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엘라도
엘라도,
젤라또!

BGM :: 스텔라 장 – L’amour, les baguettes, paris
18시 #9ff1ef
잔치에 들어온 지 어느덧 두 학기. 안 올 것 같던 마지막 마감은 다가왔고, ‘마지막’이라는 무게에 짓눌린 에디터는 몇 번이나 장소를 바꿔가며 고민을 하다, 결국 마감 직전에야 장소를 정했습니다. 마음을 정하고 나서는 오히려 수월했습니다. 에디터가 신촌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를 마지막 글로 쓰자고 마음 먹었거든요.
첫 대면, 첫 축제, 첫 행사들. 온갖 ‘첫’ 들의 향연 속 엘라도는 에디터에게 ‘첫’ 아지트입니다.

일주일에 족히 다섯 번은 보는 에디터의 동기이자, 동네 친구인 3분도 안 걸리는 거리, 심지어 하나는 같은 건물에 산다 둘에게 ‘엘라도 갈사람’ 이라고 묻는 것은, 어제도 지지고 볶은 당신들을 만나 산책을 하러 가고 싶다는 애정 표현이자, 지금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모든 할일들을 벗어던지자는 일종의 유혹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나를 숨 쉬게 하는 사람들을 향한 투정 같은 것들 말입니다.

사실 모두가 알고 있는 창서초 앞 ‘신촌 오빠네 옛날 떡볶이집’ 옆에 민트색 수제 젤라또집이 들어왔다는 말을 들은 건 꽤 됐습니다. 엄청나게 맛있는 젤라또 집이 생겼으니 가보자는 친구의 말에 그래, 하는 가벼운 말로 넘기고 방문을 미뤄두었던 것은, 어쩌면 하나의 좋은 타이밍을 잡기 위한 운명이었을 겁니다.

그 타이밍이란 바로 유난히 쌀쌀해지지 않던 초가을이었는데, 축제 전날, 잔뜩 들뜬 신촌의 열기는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고, 그 덕에 우리도 괜히 달뜬 오후였습니다. 칵테일의 딱 그만한 알코올로도 우리의 볼은 발그레해졌고, 집에 들어가기 아쉬워 조금이라도 더 놀거리를 찾아내는, 그러니까 딱 초등학생 때의 저녁시간 같은 날들. 저번에 말했던 그 젤라또집 가볼래? 하는 친구들의 말과 끄덕임 몇 번. 그 날 이후 에디터에게는 아지트가 생겼습니다.
장인 정신으로 다품종 소량생산합니다

모든 안내사항에는 하트가 붙어있습니다 ~ ♡

찬찬히 조금만 둘러보면, 비치되어 있는 대부분의 것에 안내문과 포스트잇이 붙어있는데 흥미롭게도 맺음말이 전부 빈 하트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울퉁불퉁 제 모양을 제대로 찾지도 못하는 빈 하트가 왜인지 빈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하트만을 찾아 제멋대로 사진을 찰칵 찍었습니다.

사진을 찍으러 열시가 넘어서야 방문했더니, 다시 젤라또가 만들어지는 시간이라 냉장고가 많이 비어보일 것이라며 멋쩍어 하시는 사장님의 말씀에, 냉장고 다 채워진 사진도 이미 예전에 찍어놨어요! 저 여기 단골이어서요. (웃음) 이라는 말을 전해드립니다. 사실 비어있다고 하신 냉장고도 이미 가득 차 있는 상태였지만 말입니다.

오랜만에 간 그래봤자 일주일만인 엘라도에는 벤치가 밖으로 밀려난 대신, 하얀 책걸상이 들어왔습니다. 벤치에 일렬로 앉아 15분 가량 젤라또를 먹고 나가던 우리에게 무려 30분은 족히 넘게 떠들 수 있는 자리까지 마련되니, 우리는 엘라도를 아지트로 삼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젤라또는 다 같은 젤라또인줄 알았는데, 매장 냉장고에는 커스터드와 소르베 칸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두 개가 뭐가 다른지 갸우뚱하고 있을 때쯤, 각 냉장고에 써 있는 안내문이 보여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커스터드는 생크림, 우유, 노른자 등의 원료로 휘핑, 숙성, 중탕 등 5시간 이상의 제조과정을 거친 고급 아이스크림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소르베는 생수, 과일, 우유를 base로 4시간 이상의 제조과정을 거칩니다. 모두 handmade로 정성들여 만든 high quality 아이스크림입니다. try some of these!!”
친구들은 장난스레 혀를 굴리며 하이-퀄리티 소르베를 먹어야 하나 고민된다 말하지만, 국문학도 에디터의 취향은 ‘고급 아이스크림’으로 향합니다. 새로운 것을 탐하지 않는 성향상, 언제나 초코, 그린티처럼 재미없는 것들만 골라대지만, 익숙한 것들은 좀처럼 실망시키는 법이 없습니다. 시선을 셔터박스에 가져다대면서도, 손에는 초코 젤라또를 든 채 한참 입맛을 다셨습니다.
9월의 어느날
사실 처음 이곳을 알았을 때에는, ‘벌레코코넛’ 같은 메뉴가 있었습니다. 닭발도 못 먹는 에디터는 기겁을 했지만, 언제나 품절이라 써 있던 이 메뉴에 우리는 ‘가위바위보 진 사람이 언젠가 한 번 먹어보자!’ 하는 다짐들이나 하며 킬킬대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혹시 모르죠, 벌레코코넛을 원하는 이들이 몰려온다면 다시 생길지도요!

