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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2017 · 04 · 06

64. 카페 클로리스

Editor 이메진

“영국군 중위에게 가서 왜 멈추냐고 물었더니, 티타임이라고 하더군요.”

디스커버리의 ‘시칠리아 전투 다큐멘터리’ 중.

 

 홍차가 먼저일까, 우유가 먼저일까?

 3월의 어느 한가한 날, BBC 특선 드라마를 보던 에디터에게 불현듯 작은 호기심이 피어 올랐다. 차의 나라 영국에서는 수 세기 동안이나 결론나지 못한 문제다. 밀크티, 혹은 영국에서는 잉글리시 티(English tea)라고 불리는 음료는 단순히 홍차와 우유를 섞은 것이지만 영국인들의 대표적 소울 푸드 중 하나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홍차가 군대의 보급품에 필수적으로 포함될 정도였다고 하니, 이들의 밀크티 사랑은 알 만하다.

 하지만 이 간단한 음료를 만드는 데 있어서 홍차와 우유, 둘 중 무엇이 먼저냐에 대한 영국인들의 논쟁은 그 사랑만큼이나 유난스럽다. 관련된 과학 논문은 수십 편에 달하고, 심지어 영국인 작가 조지 오웰은 ‘한 잔의 맛있는 차(A nice cup of tea)’라는 짧은 수필을 쓰기도 했다. 그 내용은 제목 그대로 맛있게 밀크티를 만들기 위해 지켜야 할 열한 가지 조항을 늘어놓은 것. 실화냐고? 실화다. 참고로 조지 오웰은 ‘홍먼(홍차 먼저)파’였다.

 이렇게 ‘홍차가 먼저다’, 혹은, ‘우유가 먼저다’, 하며 싸우는 모습은 영락없이 우리나라의 탕수육 찍먹부먹 논쟁을 떠올리게 했다. 누군가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싸움 구경이라 했던가. 에디터는 이 흥미로운 논쟁의 답을 구하고자 자연스레 ‘카페 클로리스’를 찾아가게 됐다. 신촌에서 홍차로 가장 유명한 카페인 클로리스는 과연 어떤 결론을 내려줄 것인가?

 

비 오는 날 클로리스를 가면 런던 거리를 4D로 체험할 수 있다.

 

 연세로에 비해 휑한 신촌의 뒷골목에서 클로리스의 외관은 독보적이다. 깔끔한 흰 외벽과 붉은 간판, 그리고 흰 목련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괜히 한 번쯤 기웃거리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도깨비가 깜빡 잊고 열어놓은 문 틈새로 유럽의 어느 거리를 훔쳐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흐린 하늘 아래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조명은 안으로 들어가면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 말하는 듯하다.

 

추억과 함께 쌓여왔을 수많은 다기들.

 

 클로리스는 2004년 신촌에서 시작해 지금은 홍대점, 역삼점 등 총 다섯 곳의 지점을 가진 체인점이다. 프랜차이즈라는 사실에 왠지 모를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시작이 신촌 뒷골목의 낡은 가정집을 개조한 카페였다는 점은 충분히 고무적이다. 가게를 들어서자 미리 전화로 말씀을 나눴던 사장님이 에디터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에디터는 사장님께 간단한 메뉴 설명을 들은 후, 밀크티로는 제일 친근한 ‘얼그레이 밀크티’를 주문했다. 얼그레이는 홍차에 감귤향과 비슷한 베르가못(Bergamot) 향을 입힌 것이다. 사장님에 따르면 얼그레이 밀크티는 홍차 입문자도 무난하게 즐길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밀크티란다. 자고로 기본 메뉴의 맛이 그 가게의 수준을 말해주는 법. 에디터는 돈 빼고 살 버는 보람찬 하루를 위해 여기에 ‘얼그레이 크레이프 케이크’도 추가했다.

 

혼자여도 괜찮아. 식욕만큼은 4인분이니까!

 

굶주린 에디터에게 밀크티와 크레이프 케익은 훌륭한 에너지원이 되어줍니다.

