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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2022 · 09 · 23

182. 포셋

Editor 홍

BGM ::  데이비드 최 (David Choi) – Enjoy The View

 

 

15시 #efe7db

 

노란 햇살에 버석해진,

빛바랜 종이의 시간

 

 연희동은 희한한 동네다. 떠올리기만 하면 베이지의 그 은은한 웜톤 색상이 생각나는 동네. 응답하라 1994의 하숙집, 청춘시대의 셰어하우스 같은 그런 은은한 따뜻함이 느껴지는 곳. 그러니까 시간으로 표현해보자면 딱 숫자 3 위의 시곗바늘 같은 곳. 연남동과 창천동 그 어느 사이의 시끌벅적한 시간선과 낮밤에 지친 에디터는 자연스레 연희동을 떠올린다. 

 박물관, 전시회, 북촌 서촌의 어느 거리 등 혼자서 사람 없는 곳을 잔뜩 찾아 한참을 헤매는 에디터 같은 사람들을 위해 오늘도 연희동의 거리를 대신 걸어본다. 그러니까, 햇빛에 잔뜩 말린 버석한 종이의 냄새같은 동네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검은색 가을 블레이저가 어색해지지 않을 무렵, 한쪽에는 이어폰을 꽂고, 옆에는 에디터를 위해 서울까지 친절히 올라와준 친구를 데리고 연희동의 포셋으로 향했다. 베이지와 가장 잘 어울리는 시간,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아 나른한 오후 세 시의 일이다. 

 


고작 다섯 걸음이었을뿐인데

 

 버스를 타고 연희동 자치회관 쪽에서 내리면, 멀지 않은 곳에 연희빌딩이 있다. 에디터와 친구는 괜히 카카오맵을 따라갔다가 동네 한 바퀴를 빙- 돌아버렸지만, 버스정류장에서 앞을 바라보면 바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된다. 기억하자, 다섯 걸음일 뿐이다. 

 

 

 한참을 빙빙 돌아 원래 왔던 곳, 빌딩 앞의 입간판을 보자마자 친구와 눈이 마주쳤고, 동시에 푸하하- 하고 웃어버렸다. 

 

우리 진짜 바보 같지 않냐

그러게 진짜 멍청해

뭐 어때 산책한 셈 치지 뭐

 

 그래, 따져보면 생각하기 나름이다. 한참을 빙빙 돌았던 바보 같은 짓도 새로운 동네를 탐색하는 여행자들에겐 그 헤맴조차 여정이 되고, 산책이 되고, 낭만이 되는데도. 여러분의 여정이, 때로의 헤맴이 에디터를 비롯한 독자들에게 낭만이 되기를 빌며 연희빌딩 내부로 들어간다.

 

그러니, #시작하는여행자여, 안녕.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그 옛날의 피아노학원이 있던 상가가 떠오르는 건물의 옛 풍경을 지나, 포셋이라는 간판조명을 보게 된다. 잔잔히 흘러나오는 조명만큼 잔잔히 바뀌는 복도의 분위기가 신기하다. 입구부터 [감성] #mood라고 자연스레 번역될 것 같은 분위기가 방문객을 반긴다. 

 새로 한 페인트칠이 아닌, 원래 건물 그대로의 색상인 베이지색 콘크리트 위에 POSET 이라는 글자가 삐뚤빼뚤하게 스티커로 붙어 있다. 밑에 조그맣게 써 있는 글씨는 자세히 들여다봐야만 읽을 수 있는 글자들. 12:00-20:00, MONDAY OFF, 라고 써 있는 손글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봐야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왜인지 입구로 머리를 들이밀고 들어오게 만드는 귀여운 방법인 것 같아 한참을 쳐다보았다.

 일부러 만든 정제되지 않음이 ‘엽서’라는 물건과 잘 어울린다. 원래 엽서라는 게, 낯선 공간에서 생각나는 사람을 위해 즉흥적으로 사서, 품에 안겨주는 재미가 있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단풍국의 단풍 엽서처럼, 크리스마스 시즌 명동의 스노우볼처럼, 첫 데이트날 혜화의 꽃다발처럼.

