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한나책방
15시, #29771e
책방지기 한나와 함께하는
작은 서점 속 세계여행
위로받고 싶은데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에게 자문을 구하고 싶은데 내 경험을 공유하기 꺼려질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자연스레 책을 찾게 된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토록 원하던 고민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유난히 생각이 많아 머리가 아플 때, 마음의 짐이 무거워 속이 답답할 때, 내가 무작정 도서관이나 서점을 찾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옛날에는 교보문고, 알라딘 등과 같은 대형 서점에 방문하곤 했다. ‘이렇게나 많은 책이 있으니, 그중 하나는 읽고 싶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막상 서점에 들어가면 책은 많지만, ‘읽을’ 책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읽고 싶지 않아도 언젠가는 어쩔 수 없이 읽게 될 참고서나 수험서 칸은 발길도 닿지 않을 뿐더러, 너무 함축적이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시나 소설, 수필 칸도 빠르게 지나쳐버린다. 여행, 요리, 식물 키우기 등 흥미로워 보이는 주제의 책들에 잠깐 시선이 멈추지만 잠시일 뿐, 곧 지나가버리곤 한다. 젊은 스타트업 대표의 성공기, 정신과 의사가 이야기하는 우울증 극복 방법 등 성공한 사람들의 조언이 담긴 자기계발서 칸도 뒤적거려보지만, 누군가의 성공, 성장, 극복 이야기와 스스로의 인생을 비교하고 싶진 않기에 그냥 지나쳐 버린다. ‘책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떻게 내 마음에 쏙 드는 책은 한 권도 없지?’라는 불만을 품으며 에디터는 언제나 빈손으로 서점을 떠나곤 했다. 이렇게 방황하던 도중 알게 된 공간이 바로 서점 주인의 취향만으로 꾸며진 공간, 독립서점이다.
처음 즉흥적으로 방문했던 독립서점은 원목 위주의 인테리어의, 나무 냄새와 책 냄새가 섞인 향기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특유의 따뜻한 분위기와 기분 좋은 나른함, 그리고 안락함을 잊을 수 없었기에, 연희동의 독립서점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방지기의 이름을 내건 독립서점, 한나책방을 알게 되었다.

책방을 찾기 어려우면 하늘을 올려다보세요!
연희동 골목의 건물 2층에 위치한 책방은,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찾지 못하고 지나칠 수도 있을 듯했다. 에디터와 같은 길치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인지, 곳곳에 한나책방의 로고가 새겨진 올리브색 표지판들이 위치해 있다. 그냥 초록색보다는 조금 더 따뜻하고 차분한 한나책방만의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면 큰 유리 창문 속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이 보일 것이다. 그곳이 바로 한나책방이다.

가는 길에 마주한 올리브색 길잡이들
서점 내부에 들어섰더니 가장 먼저 책으로 가득 찬 책꽂이가 눈에 띄었다. 존재만으로 압도되거나 웅장하게 느껴질 정도로 큰 책장은 아니지만, 인문학 서적, 예술 서적, 에세이, 수필 등 여러 장르의 책이 자신들만의 규칙대로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어지러운 듯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책꽂이
흥미로운 제목과 눈길을 사로잡는 디자인을 가진 책들 사이, 마음에 쏙 드는 책을 찾기 위해 책꽂이를 구석구석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책을 들었다 내려놓고, 뺐다 꽂아가며 책꽂이를 톺아보던 중 일본어로 된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에디터는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모르기에, 이 책에는 손길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한나책방만의 고유한 특징을 알 수 있었다. 국내 서적 뿐만 아니라 해외 서적 또한 책방 구석구석에 위치하고 있음을, 세계 각국의 서적들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음을 말이다.

아쉽게도 그냥 지나쳐야만 했던 일본 소설들
맞은편 벽면은 아예 다른 공간으로 느껴질 정도로 완전히 새롭게 꾸며져 있었다. 책꽂이라기보다는 선반에 더 가까운 듯한 가구가 통유리의 채광이 가려지지 않도록 위치하고 있고, 책들 모두 표지가 보이도록 진열되어 있었다. 사진과 그림이 많이 실려있는 예술 관련 서적들이었기에, 방문객들이 구경하기 편하도록 표지와 속지 모두 잘 보이게 진열해두신 듯 했다.
다채로운 예술 서적을 구경할 수 있었던 선반의 왼쪽에는, 세계의 여러 도서관 사진들이 담겨있는 달력이 걸려 있었다. 또한 달력 위쪽에도 외국어로 된 독특한 세계지도가 붙어 있었다. 책꽂이와 선반, 그리고 달력과 지도를 구경하면서 에디터는 계속해서 책방에 세계 여러 나라들의 흔적이 묻어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고, 문득 책방 속 세계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사장님께 조심스레 “혹시 외국어로 된 책들은 해외에서 직접 구해오신 건가요..?” 라고 여쭤보았다. 사장님께서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시며 과거 샌프란시스코에 오랫동안 머물렀고, 그 외 다른 나라도 많이 다니셨다며 그 때 구했던 책들을 이곳에서 팔고 있다고 설명해주셨다. 그제서야 퍼즐이 맞춰진듯 책방에 묻어있던 외국의 흔적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표지부터 알록달록 휘황찬란한 예술 서적들
달력과 세계지도 왼편에는 엽서와 편지지, 마그넷, 책갈피, 노트 등 여러 문구류도 있었다. 문구류 덕후로서 알록달록한 엽서와 책갈피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에디터는 ‘오늘 기필코 마음에 드는 책 한 권과 그에 어울리는 책갈피를 하나 사가야겠다!’며 탕진을 다짐했다.

