기분 전환도 할 겸, 학교 근처에 조용하고 혼자 가기 좋은 카페를 찾았다. 오늘의 주인공이자 차분한 검은색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카페, ‘혹스턴(HOXTON)’이다. ‘여기는 검정색이 두드러지는 곳이니까 내 검은 생각을 조금 두고 와도 별로 티가 나지 않을지도 몰라’, 이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다가 혼자 킬킬대며 이곳으로 향했다.

혹스턴임을 알려주는 것들
버스를 타고 연희교차로 정류장에서 내리거나, 연세대학교 서문에서 10분 정도 걷다 보면 작지만 진한 검은색으로 존재를 뽐내는 혹스턴의 입간판을 찾을 수 있다. 계단을 올라 2층에 도달하면, 하나의 조명이 강조하는 ‘HOXTON’ 글씨를 마주할 것이다. 아, 제대로 찾아왔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끼며 카페 안으로 들어선다.
카페를 떠날 즈음에야 찍을 수 있었던 바 테이블
크지 않은 공간에 검정색 톤 인테리어, 카페 전체에 묻어나는 원두 향, 흘러나오는 적당한 템포의 음악. 마음을 차분히 다스리기에 알맞은 장소라는 예감이 든다. 사장님과 직원 분이 건네는 인사를 받으며 앉을 자리를 정해본다. 주로 2인용 테이블이 놓여 있고, 커피를 추출하는 곳과 이어지는 바 형태의 넓은 테이블도 있다. 혼자 왔다면 이곳을 노리는 것도 좋겠다. 그러나 이미 몇몇 분들이 바 테이블에 앉아 계셨기에, 나는 입구 쪽에 위치한 2인용 테이블에 자리했다. 구석진 곳을 좋아하는 티가 났을까.

흰색 테이프로 수정한 메뉴 아래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마음에 드는 자리를 잡고서 메뉴판을 보러 카운터로 가 보자. 이날은 상당히 따뜻했는데, 그에 맞지 않게 두꺼운 옷을 입고 햇볕 아래서 한참 걷다 온 직후라 시원한 커피 한 잔이 간절했다. 지체없이 롱블랙 아이스를 주문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잠깐, 생각해 보니 점심을 걸렀잖아’ 자리에 앉아 한숨 돌리다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떨어진 당을 충전하기 위해 다시 카운터에 가서 사장님께 디저트 종류에 대해 여쭤봤다. 이곳에서 메뉴에 대해 조금이라도 궁금한 점이 생긴다면, 주저할 것 없이 사장님께 여쭤보자. MBTI에서 I가 늘 80%를 웃도는 나조차도 여기서는 사장님께 이것저것 편하게 여쭤볼 수 있었다. 조금만 궁금한 티를 내도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고, 설명을 듣고 있으면 사장님의 카페에 대한 자긍심을 얼핏 엿볼 수도 있다. 아무튼, 내가 간 날에는 솔티드 카라멜 버터바가 준비되어 있어 그것을 주문했다.
눈부셔!
주문까지 마치니 비로소 카페 내부를 찬찬히 감상할 여유가 생긴다. 처음 든 생각은, 카페가 짙은 색임에도 불구하고 강한 조명 없이도 꽤나 밝다는 것이다. 이 카페의 한쪽 면에는 넓은 유리창이 있는데, 이날은 날씨가 좋아서 자연광이 훌륭한 조명이 되어주었다. 흐린 날에는 어떨까 하는 사소한 궁금증이 남는다.
‘돌’보다는 격식을 차린 단어로 불러줘야 할 것 같은 생김새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이 수석(壽石)이다. 검은 자갈돌 위에 멋스럽게 전시된 수석이 그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이 벤치에 앉으면 아래 바닥에 깔린 자갈 덕인지, 야외와 연결된 것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검은 자갈과 수석은 인테리어의 포인트였지만 과하게 튀지 않고 카페의 전체적인 톤에 녹아들었다.

