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반서울
제 작품의 컨셉은 퓨전입니다. 이질적인 것들의 충돌과 조화로 만들어진 이 재미있는 공간은 사람들을 오래 사유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보이드와 솔리드가 충돌하여 아트리움을 만들어내듯, 전혀 다른 두 공간이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새로운 소통의 공간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반전 미(美)는 사람들에게 색다른 놀라움을 제공합니다. (중략)
건축학과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나도 어느새 수많은 건축인들의 잇-템인 충돌과 조화 – 즉 퓨전을 틈만 나면 들먹이게 됐다. 설계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면서도 뭔가 있어 보이는 소재는 단연 퓨전이다. 서로 다른 개념들을 충돌시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고, 그러한 공간을 이질적인 것들의 조화라고 포장하는, 건축에서의 퓨전이랄까. 나에게 설계란 늘 그런 것이었다. 익숙한 것들 사이에서 색다른 아이디어를 뽑아내야만 하는, 나를 아주 못살게 구는 애증의 존재.
이러한 이유로 인해, 나는 새로운 것이라면 치를 떨었지만 모순되게도 늘 새로운 것들을 찾아 헤맸다. 이를테면, 반서울?


2층에 꼭꼭 숨어있는 반서울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길을 잃었나? 싶을 때쯤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는 반서울의 입간판. 2층에 위치한 탓에 눈에 띄는 간판이 없으니 초행길이라면 지도를 보며 가는 것이 좋다!

2층에 올라온 우리를 먼저 맞이하는 건 반서울의 소개글
식사 시간에 맞추어 가면 높은 확률로 웨이팅을 해야 하기 때문에 기다리는 동안 소개글을 읽으면서 반서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이왕 하는 식사, 철학을 알고 먹으면 더 맛있지 않겠는가! 잠깐의 기다림 끝에, 예약 시간이 다 되어 식당 안으로 발을 들였다. 미리 예약을 하고 가면 좌식 테이블에 앉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단, 당일 예약은 불가하다. 물론 예약을 하고 가지 않아도 충분히 멋진 중앙테이블에 앉을 수 있지만, 타인과 마주 앉아 어색한 식사를 하게 될 수도 있으니 주의하자.


동서양을 섞어놓은 듯 한 독특한 인테리어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노출형 천장은 우리에게 탁 트인듯한 개방감을 선사한다. 자칫하면 답답할 수 있는 거대한 중앙 테이블의 한계를 높은 층고로 해결한 그들의 센스에 감탄했다. 한식과 양식의 퓨전요리를 하는 곳답게, 인테리어에도 많은 신경을 쓴 것이 보였다. 모던한 인테리어 곳곳에 한국적인 소품과 가구를 배치하여 ‘서울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주방은 오픈형으로 되어 있어 모든 조리 과정을 투명하게 볼 수 있었다. 요즘처럼 위생이 철저히 요구되는 시기에 알맞은 주방이랄까?

툇마루를 연상케 하는 창가 자리
들어가면 직원 분께서 미리 예약한 자리로 안내해주신다. 이곳이 바로 에디터의 소중한 한 끼 식사를 책임질 좌식 공간이다. 깔끔한 화이트톤 인테리어와 잘 어우러지는 목재 가구는 한국적인 향을 은은하게 내뿜고 있다. *캔틸레버처럼 쭉 뻗어있는 바닥은 마치 한옥의 툇마루를 연상케 한다.
*캔틸레버란, 한쪽 면은 벽체에 고정되어 있고 다른 한쪽 면은 쭉 뻗어 있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형상의 구조체를 일컫는 건축 용어이다.


아기자기한 공간
서브 테이블 위에는 봄을 알리듯 생화가 어여쁘게 숨을 쉬고 있었다. 따뜻한 공기를 느끼며 잠시 작은 봄을 만끽했다. 옆에는 손님들을 배려하는 맘씨 좋은 담요가 대기 중이었다. 온기를 느끼고 싶다면, 포근한 회색 담요를 찾아보자! 손님들을 생각하는 세심한 배려에 덩달아 내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귀여운 오타가 숨어있는 메뉴판의 첫 장
메뉴판을 펼치면 가장 먼저 보이는 반서울만의 철학들. 곳곳에 숨어있는 오탈자들을 찾고 고쳐가며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오탈자들을 찾고 있을 때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주문을 해야 하므로! 반서울의 메뉴는 꽤 많기 때문에 무엇을 먹을지 고르는 것도 일이다. 바질 리코타 치즈를 올린 라구 페투치네, 바삭하게 구운 연어와 조개 베샤멜 소스 등..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메뉴들 중 한참을 고민한 끝에, 에디터는 ‘차가운 버터를 올린 흑돼지 등심’과 ‘구운 삼치를 올린 봉골레 파스타’를 선택했다. 두 번째 방문이었기에 첫 방문 때 보다는 메뉴 선택이 수월했다. 참고로 에디터는 첫 방문 때 레몬 갈릭소스로 맛을 낸 홍가리비 파스타와 핑크 흑돼지 안심을 먹었다! 어쨌거나, 주문을 마친 다음에는 기다리는 일 뿐!