반무인 매장답게 계산은 셀프입니다. 계산을 키오스크로 해야하니, 주머니에 묻어둔 종이돈은 잠시 넣어두고, 얇은 카드 한 장을 휴대전화 뒤에 챙겨다니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또 언제 즉흥적으로 이곳을 방문하게 될 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카드를 깜빡해도 걱정 마세요, 키오스크 아래의 번호로 연락 후 입금하면 되니까요!
계산을 마치면, 바로 옆 색색깔의 스푼 중 마음에 드는 하나를 집어 가면 됩니다.
가게 안의 사진을 찍는 동안, 몰래 자리에서 사부작사부작 무언가를 하고 있는 친구들을 발견했습니다. 뭐하냐는 물음에 잡지 사진을 도와주려고 한다는 말에 갸우뚱한 에디터가 다가가서는 한참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웃을 일이 없어도 웃다 보면 괜히 웃음이 나는 하루가 있습니다.
공간의 다정함은 어쩌면 방문객들의 다정함을 자극하기도 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이들의 장난기에 왜인지 울음이 날 것 같으니까요. 무언가의 벅참일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매장 한쪽은 유리벽으로 되어 있는데, 그 문에는 온갖 낙서들과, 사장님의 소소한 Q&A가 쓰여있습니다. 친구들과 요즘 유행하던 연애프로그램 출연자들의 낙서가 있을지 같은 실 없는 말들을 주고 받고는, 벽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섰습니다.

얼른 와서 먹으라는 친구의 말을 못 들은 체 하고 보드마카를 손에 꼭 쥐고 있었던 것은, 에디터로서 정한 마지막 장소에 흔적 하나 남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콘크리트 벽에 유성매직이 아닌, 유리벽에 보드마카라 더 용기를 냈는지도 모릅니다. 언젠간 지워지고 덮일 것들에 대한, 그러니 언젠가는 후회할지도 모를 추억에 대한 객기 같은 것들 말입니다.
커튼 안쪽에서는 아마 사장님이 열심히 젤라또를 만들고 계셨으리라
매장 한 편에는 ‘수제 젤라또’ 답게 만들어지는 과정이 담긴 동영상이 반복 재생되고 있습니다. 안쪽에서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분주한 움직임이 느껴졌는데, 아마 이 영상 속의 과정이 이루어지고 있을테죠.
키오스크 옆에는 스푼 말고도 비닐봉투, 소독제 등이 선반에 나란히 진열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딱 이만큼의 친절함이 좋았습니다. 책상에 무얼 흘리자마자 대번에 물티슈로 향할 수 있는, 다 먹자마자 손을 닦을 수 있도록 비치되어 있는 그 물티슈 같은 친절 말이에요. 방문객의 동선을 마치 예상한듯이 선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물티슈는, 안내문의 빈 하트와 같은 기분을 다시금 느끼게 합니다.

올 때마다 싹싹 비워대는 젤라또는, 아이스크림보다는 부드럽고 기존 젤라또보다는 딱딱합니다. 에디터가 늘 택하는 초코 젤라또는 진한 풍미의 다크 초콜릿 맛으로 너무 달지도 않고 쓰지도 않은 적당함의 당도입니다. 첫 스푼을 뜰 때에는 꾸덕했던 젤라또는 다 먹어갈 때 즈음이 되니 적당한 농도로 녹아내립니다. 그제야 소프트 아이스크림의 형태를 띠는 것은, 어쩌면 먹는 이의 속도를 고려한 듯 싶습니다. 처음 이 곳을 소개해준 친구는 맛집 탐색러로 유명한데, 그의 입에서 미친놈! 이라는 격한 표현이 나왔다는 것은, 별점 5점이라는 얘기입니다. 언제나 3500원의 행복은 감탄스럽습니다.