단정한 검정 테이블
자연광도, 수석도 멋있지만 이 장소를 가장 혹스턴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역시나 ‘검정’이 아닐까 싶다. 전체적인 인테리어는 검은색과 회색 톤을 사용했고, 무엇보다 테이블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이다. 네모난 검정 테이블과 네모난 검정 의자. 그렇다고 칙칙하다는 인상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검은색은 두려움, 죽음, 암흑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색채심리학에서는 검정이 심리적으로 편안함, 보호감, 신비감을 제공하는 색이라고 한다. 이곳에 와서 검은색이 가득한 인테리어를 본다면,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테이블과 의자가 곡선 없이 직선으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깔끔하게 선이 떨어지는 데서 오는 안정감이 검정이 주는 편안함과 맞물려 그 효과가 증대된다.
달콤쌉싸름한 오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하고 있으니 직원 분께서 커피와 디저트를 직접 가져다 주셨다. 너무도 목이 말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이스 롱블랙을 쭉 들이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잠시 인내심을 갖고 커피의 향부터 느껴보자고 나를 다독인다. 제법 짙고 무거운 향이 훅 올라온다. 카페 전체에 커피 내음이 진하게 배어있지만 커피잔에 코를 대는 순간 신선한 향이 다시금 느껴진다. 한 모금 마시면 쌉싸름한 감각과 향긋함이 동시에 입 안에서 맴도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아메리카노와 롱블랙 두 종류를 구분해서 판매한다. 둘은 제조 순서와 물 양에서 차이가 있다.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 샷 위에 물을 붓는 반면, 롱블랙은 아메리카노에 비해 적은 양의 물 위에 에스프레소 샷을 붓는다. 에스프레소에는 ‘크레마’라는 거품 층이 있는데, 롱블랙처럼 샷을 나중에 넣으면 크레마가 훨씬 잘 유지되기 때문에 깊은 풍미를 느낄 수 있다. 나는 맛으로 이 차이를 구분할 만큼의 커피 마니아는 아니지만, 확실히 혹스턴의 롱블랙은 우리가 기대하는 ‘커피 향’을 풍부하게 담았음을 알 수 있었다.
포크의 나무 손잡이와 디저트의 색깔이 깔맞춤이다. 의도된 것은 아니겠지만
목을 축였으니 자연스레 달달한 것에 손길이 간다. 솔티드 카라멜 버터바는 냉장보관했던 것이라 처음 집으려 했을 때는 딱딱함이 살짝 덜 풀려 포크가 잘 들어가지 않았다. 대부분 알 것이다. 이때 괜히 힘주어 집으려 하다가 접시 밖으로 음식이 팅~! 튕겨나가는 참사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오 분 정도 지나서 다시 시도하니 한층 부드러워져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 사장님께서 원래는 이것을 삼등분만 해서 손님들께 드렸다는데, 잘게 자르는 것이 먹기에 더욱 편할 것 같다고 생각하셔서 지금의 이 한 입 사이즈로 변경하셨다고 한다.
버터바는 바삭한 크러스트 층과 버터와 설탕 조합의 필링으로 이루어진 디저트이다. 이곳의 버터바는 솔티드 카라멜을 필링 부분에 첨가해 한층 더 독특한 맛을 낸다. 사장님의 멋진 배려가 담긴 한 입을 쏙 넣으면 재료들이 얼마나 조화롭게 작용하는지 알 수 있다. 이를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크러스트 층과 필링을 꼭 한입에 넣어보도록 하자. 담백한 크러스트와 솔티드 카라멜로 느끼함을 잡은 필링이 각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하면서도 서로의 맛을 보완한다. 게다가 시원한 아이스 커피와의 궁합은, 덧붙일 말도 필요없이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자부한다.
어느덧 시간을 보니 사람들이 퇴근할 시간이다. 아, 금요일 퇴근 시간 버스는 특히 나 같은 경기도민에게 있어서 죄악이자 최악이다. 이를 핑계로 조금 더 머무르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커피는 다 마신 지 오래, 디저트도 바닥을 보인다. 그리고 나는 독자 여러분들께 이곳의 논커피 메뉴를 소개할 의무가 있다. 사심을 가득 담은 합리화 끝에 메뉴판이 있는 카운터로 향한다. 논커피 종류는 어떤 것이 맛있나요? 궁금증을 가득 담아 운을 띄우니, 역시나 사장님께서 메뉴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 주신다. 이러저러한 설명을 듣고 이날의 두 번째 음료를 화이트 큐브로 결정했다.
휘적휘적 열심히
화이트 큐브는 층이 분리된 채로 나오고, 음료를 저을 수 있는 나무막대를 함께 주신다. 밑바닥까지 꼭 저어 드시라는 직원 분의 당부에 열심히 한 손으로 저어본다. 큰 얼음이 유리잔에 부딪히며 달각달각 청아한 소리를 내는 것이 꽤나 마음에 들어 일부러 많이, 크게 저었다.
화이트 큐브는 혹스턴만의 밀크티 이름이다. 사장님의 설명에 따르면 베르가못 얼그레이 티와 장미향 티를 사용해 제조하는데, 음료의 향을 맡으면 생각보다 장미향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맛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범주 안의 일반적인 밀크티에다, 가볍게 장미향이 더해져 한층 풍부한 맛을 낸다. 평소에 밀크티를 즐겨 마시는 나로서는 새로운 경험에 기분이 좋아진다.
검정이 가득한 카페에 한참을 앉아 있노라니,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앞서 말했지만 검정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는데, 이곳의 검정은 나를 편안하게 감싸는 듯했다. 혹스턴의 검정은 ‘포근한 검정’이라 할 수 있겠다.
빛과 어둠
이제는 떠날 시간이다. 나는 사장님과 직원 분의 작별 인사를 받으며 결국 들어올 때와 똑같이 검정색 감정들을 껴안고 밖으로 나섰다. 당연하게도 검은 생각은 단순히 검은 카페에 간다고 해서 떨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카페 안으로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을 보며 생각한 것은 있다. 나의 침잠한 기분에도 세상과 통하는 창을 낸다면 빛은 자연스레 스며든다는 것을. 이런 명백한 명제를 다시금 마음에 새기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는 성공이다.
검정색 감정들은 평생 나와 함께 살자, 지지고 볶으며.
혹스턴(HOXTON)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 91 2층
화~일 11:00 ~ 22:00 / 월요일 휴무
라스트 오더 14:30, 21:30
0507-1314-0442
인스타그램: @hoxton_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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