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TO ZANCHI! · 신촌을 사랑하고, 추억하고,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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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2023 · 12 · 25

MERRY CHRISTMAS 🎁🎄🎅💝

Editor 왕 잔치

 

빨잠에 나타난 산타. 힘겹게 선물 보따리를 들고 옮기다간, 냅다 신촌 한복판에 두고 가기로 한다. 

영문도 모르는, 신촌을 지나는 사람들은 12월 25일 저녁 8시에 의문스러운 꾸러미를 보고 그냥 지나치기도,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기도 한다. 요상한 물건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건 요상한 물건이 길 한복판에 있는 게 너무도 익숙해져버린 탓일까. (이 곳에선 흔한 일이다.)

길을 지나던 Z, L, M, C, 그리고 O는 선물 보따리에 다른 이들보다 큰 관심을 가지는 듯한데.

 

누가, 어떤 선물을 열어보게 될까?

 

  1. 표지에 “신촌과 작별하는 청춘들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라고 적힌 소설
  2. 엽서뭉치
  3. 누군가가 열심히 사용한 것 같은 연습장.
  4. 알 수 없는 털뭉치. 인형인 것 같기도 하다.
  5. 스케치북

 

 

 

 

 

 

[1. 표지에 “신촌과 작별하는 청춘들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라고 적힌 소설책]

 

신촌과 작별하는 청춘들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대학교에서의 마지막 과제를 제출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중이었던 Z. 아련한 글귀에 사로잡혔다. 시험과 과제에 깔려 죽을 것 같았던 학기말이, 사실은 대학의 끝이라는 점이 순간 와닿았다. 어딘지 모르게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책을 펼쳤다.

 

 

 

“야, 그만 울어. 우니까 더 못생겼다.”

 

“언니는 진짜, 이 순간까지도 장난하고 싶어?”

 

“어차피 졸업식 때도 보고, 방학 때도 한 번 놀러 가기로 했잖아.”

 

“그거랑 이거랑은 달라. 끝이랑은 다르다고.”

 

 

  세인은 울고 있는 아영의 손을 무심한 듯 꼭 잡았다. 울음을 그치라는 의미였지만 세인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아영은 더 목 놓아 울었다. 세인과 아영이 같이 산 지는 벌써 2년이 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새내기였던 아영은 이제 3학년을 앞둔 어엿한 대학생이었다. 가끔 세인과 아영은 학교를 거닐다 아영에게 인사하는 후배들을 만나고는 했다. 아영은 그럴 때마다 장난스레 세인의 눈치를 보는 척 했다. 세인에게 놀려달라는 듯 보내는 그 눈짓에 마땅히 답하듯이, 세인은 그 순간을 한 번도 그냥 넘긴 적이 없었다. 이야, 삐약거리면서 언니 언니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선배님이 되어서 인사도 받고, 우리 아영이 많이 컸네 ― 하는 웃음 섞인 농담은 세인과 아영 사이 온도를 무엇보다 잘 설명하는 것이었다. 느슨한 연대. 그렇지만 따뜻하게 쌓인 시간의 층. 그건 세인과 아영의 투룸 짜리 작은 집에 뿌리 깊게 박혀있었다.

 

 

“바로 본가로 가는 거지?”

 

“응. 크리스마스는 가족이랑 있어야지.”

 

“뭐래, 저번 크리스마스는 나랑 놀았으면서. 실없는 소리 말고 빨리 가. 오늘 연휴라 지하철에 사람 많아.”

 

 

  아영의 배웅을 뒤로 하고 큰 캐리어를 끌고 나온 세인은 익숙한 길을 걸었다. 마치 세인의 다리가 신촌역으로 향하는 길을 외운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이 거침없었다. 무의식적으로 흔들거리는 다리와는 다르게 세인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움직였다. 세인의 버릇이었다. 생각을 멈추지 않는 것. 생각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할 때마저도 ‘생각을 멈추는 방법’ 따위를 생각하는 것. 세인은 매번 다음 단계를 헤아렸다. 실수하지 않도록, 본인이 행하는 언행에 한치의 결함이 없도록 치열하게 생각했다. 세인은 마지막으로 KTX 시간을 확인하고, 시간이 넉넉하다는 것을 다시금 눈에 담고 나서야 잠시 숨을 돌렸다.

