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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2020 · 09 · 30

139. 염리동 소금길

Editor 분홍이글루

“이렇게 하여 내 모든 길 위에서의 경험이 시작되었다.
뒤이어 벌어진 일들은 너무나도 환상적이었기에 여러분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잭 케루악, 『길 위에서 1』, 민음사

 

‘삶은 곧 여행’이란 진부한 비유의 끈질긴 생명력은 표현의 찰짐 보다는 인간의 삶이 갖는 한계에 있다. 누구도 끝을 모르기에 자신의 결말을 알기 위해선 미지의 길에 오를 수밖에 없다는 바로 그 점이 삶을 여행으로, 인간을 나그네로 만든다. 이 길은 누구에게도 중도포기를 허용해주지 않으며 온갖 불확실한 것을 더듬고 맛보게 한다. 게다가 걷는 이에 따라 모습을 달리 하여 자타의 것을 비교하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엇을 앞두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은 기어코 남과의 비교로 귀결된다. 그리곤 호방하게 쭉 뻗은 듯 한 타인의 고속도로와 비좁고 배배 꼬인 자신의 골목길을 등치시키게끔 종용하고 끝내 좌절하게 만든다. 그러나 걱정 마시라. 한 번 못났다고 영원히 못난 것은 아니다. 못난 길을 걷는 사람은 잘난 길로, 잘난 길을 걷는 사람은 더욱 잘난 길로 경로이동을 하면 그만이다.

끝없는 비교와 이동의 뒤에 남겨지는 것은 못난 길도 잘난 길도 아닌 버려진 길이다. 한 때 어떠했는가를 핏대 세우며 말해도 버려진 것의 주변엔 사람이 몰리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가 그토록 열심히 삶을 여행하는 것도 잘나 보이고 싶어서가 아닌 버려지기 싫어서 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우리네 삶과 똑 닮은 골목길이 있다. 아니 정확히는 그 일부가 남아있다.

이대역 5번 출구에서 나와 바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염리동이다. 염리(鹽里)라는 이름은 예부터 소금장수들이 많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단다. 

 

상경하기 전 고향이 떠오르는,
오랜만에 보는 오밀조밀한 골목

 

초입부터 저 멀리 언뜻 경사진 길이 보이는 이 곳은 평지부터 언덕배기에 걸쳐있는 달동네이다. 그 덕에 염리동 소금길은 평범한 산책로라기엔 다소 난이도가 있는 등-산책로 정도 되시겠다. 하지만 발길이 뜸한 탓에 외부의 방해 없이 나만의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기에 오히려 좋다. 이름 모를 온갖 자동차들, 버스와 택시가 뒤엉켜 바쁜 도시의 분주함이 흘러넘치기 직전인 대로변보다는 한적한 골목길이 내게 더 어울린다.

 

꽃이 피어나는 소금길
귀여운 캐릭터가 눈길을 끈다

 

위에서 에디터는 삶이라는 길 위의 미지와 그에 따른 불안이 인생의 본질인 양 이야기하였다. 물론 베일에 싸인 미래는 모두에게 두려운 존재일 테지만 본인의 경우에는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배가 된다. ‘어디로 가야하지’,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 ‘이게 아니면 어떡하지.’ 가끔씩 뭔가 알듯 한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조바심 가득한 본성은 이를 반갑게 맞이하지를 못한 적이 많았다.

이러한 천성을 받아들이고 스스로가 빠르지 못한 사람임을 인정하게 것은 얼마되지 않았다. 세상의 속도에 발맞춰 걷지 않기로 결심한 후로는 내게 주어진 길을 온전히 걸어내는데 집중하였다. ‘지금 내 앞에 놓여진 것을 모조리 누리고 가자.’ 이 단순한 한 마디는 그동안 사용했던 어떤 네비게이션보다 유용했다. 비록 최단거리를 알려주진 못해도 ‘어디를 가고 있는지’, ‘주변에는 무엇이 있는지’, ‘이 길을 한 번 더 가보는 건 어떨지’ 등 무수히 많은 제안을 건네 준 덕에 가장 빠른 길은 몰라도, 꽤나 많은 길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소금길에 들어서며 든 마음가짐 역시 이와 같았다.

 

위급상황 시
버튼을 2초 이상
길게 누르세요

 

소금길을 쏘다니며 마주친 곳곳의 이미지는 초입에서 느꼈던 것과 동일했다. 기본적으로 성인 둘이 나란히 서면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법한 너비의 골목들과 이를 기준으로 마주하고 있는 수많은 주택들. 좁은 틈새를 비집고 고개를 쳐 들고 있는 꽃들. 길목은 복잡해도 삶은 복잡하지 않았던 때의 공간과 매우 닮아있었다. 에디터의 이와 같은 감상을 알겠다는 듯이 어느 길바닥은 추억의 놀이판을 은근히 들이밀었다. 놀이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보는 눈이 없는 틈을 타 껑충대며 옛 기억을 밟고 놀았던 것은 비밀이다.

 

이거 이름이 뭐더라
어… 음… 땅따먹기!