 

 잠시 후 밀크티와 케이크가 에디터의 테이블 위로 강림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맛이었다. 밀크티는 마실 때마다 입 안에 은은하게 남는 우유와 차의 향이 좋았다. 게다가 아기자기한 찻잔에 한 잔씩 따라서 마시니, 감질나면서도 그 맛이 배가 되는 느낌이었다. 크레이프 케이크는 얼그레이 향이 짙은 생크림이 일품이었다. 많이 달거나 느끼하지 않아 끝까지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위장이 충만해지니 그제서야 클로리스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여유가 생겼다. 에디터는 다음 번엔 쌉쌀하고 진한 맛이 매력이라는 아쌈 밀크티를 먹어보기로 다짐하고는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Old is the new black. 시간이 완성하는 클래식(Classic)함은 언제나 옳다.

 

 에디터의 옆자리에선 젊은 모녀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무 선반 위의 오래된 스피커에선 끊임없이 팝송과 재즈가 흘러나온다. 에디터가 가게에 들어올 때엔 영화 ‘라라랜드’의 재즈곡이 플레이되고 있었다. 빛이 바랜 오래된 조명들은 모닥불처럼 따뜻한 색이다. 낡은 영국풍 가구들은 자연스럽게 멋스럽고, 작은 소품들 하나하나에도 유럽의 향기가 듬뿍 배어 있다.

 오래됐지만 독특하고, 독특하지만 낯설지 않다. 연고 하나 없는 영국에 뜬금 없이 할머니집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적당한 볼륨의 음악, 음료를 만드는 작은 소음들, 그리고 다른 이들의 도란도란한 이야기 소리. 일상의 피로함을 잊어 버리기에 이만한 곳이 있을까. 창 밖으로 빗방울이 비치는 흐린 금요일 오전, 클로리스의 푹신한 초록 소파 위는 빈둥거릴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장소처럼 느껴졌다.

 

 이층 구석엔 셜록이 앉아서 차를 홀짝일 것만 같은 자리도 있다.

 

 사장님이 잠시 한가하신 틈을 타, 드디어 에디터는 계속 궁금해하던 질문을 할 수 있었다. 바로 ‘홍먼우먼’ 논쟁에 대한 사장님의 의견. 다음은 그에 대한 짧은 문답이다.

 에디터   사장님은 밀크티를 만들 때 홍차와 우유 중 뭘 먼저 넣으시나요? 또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나요?

 사장님   홍차를 먼저 우려낸 후 우유를 넣어요. 우유를 끓이다가 홍차를 넣거나 우유에 끓인 홍차를 붓는 방법도 있긴 한데, 여러 가지를 다 시도해 본 결과 홍차에 우유를 넣는 게 가장 좋았어요. 그러면 홍차 본연의 맛과 향이 더 강해지는 느낌이더라구요.

 

이들은 자신이 홍먼파 밀크티를 마시고 있다는 걸 알까?

 

 이럴 수가. 사실 에디터는 취재 전 조사를 통해 우유를 나중에 넣으면 뜨거운 온도에 우유의 단백질이 변성되어 향이 안 좋아진다는 얕은 지식을 품은 상태였다. 그래서 무심코 클로리스 또한 우유를 먼저 넣을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클로리스도 조지 오웰과 같은 홍먼파라는 사실은 에디터에게 약간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혼자만의 티타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쳤다. 애초에 영국인들이 홍차가 먼저니, 우유가 먼저니 싸우는 건 사실 은근슬쩍 티타임을 늘릴 핑계거리를 찾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사실 맛만 좋으면 장땡 아니던가. 현실은 훨씬 복잡하고 쌉쌀하다. 어떻게 마셔도 달짝지근 맛있는 밀크티에 대해서라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토론해도 행복한 법이다.

 숨가쁜 시험 기간에 잠시의 여유가 절실하다면 친구들과 홍먼우먼에 대해 얘기해보는 건 어떨까? 신촌 뒷골목에 숨어있는 작은 유럽, 클로리스는 당신의 빈둥거림을 언제나 환영할 것이다.

 

떠나는 길은 알록달록한 양철통들이 배웅해준다. 안녕!

 


<카페 클로리스>

주소 : 서울시 서대문구 창천동 13-35

영업 시간 : am 11:00~pm 12:00(월~토) / pm 1:00~pm 12:00(일)

연락처 : 02)392-7523

이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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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진

상상하고 그리는 잔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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