 

 

  홍익문고를 지나 쭉 걸어가던 세인은 어느새 신촌역에 닿았다. 눈에 익은 계단을 따라가니 칠이 약간 벗겨진 벤치들이 보였다. 세인은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줄줄이 나열된 의자들이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손으로는 바쁘게 캐리어를 끌었다.

 

 

“세인아.”

 

 

시끄러운 사람들 틈에서 튀어나온 정돈된 목소리는, 분명 연화였다.

 

 

 

*

*

*

 

 

 

  딱 3년 전도 바로 이곳이었다. 세인은 그날 동아리 사람들끼리만 모여 종강 파티를 하자는 등쌀에 못 이겨 술자리에 갔었다. 기분 좋게 취해있는 사람들은 뒤늦게 도착한 세인을 과하게 반겼다. 그사이에는 말없이 웃고만 있는 연화도 있었다. 연화는 그 술자리가 마치 딱 맞는 배경인 것처럼 편안한 분위기를 풍겼다. 평소에는 술자리를 즐기지 않는 세인이었지만, 그날은 꽤 재밌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인데도 너희들이랑 있다, 하면서 깔깔대는 소리가 정말 우스워서였는지, 도시의 아득한 잡음이 귓가에 계속 감겨서였는지. 신촌의 시끄러운 공명은 세인에게 가닿아 부딪히고 다시 공기 중을 떠돌아다니기를 반복했다. 알코올의 쌉싸름함보다 이 공간에 날아다니는 분위기가 세인을 무르익게 했다. 간만에 취했다, 생각하면서 먼저 귀가한다는 말을 남긴 채 일찍 나왔다. 이 기분을 여기서 더 변색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겨울의 찬 공기 틈에 소주 향 섞인 숨을 끼워 넣으며 크게 숨을 쉬어보았다. 호흡에 집중하며 걷다 보니 옆에 누군가 나란히 발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챘다.

 

 

“이제 진짜 크리스마스네.”

 

 

  세인보다 한 뼘 더 큰 연화는 세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낮은 목소리가 듣기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세인의 입가에 머물렀던 은은한 미소는 사그라들었다.

 

 

  연화는 세인의 같은 과 한 학번 선배였다. 공교롭게도 둘은 동아리가 같았기에 서로 자주 마주치곤 했었다. 아영을 떠올리면 숨넘어갈 듯 깔깔대며 웃었던 기억이 당연히 따라 나오는 것과 달리 연화를 떠올리면 마냥 아팠다. 세인이 연화를 처음 본 건 동아리 오티 날이었다. 다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도 웃으며 분위기를 주도하는 연화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긴장한 채 굳어 앉아있는 세인에게 다정한 한마디를 건넨 사람이 연화였기 때문이었을까. 세인은 길을 걷다가도 가끔 연화의 모습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세인의 사색 속에 담긴 연화는 빛났다. 연화의 주위에는 언제나 사람이 많았고, 연화의 경쾌한 웃음소리는 눈을 찌르는 빛만큼 날카롭고 해사해 조금 아팠다. 연화의 다정한 한마디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님을 눈치 챘을 때쯤, 세인은 이따금 연화 같은 사람이 오히려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연화는 항상 세인의 곁에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연이 연화를 세인의 곁으로 데려다 놓았다고 설명하는 게 맞았다. 세인이 첫 전공 발표를 완전히 망치고 동방에 혼자 울고 있을 때 세인을 발견한 사람은 연화였다. 버벅거리며 동기들과 어울리려 애쓸 때도, 부끄러움을 잠시 접어둔 채로 과 행사에 나가서 어색하게 앉아있을 때도 항상 연화가 있었다. 연화는 세인의 미숙함을 모두 들여다본 사람이었고, 세인은 그걸 견디지 못했다. 구김살 없는 사람의 투명한 시선. 나를 꿰뚫어 보는 것만 같은 연화의 태도. 그걸 느낄 때마다 세인은 애써 연화의 눈을 피했다.