 그러니 정제되지 않은 마음들을 담는 엽서 도서관의 입구로 제격이다. 

 #낭만적이게도.

 

극장의 오프닝 시퀀스와 같았던 하나의 안내문

 

 입구에는 정중한 부탁 몇 마디가 정갈한 글씨로 프린트 되어 있다. 그마저도 엽서에. 공간에서의 모든 소음을 자제할 것, 스마트폰과 전자기기를 무음이나 진동으로 바꿔줄 것, 모든 대화는 작은 소리로 나눌 것, 상업적 용도의 사진을 금지할 것, 실내 마스크 착용을 반드시 할 것. 어쩌면 도서관으로서는 당연한 부탁이다. 이곳이 말 그대로 단순한 소품샵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들어가기 전 조용히 휴대폰을 무음으로 바꾼 에디터는 쓰지도 못할 목을 가다듬으며 드디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왜인지 반드시 좋아하게 될 것만 같은 공간에 대한 무의식 속 긴장이자, 정중한 예의의 표시였다.

 


활자 덕후에게 더할 나위 없던 날개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입에서 자연스럽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 공간은 말 그대로 엽서 도서관이었다. 눈을 사로잡는 네모난 엽서들의 향연. 온갖 사진들과 그림들이 그려진 엽서들이 철제 디스플레이에 걸려있는 모습도 장관이었지만, 이 엽서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고 있는 방문객들의 표정은 더 시선을 끌었다.

 온화한 표정들, 놀라움에 반짝거리는 눈들, 그리고 누군가에게 당장이라도 엽서를 쓸 것만 같은 손길들, 그 모든 것들이 이뤄내는 고요한 분위기들이 포셋을 이룬다. 

 좁지도 넓지도 않은 공간이지만, 이 공간은 때로 지나치게 광활하게도, 지나치게 비좁게도 느껴진다. 엽서를 선물해줄 저 먼 공간의 누군가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게 넓어지는 마음들과, 엽서를 구경하다보면 빨려들어가는 그 그림과 에디터 사이만의 유일한 공간들이 이 넓이들의 총합이자, 해답이다. 

 

 

 철제 프레임이라면 다소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포셋의 공기와 온도는 유난히도 후덥지근할 정도로 따뜻하다는 느낌이 든다. 은은한 조명과, 몽환적인 매장의 음악과, 수많은 작가님들의 사진, 그리고 그림이 담겨있기 때문이리라. 

 네모난 엽서들의 크기가 제각각이다. 보내는 이들의, 만드는 이들의 마음이 제각각인 것처럼. 어떤 네모는 장난스럽고, 어떤 네모는 감동스럽고, 어떤 네모는 감성스럽고, 어떤 네모는 감탄스럽다. 빼곡히 진열된 엽서들이 ‘엽서 도서관’이라고 쓰인 이 매장과 지나칠 정도로 잘 어울린다. 청구 기호가 적혀 일렬로 진열되어 있는 서가보다 다채롭고, 유물 번호가 적혀 큐레이팅 되어 있는 박물관의 상설전시보다 통통 튄다. 

 

장난스럽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은 네모

 

 한참을 넋이 나가 엽서들을 구경하던 에디터와 에디터의 친구가 동시에 눈이 마주치고는 바람 빠진 웃음을 내뱉는다. DON’T WORRY- BE HAPPY- 라는 노래가 절로 떠오르려다 어버버하게 되는 일종의 비틀린 유머 때문이다. 돈 해피, 비 워리. 얼마나 장난스럽고도 아름다운 말인가. 우리 인생을 자서전으로 내면 소설 쓰지 말라며 욕할 거라던 친구와 에디터의 대화가 떠오른다. 그만큼 기구했던 둘의 인생에 딱 어울리는 주젯말임이 분명했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 소설 같이 기구한 인생일 거면, 차라리 소설인 셈치고 주제가나 부르면 된다. 돈 해피, 비 워리. 우리가 행복하지 못할거라면, 그대들도 돈 해피, 비 워리 해버려.” 