차가운 버터를 올린 흑돼지 등심
15분 여 간의 기다림 끝에 나온 첫 번째 요리. 수원식 갈비 양념으로 마리네이드한 흑돼지 등심을 참나무 숯으로 구운 후 차가운 버터를 곁들였다.
잘 구운 고기에 버터 한 조각!
직원 분께서 일러주신 대로, 흑돼지를 썰어 그 위에 차가운 버터를 올려 맛보았다. 아 참, 버섯을 좋아한다면 가니쉬로 올라오는 구운 팽이버섯을 곁들여 먹는 것을 추천한다. 버섯의 향이 요리의 풍미를 더욱 더 살려준다.

등심 한 조각에 버터, 무순, 그리고 구운 팽이버섯
온갖 이질적인 것들이 내 입 안에서 마구 충돌하며 새로운 미(味)를 만들어낸다. 말 그대로 신(新)요리다. 차가운 버터와 뜨거운 등심의 충돌은 뜨거울 때 먹는 음식이 가장 맛있다는 내 편견을 깨부쉈다. 이들이 만나며 발생하는 온도 차는 마치 온탕에서 차가운 제티를 마실 때와 같은 희열을 느끼게 했다. 짭짤한 양념은 무염 버터를 만나 덜 짭짤하게, 그러나 더 맛있게 바뀌었고 고기의 육즙과도 함께 어우러지며 새롭지만 왠지 익숙한 맛을 낸다.

등심 한 조각에 된장 소스, 그리고 구운 팽이버섯
버터에 올려 먹는 것이 슬슬 물릴 때쯤, 옆에 숨어있던 된장 소스를 꺼내 올린다. 부드러운 버터와 달리, 된장 소스는 짭짤하면서도 매콤한 풍미를 더해준다. 양념 돼지고기와 된장 소스가 필승 조합이라는 것쯤은 모두들 알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기로 어느정도 단백질을 채웠다면, 다음은 면으로 탄수화물을 채울 차례 아니겠는가.

구운 삼치를 올린 봉골레 파스타
고기에 마음을 뺏긴 사이 잠시 잊고 있던 파스타. 뽀얀 자태를 드러내며 얼른 맛보라고 아우성이었다. 그냥 먹어도 맛있는 봉골레 파스타지만, 위에 올려진 삼치를 잘게 부셔 동죽과 함께 면에 올려 먹으면 더욱 풍부한 감칠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한 손으로 열심히 으깨는 열정 에디터
늘 최고의 맛을 추구하는 에디터는 직원 분의 추천이라면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열심히 뿌셔뿌셔!

첫 입은 여러분들께 양보~
오일파스타에 웬 생선이냐고? 이 파스타를 맛보면 그건 우리의 편견이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다. 신선한 삼치는 올리브 오일과 페어링이 잘 된다는 사실! 눈을 감고 찬찬히 음미하면, 올리브 나무가 가득한 지중해의 바닷가 마을을 여행하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짭짤한 삼치와 향긋한 올리브 오일, 그리고 쫄깃한 동죽을 한 입에 와앙 넣으면 그때부터 입이 즐거운 파티가 시작된다. 다만 여기서 에디터의 소신 발언을 해보자면, 전체적으로 맛의 균형이 잡힌 흑돼지 등심 요리와는 달리 봉골레 파스타는 먹다보면 리를빗 솔티-하기 때문에 두 요리를 번갈아가며 먹는 것을 추천한다.

조개껍질로 산을 쌓아도 되겠는걸?!
다 먹은 조개껍질은 따로 내어주는 접시에 담아 놓으면 깔끔히 먹을 수 있다. 신선한 재료를 사용해서인지, 자칫하면 비릴 수도 있는 해산물 요리였지만, 비린 맛은 하나도 없이 쫄깃하고 맛있었다.

반서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식사를 마치고 나가기 전, 한편에 작게 놓인 종이 안에 우리가 경험한 맛의 신세계에 대한 작은 보답을 하고 나가는 것도 좋겠다. 좋은 건 나눌수록 더 좋아지는 것 아니겠는가! 사소하지만 무언가를 끄적이는 이 시간이 훗날 우리에게 깊은 추억으로 남아, 추억 속 그 공간을 더욱 환하게 밝혀줄 것이다.
조심스러운 호기심과 동경심, 낯설지 않은 처음 마주한 풍경, 늦여름 새벽의 공기, 자정을 넘어가는 순간의 빛과 음악, 서로를 밀어냈다가 당기는 힘이 묘하게 느껴지는 장소. 이 모든 것은 반서울이 담아내는 모습이자 경험할 수 있는 흐름이라고 했다. 그 안에 뒤섞인 반서울만의 예술적 호흡과 질감은 투박한 질그릇 위 파스타에 담겨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분위기를 선사한다. 한국적이기 보다는 되려 서울스러운 요리를 담아내는 곳, 반서울.
현대와 전통이 교차하는 독특한 서울을 느끼고 싶다면, 반서울에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반서울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87, 2층
월~토 11:30 ~ 22:00 / 일요일 휴무
브레이크 타임 15:00 ~ 17:00 / 라스트 오더 14:30, 21:30
070-8882-0110
[…] 작성하신 ‘반서울’과 ‘알디프’를 보면 맛평가가 굉장히 상세하더라구요. 평소에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