  연화는 세인이 작아지는 순간마다 세인을 배려하려 애썼다. 옆에 앉아 한 마디 건넨다든지, 애써 미소 지으며 피해준다든지 따위의 세심한 친절은 세인을 더 부끄럽게 만들었다. 세인은 본인의 볼품없는 모습만 보여주게 되는 걸 고쳐보려고 애를 썼지만, 잘하려고 할수록 미숙한 모습만 보이게 되는 건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아마 그때 연화의 주위 사람 중 가장 연화를 사랑했던 사람은 세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연화를 향한 동경은 아무것도 거치지 않은, 가감 없는 애정으로 도무지 표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리저리 뜯기고 부딪혀 흉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세인은 그런 자신의 감정이 의미 없다 못해 추하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만큼 상처받지 않으려 애써 싫어하는 척하는 건 쉬웠다. 사랑은 육중하니 무거워 감당하기 어렵지만, 미움은 얇디얇게 저며 들기도 쉬운 감정이었으니. 세인은 어려운 솔직함보다 쉬운 회피를 선택했다.

 

“선배는 정말 나빴어요.”

 

 

  세인은 대답을 고르다 무의식적으로 쏘아붙였다. 연화는 대답 없이 본인의 코트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이제 오 분만 지나면 크리스마스야. 소원 있어?”

 

“누가 크리스마스에 소원을 빌어요. 생일 때나 빌지.”

 

“세인아, 너는 내가 왜 싫니?”

 

 

  싫지 않아요, 하는 말이 목구멍 근처에서만 맴돌았다.

 

 

“선배는 너무 친절해요. 그러지 말아요. 저는 그런 걸 받을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취기 때문인지 세인의 기억은 여기까지였다. 연화의 대답은 흐린 미소와 함께 흩어져 증발한 듯싶었다. 술집에서 신촌역까지의 그 짧은 산책 이후, 연화는 다음 학기 휴학을 했다는 소식으로만 근황을 알 수 있었다.

 

 

 

*

*

*

 

 

  세인과 연화는 신촌역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잘 지냈어?”

 

 

  짧은 침묵 뒤에 대화의 물꼬를 튼 건 연화의 다정한 목소리였다.

 

 

“네. 이제 졸업해요.”

 

“벌써? 시간 참 빠르네.”

 

 

  근황을 몇 번 주고받으니 둘 사이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세인은 그날, 3년 전 크리스마스를 떠올렸다. 날씨는 오늘만큼이나 추웠고, 감정은 서투르게 빚어져 채 닿지 않았다. 선배를 좋아하지 않은 게 아니라, 서투른 내가 미웠던 거예요. 온전히 마음을 담지 못해 뭉툭해진 언어들이 그날처럼 목구멍 근처에서 맴돌았다.

 

 

“선배, 소원이 뭐냐고 물었었죠.”

 

 

  연화는 대답을 기다리듯 침묵을 지켰다. 세인은 처음으로 연화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어요. 그날.”

 

“지금은 어때? 이뤘어?”

 

 

 

  세인은 연화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크지 않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세인은 연화가 자리를 뜨자마자 시청역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탔다.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세인은 뭔가 부스럭대는 종이가 있다는 걸 알아챘다. 조잡한 반짝이로 꾸며진 트리가 그려진 카드는 누가 봐도 아영의 취향이었다. 세인은 픽, 웃었다. 카드를 펼쳐보니 삐뚤빼뚤한 아영의 글씨가 수놓아져 있었다.