 

 이런 명대사나 중얼거리는 주인공이 되면 되는 거니까. 단숨에 친구의 카톡 배경사진을 당당히 차지한 이 엽서가 그 날의 베스트 포스트였다. 그러니까, 웃기지만 때로는 슬픈 블랙코미디 같은 것들. 

 

 

 철제 디스플레이들 사이를 걷다 보면 중앙에 간단히 문구류를 판매하는 테이블이 있다. 블랙윙 연필, 미도리 펜슬 등이 모여있는 걸 보자마자 문구류 덕후 에디터의 볼에 홍조가 돌았다. 이곳은 문구류와 활자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다, 라는 확신과 함께.

 

엽서나 다이어리를 꾸미기 딱 좋은 스티커들

 

 

 공간 내부를 계속 걸어 들어가 끝에 닿으면, 모이(MOI) 라는 가상 실재 서점을 볼 수 있다. 우리의 모이는 책이라고 소개되어 있는 이곳은, 기록보관함으로도 쓰이고 있는 곳이다. 일부 개방되어 있는 사물함을 따라가보면, 사물함 앞에 적혀있는 구절이 적힌 책이 들어있다. 

 

한참을 사물함을 열며 문장들을 담다보니 닫혀 있는, 그러니까 열쇠의 주인이 있는 공간의 사물함들이 꽤나 궁금해졌다. 

 

 

 11,000원의 비용을 지불하면 한 달 동안 이 사물함들 중 한 곳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사물함을 어떻게 이용하는지는 개인의 자유에 따른 것이라고 하니, 저 닫혀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록들이, 마음들이 더욱 궁금해졌다. 하지만 언제나 열쇠로 잠긴 것들은 그 주인의 것. 지키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면, 언제나 지켜주는 이들 또한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마음 중 하나일테니까. 마음을 보관해주는 값으로 11,000원은 오히려 싸다.

 기록보관함이라는 말이 주는 괜한 안정감, 특별한 것에 대한 위안. 연희동 안의 엽서 도서관 안의 기록 보관함 안의 사물함 여러개들 안, 꼭꼭 담아놓고서는 열쇠로 잠가놓은 그것이 이 포셋이라는 공간을 더 특별하게 만든다. 

 에디터도 공간 하나를 대여해 기록을 보관해오고 싶었지만, 간단히 챙겨온 짐과 이미 손에 잔뜩 들린 엽서 탓에 발걸음을 돌렸다. 동시에 다음에 방문할 때는 어쩐지 반드시 이곳 열쇠와 손을 잡을 것이라는 강렬한 예감이 스쳤다.

 


저 열쇠들의 수많은 주인들은 어떤 마음을 담아냈을까

 

 

 수많은 이들의 발걸음이 비치된 테스트용 용지에 일종의 방명록처럼 잔뜩 남아 있길래 에디터도 몰래 흔적을 남기고 왔다. 이리저리 멋진 문장을 써내려 펜을 굴려 보다 결국 관광객처럼 다녀감-!! 같은 유치한 말을 뱉어내고는 펜을 내려놨지만, 이 따뜻한 공간에 나의 흔적 한 장에 되려 만족하자며 몸을 돌렸다. 

 때로는 생각을 거치지 않은 문장 하나가 더 마음을 잘 드러낼 때가 있다. 이를테면, 이 공간에 다녀간 그 사실을 기록하고 싶어 안달났던 그 당시의 에디터의 마음같은 것.

 

 

사람의 마음은 좀처럼 지치지를 않나봐요. 자꾸만 노력하려 하고, 다가가려 해요. 나에게도 그 마음이 살아있어요.*

*최은영,김세희,  [애쓰지 않아도], 마음산책, 2022

 

 언급했던 것처럼 지금까지의 에디터의 삶은 그다지 아름답지도, 행운이 따르지도, 술술 풀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을 사람이 싫어, 사람에게 지쳤어 라는 뱉으며 투덜대는 데 보내지만, 어쩔 수 없이 에디터는 인간을 애정한다. 일종의 설정값이다. 외로워도 슬퍼도 친구를 사랑했던 들장미 소녀 캔디처럼,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응당 거쳐야 할 일종의 관문일테다. 에디터의 마음은 좀처럼 지치지를 않는다. 자꾸만 노력하려 하고, 다가가려 한다. 에디터에게도 그 마음이 살아있어, 저도 모르게 엽서를 품에 한아름 안아 한 장을 뜯었다. 인간으로서의 숙명이었다.