이곳을 지나면서 괜히 초등학교 하굣길을 떠올립니다. 그 중에서도 여름날을.
아마 두 번째 방문이 강의가 끝날 즈음의 오후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날은 유독 수업이 듣고 싶지 않았고, 책상에 엎어져 아이스크림이나 먹고 싶다- 하는 말에 같은 말을 하며 엎어져주는 친구들이 있었으며, 가방을 챙겨 나와 젤라또를 한 손에 들고는 방과후가 끝나고 걸어가는 초등학생 사이로 걸을 수 있는 날이었습니다.
입꼬리가 한껏 올라가서 ‘이러고 있으니 우리 초등학생 같지 않냐?’ 하던, 박하사탕처럼 상쾌하던 그 오후. 아직도 에디터는 그 소소한 행복에 ‘왜 이렇게 행복하지?’ 하고 걷던 기억을 잊지 못합니다.

그러니 떠오르는 이 조각들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K-입시생에게 학교의 여름날이란, 희한하게 미화되어 땀냄새도 섬유유연제 냄새로 남고, 더워 죽겠던 여름날은 따가운 햇살의 낭만으로 미화되어 남는 것이라고는 그래, ‘청춘’ 밖에 없는 그것일 텝니다. 추억이라는 이름의 향신료는, 기억을 그 정도로 감미롭게 만들어 행복한 청춘들을 탄생시키기에, 한 대학생의 하굣길은 그 날, 10년 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폴더폰을 몇 번이고 열었다 닫으며, 집에 들어가야 하는 시간을 세던 놀이터의 오후 여섯시. 이제 막 해가 지기 시작하려고 준비하던 그 여름날의 찬란했던 햇살을 기억합니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 안달이 나 있던 어느 저녁의 조각처럼.
그러니 엘라도가 우리의 아지트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아무도 크게 마음을 쓰지 않으며,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 무조건적인 애정을 얻을 수 있다. […] 그러나 어른이 된다는 것은 냉담한 인물들, 속물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 자리를 차지한다는 의미이다.*
*알랭 드 보통, <불안>
이곳에 와서 젤라또를 손에 들면 유독 어려지는 마음과, 무작정 불러내는 그 철없는 마음들이 어쩌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크게 마음 쓰지 말아달라는 무의식에서 나오는 것일터라, 무조건적인 애정의 향연인 엘라도를 찾게 되는 것은 필연입니다. 어쩌면 학교가 끝난 후 동전 단 하나로 분식을 잔뜩 사 먹던 그 평화로움을 갈구하는, 우리를 살게 한 그 기억들을 곱씹기 위한 본능일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행복하다는 말을 한참을 내뱉으며 초등학생처럼 가방을 메고 초등학교를 지나가는 그 조각을. 밤산책을 하자며 누군가를 꾀어낼 아지트가 있다는 그 조각을. 대학생이 되어 그 소중한 조각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에디터에겐 또 언젠가 이 기억을 양분 삼아 한참을 살아낼 그것일 겁니다.
또 다시 어느 여섯시, 어린날의 청,춘의 한복판이었던. 봄처럼 푸르고 지독하게 치열했던 나의 20대와 신촌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엘라도 안 벤치에 앉아 한참을 떠들던 날을, 산책을 하던 날을, 강의가 끝나자마자 달려오던 날들을 기억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
그렇게 안내문을 한참 보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알지도 못할 ‘ㅁ(미음) + 한자 키’를 눌러 빈 하트나 덧붙여봅니다. 이미 냉담한 인물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한 자리 차지해버린 우리의 어린 마음에 대한 애도로.
***
여전히 동네에 사는 친구 둘과 밤산책을 하다 눈이 마주치면, 강의실에서 시원한 거 먹고 싶다고 중얼거리다 고개를 동시에 돌리게 된다면, 그 신호는 가는 길에 젤라또를 먹자는 무언의 암호입니다.
엘라도는 에디터에게 딱 그 정도의 평화로움일 텝니다. 한참 글을 마감하고 있는데, 제 얘기들을 하고 있는 것을 아는지 시끄럽게 올라오는 노란 말풍선들에는 당연스럽게 그 말이 써 있습니다. ‘산책하러 엘라도?’
그러니 아마,
사랑이고, 젤라또겠지, 신촌. (L’amour, Gelato, Sinchon) *
*이 글의 BGM으로 재생되고 있는 스텔라 장의 L’amour, les baguettes, paris (사랑이고, 바게트겠지, 파리) 차용.

엘라도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5다길 22-7 1층
월-일 11:00-23:59
0507-1356-4978


사랑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