  ‘언니가 벌써 졸업이라니 기분이 이상하다.’로 시작하는 아영의 카드는 가볍지만은 않은 애정을 머금고 있었다. 아영의 카드에 묘사된 세인은 누구나 사랑할 수 있을 만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구깃구깃하게 사랑하던, 미숙한 세인은 없었다. 아영에게 세인은 성숙하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이곳, 신촌을 떠날 때가 되어서야 익숙하게 무뎌진 본인이 신기했다.

 

  세인은 사랑을 주고받는 일에 서투른 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지나간 시간이 사무쳤다. 개찰구와 승강장, 초록색으로 휘감긴 역사는 3년 전도, 지금도 그대로지만, 그건 세인의 시선에서만 그럴 테다. 매일 보았으니, 점진적인 변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세인은 그동안 유려한 사랑을 안겨주려 노력했다. 세인은 대상이 연화든 아영이든, 그 순간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사랑하려 했었다. 이곳에서의 세인은 치열하게 답을 찾아가는 순례자였다. 그리고 3년 전과 지금의 세인의 발자취는 분명 같지 않을 것이다. 그게 어떤 부분인지 명확하게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세인은 깜깜한 차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다 조심스레 이마를 기댔다. 유리의 찬 기운과 함께 열차의 움직임에서 비롯된 진동이 느껴졌다. 덜컹거리는 열차는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분명 세인은, 달라져 있었다.

 

 

 

 

 

[2. 엽서뭉치]

 

L은 이 곳의 모든 것이 낯설다. 고등학교까지 지방에서 졸업한 그는 퍽퍽살같은 서울에 올라와 적응하는 데만 1년을 모두 써버렸다. 늘 지내던 곳과 시차가 있다고까지 느끼는 L은 1년의 피로가 가득할 뿐이다. 이 도시는 꼭 이 계절을 닮은 것 같은 느낌.

 

선물 꾸러미 속에서 그의 손에 잡힌 것은 엽서 뭉치. 그가 느낀 이 곳의 온도와는 다른 온도의 사진들이 그의 눈 앞에 펼쳐진다.

 

 

 

 

 

 

[3. 누군가가 열심히 사용한 것 같은 연습장.]

 

선물보따리 같은데. 누가 쓰다 버린 것 같은 연습장이 하나 들어있다. 의아하게 생각한 M.

‘선물이 아니네’

황당한 그의 눈에 담긴 건 글이었다. 담백하게 생긴 글귀들을 읽어 내려간다.

 

 

#1

올곧다.
소리 없이 내리는
순백의 하얀 정신 

온다는 소식에
잠시 들뜬 기분도
까마득히 잊고 잠든 이들.

그 몽중에 몰래
죄 많은 세상
무결히도 덮는다. 

우리 얼룩지고 번진 마음
무구한 시절로 돌아가도 좋다며
다독이는. 

그러다 때가 되면
괘념치 말라는 듯
말없이 사라지고 마는. 

왜 그리도 따스합니까?
왜 그리도 순수합니까? 

문득 던진 질문에
대가 없는 미소만이
한 켜 두 켜 쌓인다. 

우리 빛바랜 둥지에도
그 하얗고 순수한 정신
아직 남아있는가
묻는다면 

나지막이
그 내리는 소리로
대답을 대신할 터이다.

올곧게도.

 

 

#2

눈 오는 그날은 유난히 따스하다.
그것은 대기에서 눈이 얼어붙는 동안 열을 발산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눈은 제 자신이 냉랭해지는 동안
잠깐이나마 그 추위 잊으라는 듯 우리를 덥혀주는 것이다.
눈 소복이 덮이는 길은 그런 탓에
한겨울 날씨로 단단하게 얼어 냉기를 뿜어내어도
어째서인지 어머니가 깔아주신 겨울 이불 같아
그 속에 들어가 난 아무것도 모른다-
팔다리 마구 휘젓고 싶어지는 기분이다.