 

***

 함께 와준 친구에게는 이미 한참을 글로 마음을 쏟아낸 적이 있기에, 공간을 걸으며 가장 많이 떠올렸던 친구에게 엽서를 쓰기로 애초부터 마음 먹고 있었다. 그래서 자꾸 고르다보니 이것도 잘 어울리고, 저것도 잘 어울리는 바람에 몇 만원이나 결제를 해버린 모양이었다. 몇 장은 에디터의 보일러실에, 몇 장은 함께 와준 친구의 선물로, 몇 장은 수신인을 위한 여분의 엽서로 고른 탓에 엽서 봉투는 이미 두둑해져 있었다. 

 


오른쪽 엽서 속 네잎클로버는 향수를 뿌려 향을 보내는 특이한 오브제

 

 그 엽서 중 하나를 골라 에디터는 포셋의 구석에 자리한 책상에 짐을 풀었다. 중앙의 문구류 코너에서 보았던 미도리 펜슬이 정갈히 놓여있는 테이블은 테이블 시계와 은은한 조명이 있어 엽서를 쓰는 데 안성맞춤이다. 마치 유럽의 어느 바에서 누군가를 떠올리며 나 이곳에서 널 생각해, 라는 말을 써 보내기 딱 좋은 공간처럼.

 

수신인의 행복을 빌며

 

 어떤 말을 적어야 좋을지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느꼈던 모든 것을 온전히 담아냈다. 이 공간에 와서 문득 당신을 떠올렸다고. 그래서 당신을 떠올리며 엽서를 골랐고, 당신을 위해 고른 엽서에 당신을 생각하며 편지를 쓰노라고. 단 하나의 가감없는 마음을 적는 것이 왜인지 포셋이라는 엽서 도서관에도 예의일 것 같았다. 누군가 애정을 듬뿍 담아 꾸며 놓은 마음을 망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한몫 했달까. 

 원래도 디지털 편지보다 손편지를 고수하는 아날로그형이라, 쓰는 행위는 익숙했다. 다만 이 가득한 엽서들에 둘러싸여 쓰는 경험은 다소 특별했다. 포셋에 오는 이들이 이 경험을 하며 문을 나섰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을 담는다.

 

***

  노란 햇살에 한참을 말려 버석해진 종이의 냄새를 기억하는가?

  따사로운 햇살 아래, 운동장에는 학생들의 웃음 소리나 공 차는 소리가 들리고, 도서관 서가에는 몇 사람 자리하지 않아 고요해 그 사이로 흐르던 냄새 같은 것들.

  그래, 오후 세시의 기억 같은 것들. 

  생각만해도 심장이 간질거려 몽글몽글해지고, 마음이 일렁거려 제자리에 똑바로 서 있을 수 없는 것들.

 


그리고 수신인의 답장

 

 때로는 공간이 한 해를, 그리고 그 해의 기억을 결정할 때가 있다. 그런 공간들을 생각하면 에디터는 늘 심장이 일렁거린다. 그래, 그러니까 오후 세시의 기억 같은 것들. 에디터에게는 5살의 놀이공원이, 6살의 만화 박물관이, 열여섯의 바다가, 열아홉의 영화관이 그랬다. 스물 둘의 에디터에게는 포셋이 그러할 예정이다. 

 정제되지 않은 여러 말들이 입 주변을 맴돈다. 대개는 흥분, 고마움, 들뜸의 단어들이다. 좋은 공간을 발견했을 때의 에디터의 습관이다. 그리하여 말을 고르다 만다. 많은 문장들이 지금의 문장보다 나을 수는 없다. 있는 그대로 표현해본다.

 그러니까, 연희동을 문득 사랑하게 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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