참새 방앗간 못 지나친다고,
에디터의 눈길이 가장 오랫동안 머물러 있던 벽면
참새같은 에디터에게 방앗간과 같았던 공간은 한 곳 더 있었다. 입구 바로 오른쪽의 살짝 들어간 곳이다. 가장 깊숙한 곳에는 고전, 인문학 도서,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의 책들이 몇 권 진열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오색의 엽서와 카드, 그리고 책갈피가 있었다. 책갈피를 예의주시하던 에디터는 딱 한나책방을 떠올리게 하는 마음에 쏙 드는 책갈피를 발견했고, 곧장 구매했다.

또다른 방앗간

This book shop is my type of place!
또 책방 한 켠의 바구니에는 할인중인 도서가 담겨 있었다. 왜 더 싸게 판매하는 것인지 궁금해져 사장님께 여쭤보았더니 구매한지 오래 돼서 표지색이 바랜 책이나, 사람들의 손길이 닿아 속지가 닳은 책들은 정가보다 조금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하고 계신다고 하셨다. 외관만 낡았을 뿐 책 속에 담긴 내용은 전혀 변함이 없기에, 헌책도 그만의 가치를 충분히 갖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사장님의 가치관이 책방 구석 한 켠에서도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표지만 낡았을 뿐, 그 속에 담긴 내용은 변하지 않았잖아요”

“헌 책과 새 책이 섞여 있어요.
외국책과 한국책도 공존하죠.”
가장 큰 창문을 등지는 자리에는 책방지기인 한나 사장님이 머무르며 손님들이 편안히 책을 즐길 수 있도록 한 발자국 뒤에서 바라봐 주신다. 간혹 의문에 사로잡힌 표정이 보이면 조심스레 다가가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시기도 한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시는 사장님을 보며 책방에 오는 길에 마주쳤던 몇 개의 올리브색 표지판이 떠오르는 듯 했다.

날이 밝았더라면 더 따뜻해 보였을 책방지기의 공간
한참동안 서가를 뒤적거리다 묘하게 끌리는 책을 한 권 발견했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만에 다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당한 두께, 심플하지만 믿음직스러운 표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제목, 그리고 손이 가는 대로 펼쳐본 페이지 속 마음에 들었던 한 문장까지. 이 책이라면 마음의 짐을 덜어내줄 것만 같다는 예감은, 곧바로 구매로 이어졌다.
책을 골랐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고민 끝에 구매한 책에는 책방 로고가 새겨진 도장을 찍을 수 있다. 대형 서점과는 다른 한나책방만의 매력이다. 먼 훗날 에디터가 책을 다시 펼친 후 첫 번째 페이지를 마주했을 때, 어디에서 산 책인지, 어떤 고민을 하면서 산 책인지 잘 기억하길 바라며 있는 힘껏 도장을 눌러찍었다.

책을 여권 삼아, 도장을 쾅
누구나 온전한 자신만의 공간을 필요로 한다. 아주 좁은 방 한 칸이라도 좋으니, 개인적 취향과 일생을 가득 담아둔 공간 말이다. 이곳이 책방지기 한나 사장님에게 있어서 그러한 공간이다. 세계 각국을 돌아다닐 때, 언제나 곁에 함께하던 책으로 공간을 한가득 채워 두고, 이를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으셨다고 한다. 서점을 구경하며, 사장님의 서재에 놀러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책방을 구석구석 살펴보며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사장님의 인생을 엿보고, 과거의 그녀와 함께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장님의 삶과 세계관을 알 수 있었다. 그녀만의 감성과 세심한 배려 또한 여실히 느껴졌다.

“서점의 중요한 역할은 무슨 책이든 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보다는 책과 조우하거나
혹은 자기 세계관에 접근할 수 있는 공간 기능을 조성하는 데 있다.”
-후지모토 소우-
오후 세 시. 열두시 쯤 먹었던 아침 겸 점심이 다 소화된 후, 나른하고 졸릴 시간이다. 식곤증으로 졸릴 때 책은 거의 수면제나 다름없다. 몇 장 뒤적거리기만 해도, 심지어는 끌어안기만 해도 곧장 단잠을 잘 수 있을 정도니까. 에디터는 그럴 때면 언제나 ‘지금쯤이면 누워도 되겠지? 이러다 소 되는거 아냐?’ 라고 생각하며 이불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럴 때일수록, 원래 있던 장소에서 벗어나 가까운 책방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졸음을 부른다는 핑계를 대며 책을 피하기 보다는, 누군가의 서재에 잠시 들러 새로운 책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서재 주인의 삶이 어땠을지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이것이 바로 연희동의 따스한 독립서점, 한나책방에 다녀온 후 바뀐 에디터의 생각이다.

한나책방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11나길 7-5 2층 201호
수-일 13:00~18:00 (월, 화요일 정기 휴무)
tel. 070-4123-7778
instagram. @hannasbooksh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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