눈은 그뿐이 아니라
우리가 이 땅을 차지한 이래 벌인 만행-그 가운데 하나인 광공해–조차
제 몸으로 받아가며 이리저리 반사하니
따스한 조명을 켜놓은 것처럼 주변이 훤해진다.
눈 부슬히 내리는 길은 그런 탓에
해 저물고 암막 내리어 어두워진 밤중에도
어째서인지 골목 어귀에 기다리는 어머니 손짓 같아
느긋이 걸어가며 난 무서울 게 없다-
팔다리 마구 휘젓고 싶어지는 기분이다.

눈은 그래서 차디찬,
제 흰 몸 다 바쳐 따뜻하게 우리 겨울 덮는 것이다.
제 흰 몸 다 바쳐 훤하게 우리 겨울 밝히는 것이다.

 

 

#3

12월 초입부터
밝은 트리 하나가
거리를 이리저리 비추었다. 

일광이 순식간에 자취 감추고
이른 어둠이 바쁜 걸음 재촉하는 밤에
트리는 더욱 열심히 빛을 발했다.

오늘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길거리 전전하던 행인 하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보기 싫었다.

그는 3주나 더 남았는데도
벌써 무엇 하러 저리 꾸며대느냐고 코웃음 쳤다. 

설렘 가득한 마음이 걸어놓은 오너먼트와 조명을
미움 박힌 마음은 얼기설기 뒤엉킨 갈등(葛藤)으로 보았다. 

사랑을 잊고 산 탓인가, 오해를 사며 앓아온 탓인가.
육면체의 철창에 갇힌 동물원의 동물 신세가 된 탓인가. 

칠칠치 못하게 또 못된 감정이 흘렀다.
괜히 성질이 나서 허공에 발길질 한 번, 발길질 두 번. 

팔리지 못하는 제 처지가 싫어
저 트리나 탓하는 모습에
구역질을 참고 애써 뒤돌던 찰나

아이 하나가 톡톡, 손등을 쳤다.
저 트리가 너무 예쁘지 않느냐며, 크리스마스가 어서 왔으면 좋겠단다.

순간 피식, 행인은 웃음이 났다.
어린 마음에서 솟아난 어여쁜 장식 하나가 그의 마음에 선물처럼 놓였다.

내일도 무료히 지나갈 것을 알겠지만서도
이유 모를 희망 한 타래가 마음 한 켠에 걸리어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제 가던 길을 갔다. 

12월 초입부터
밝은 트리 하나가
거리를 이리저리 비추었다.

 

 

 

 

[4. 알 수 없는 털뭉치. 인형인 것 같기도 하다.]

 

어느덧, 늦은 밤이 되어 하늘은 순식간에 아주 깊은 바다색이 되어있다. 이 시기에 이 하늘 색은 사실 초저녁부터 나온다.

이 시기의 반짝이는 거리와 설레는 말소리는 C에게 부담스럽게 눈부시기만 하다.

뭐 이리 휘황찬란한지.

공채 면접 스터디에 가던 중, 여느 때와 같은 빨잠 앞에 여느 때와는 다른 낯선 보따리에 눈이 갔다. 또 누가 뭘 홍보하려는 심산인지. 회의적인 마음가짐으로 ‘열어나보자’ 생각한 그의 손에 잡힌건 웬 곰인형.

먼지알러지가 있는 그는 집에 인형도 두지 않는다. 무심히 툭. 내려놓았는데 인형에 달려있던 택이 떨어졌다.

 

 

 

 

무언갈 팔려는 사람이라기엔 조금 건방진 듯한 멘트가 그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마케팅 잘하네’

그의 주의를 끄는 데 성공한 이 종이 뒷면의 QR코드를 인식해본다. 낡고 지친 그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으니 뭘 팔려는 건지나 봐보자는 심산이다.

 

 

‘플레이리스트네’

당장이라도 보이스피싱 사이트로 넘어갈 것 같다고 생각했던 그는 뜻밖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txCCYBMKdB0

I’m weak and what’s wrong with that

그에게 안 좋을 걸 알면서도 거절하지 못하는 본인이 답답하고 싫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주변에서는 그를 답답해한다. 본인이 가장 답답한데.