 

동심으로의 회귀도 잠시, 초행길인 탓이었던지 결국 길을 잃고 만 에디터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왜 다른 길이 나오지 않지?’ 계속 같은 길을 빙빙 돌았던 에디터은 이렇게 된 이상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교통상의 편의로 이대역에서 산책을 시작했지만 소금길의 엄연한 출발점은 따로 있었다.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던 첫 산책 중 우연히 도착한 한서초등학교 앞에 설치된 또 다른 지도에 의하면 이 코스의 공식 시발점은 소금나루이다. 소금나루는 염리동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쯤 되는 공간인데, 서울시 범죄예방 프로그램 일환으로 조성되었으며, 방범대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설립되었다고 한다(마포문화재단). 소금나루로 향하던 중, 순간 RPG게임에서 첫 임무 수행을 위해 마을입구로 향하는 게임 캐릭터가 된 듯 한 기분이었다.
분홍이글루, Lv.1, 무직.

 

한서초등학교 앞 염리동 지도 2
앞선 지도에서 봤던 캐릭터가 재등장했다
이름이 있는지 모르겠다만 ‘소그미’ 어떨까

 

그런데 소금나루가 없다. 어찌 된 일인지 정말 없었다. 혹여나 ‘길치의 방황’같은 저주에 걸린 게 아닐까 조마조마해 하며 더욱 더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도 어플은 소금나루 언저리를 내 위치로 잡고 있었다. 더 이상 헛걸음을 반복할 수 없단 생각에 잠시 들른 근처 편의점 직원분께 여쭤보니 ‘그런 거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뭐지, 함정인가?’, ‘이 위치에 있는 편의점이라면 오며 가며 볼 수밖에 없을 텐데?’

이번 탐사는 망했다는 생각이 엄습하자 그간 언덕을 오르내리느라 쌓였던 피곤과 절망감이 한 데 모여 두 다리의 힘이 풀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간신히 가게에서 나와 눈에 가장 먼저 띈 인도로 직행하여 주저앉으며 생각에 잠겼다. 잠깐. 그러고 보니 소금길은 달동네에 위치해있는데 그 주변은 이상하게도 전부 브랜드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를 위한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한서초등학교와 그 옆 염산교회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동네의 조그마한 상가들은 현 시국이나 일요일인 점을 감안해보아도 영업 중인 가게가 너무나 적었다.

 

소금길 중간마다 이런 기둥이나 표지가 있다
 왜인지 모르게 듬성듬성 있을 뿐

 

그러다 ‘재개발 중인거 아닌가’란 생각에 이르러 벌떡 일어나서 황급히 검색해 보았다. 아, 맞구나. 그래서 헤맨 거구나. 왠지 땅따먹기 그림판을 아스팔트가 침범한 게 이상하다 했을 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너무나도 늦게 재개발 소식을 접한 본인은 남겨진 소금길의 일부로 돌아가 다시금 골목길을 살펴보았다. 이제 와서 보니 상가 중간 중간 재개발 비대위나 재개발반대 비대위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한 가게가 눈을 사로잡았다.

 

과거가 미래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
나쁘다할 건 없지만 마냥 좋지는 않다

 

한 뉴스에 따르면 염리동 골목이 소금길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8년 전 범죄예방디자인을 적용하면서부터이다(뉴스기사). 아직도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 벽화, 조형물은 그 일환으로서 범죄예방은 물론이고 근 몇 년간 많은 방문객을 이끌어내며 효자노릇을 톡톡히 했다. 다만 재개발이 진행되자 사람들의 치안을 책임졌던 소금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지금은 아주 일부만이 남아있는 상황이다.

이 모든 게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소금길이 사라질 예정이란 것은 미묘한 감정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도 지금은 전혀 다른 장소가 되었다. 멋들어진 아파트와 상가들이 자리한 나의 고향, 소위 잘난 곳이 되어버린 고향은 박수쳐줄만하지만 안아주고 싶은 곳은 아니게 되었다. ‘굳이 잘나야 하는 건가.’ 잘난 것으로의 길에 편입한 고향의 흔적을 바라보며 느꼈던 것이 오랜만에 되살아났다. 여기에도 집이 있고 사람이 있는 한 누군가는 씁쓸함을 느낄지도 모르는 일. 잘난 세상의 속도에 녹아내린 소금길의 마지막을 걷는 발걸음이 무겁다.

이런 생각이 드니 시작부터 괜한 애잔함을 풍기던 이 골목길이 마지막까지 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일부로 향수를 뿜어대는 것도 같았다. 그러자 이를 무시하고 지나치는 것도 예의가 아니란 생각에 서둘러 이곳의 흔적을 담아두어야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뭐가 가장 좋을까 하다가 처음부터 에디터를 반겨준 본 녀석들의 단체 사진을 찍기로 결심했다.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삶이 곧 여행이자 길이며, 그 것을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간의 조건. 그 때문에 확실함을 얻고자 남과 비교를 하게 되고, 그 과정 중에서 각기 다른 모습을 일원화시킬 때 버려지는 것들. 이 과정이 좋다, 나쁘다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단지 우리 모두가 각자만의 길 위에서, 각자만의 속도로 삶을 여행을 하는 모습은 어떨지 상상해볼 따름이다.

 


염리동 소금길

서울 마포구 염리동 5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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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9.30 | 지도 크게 보기©  NAVER Corp.
분홍이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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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이글루

잔치의 시선으로 신촌의 장면과 사람, 장소를 기록합니다.

COMMENTS

댓글 1

  1. 블라디보스톡
    블라디보스톡 2020.10.01 17:37

    우아! 염리동 길에 대한 얘기도 좋았고, 맨 마지막에, 다른사람과 비교하는 과정에서 자기자신을 알아간다는 내용도 너무 와닿았어요. 글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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