노래를 들으며 피식 웃음을 짓는 그였다. 아이폰 광고에서만 들어봤던 이 가수의 목소리로 자신과 같은 상황에서 다른 돌파구를 찾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 플레이리스트에 더욱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약점에 대한 보완은 그걸 인정하는 것부터 온다는 번지르르한 말보다, “나 약한데 어쩌라고” 라고 뻔뻔하게 말하는 이 노래가 그에게는 훨씬 위로가 되었다나.

 

 

 

https://www.youtube.com/watch?v=j2WWrupMBAE

그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이 플레이리스트의 다음 노래도 역시 익숙한 가수의 목소리다. 들어보니 전 곡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직접적인 위로를 전해주는 노래였다. 신촌 한복판이 아닌 자취방에서 혼자 들었다면 분명 참을 수 없이 센치해졌을 것. 대놓고 전하는 위로의 말이 담긴 노래를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그지만, 신촌 한복판에서 뜻밖에 전해 듣는 절절한 위로는 생각보다 따뜻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4V3Mo61fJM

Lights will guide you home and I will try to fix you.

사랑하는 사람이 떠오르는 노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힘이 되기 위해 매번, 매일 노력하는 그지만, 정작 본인을 이 노래처럼 안아주는 사람이 있나. 있다. 참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자신이 더욱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생각난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한 그는, 가는 중이던 스터디 장소로 발을 옮기며 노래를 마저 듣는다.

‘가면서 듣는 건 괜찮지. 빨리 가야겠다. 또 시간을 버렸네.’

 

 

 

https://www.youtube.com/watch?v=wccRif2DaGs

Slow down you crazy child. You’re so ambitious for a juvenile.

서둘러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순간, 노래 가사가 그를 붙잡는다.

‘소름. 내가 방금 한 생각을 들었나?’

피식 웃으면서 계속 귀기울여 들은 이 노래는 이전 노래에서 그가 내린 결론에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내가 놓치고 있는 건 없는가. 낭만 가득한 이 공간에서 낭만은 사치라고 치부하고 나 자신을 끝없이 뒤쫓고 있는 게 아닐까? 남이 보면 마치 자기 꼬리를 쫓으면 빙글빙글 도는 강아지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잠시 했다.

 

 

 

‘플레이리스트 하나 듣고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할 수가 있나.’

별난 플레이리스트라고 생각하면서 모든 노래를 저장하는 그였다.

그러고는 플레이리스트의 마지막 곡을 재생해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z1rYmzQ8C9Q

‘아 맞다 오늘 크리스마스지’

누구는 11월부터 캐롤을 듣는다던데 캐롤을 들으면 괜히 심란해지기만 하는 그는 아직까지도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캐롤 말고는 들은 적이 없었다.

크리스마스였다.

‘눈이라도 펑펑 오지’

한 해를 마무리하는듯한 따뜻한 크리스마스 노래를 듣고 몽글해진 마음에 괜히 눈이 모두 녹아버린 대학가의 퍽퍽함을 떠올린다. 그때 눈앞에는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보였고, 여전히 눈부시게 반짝이는 트리가 생각보다 예뻤다.

 

 

 

 

 

 

[5. 스케치북]

 

‘와. 입김.’

 

가게에서 나오며 옷을 입는 짧은 시간동안에도 찬 공기에 머리가 쭈뼛 선다.

버스는 버스 안의 사람들로 가득차  안에서 밖을, 밖에서 안을 볼 수 없다.

 

‘바로 집 들어가긴 싫은데.’

 

O는 이 곳에서 작은 카페 겸 펍에서 일하는 대학생이다. 크리스마스라서 오늘은 마감 시간 대신 밤 10시에 퇴근을 했다. 평소였으면 꼼짝 없이 새벽 2시 퇴근이다.

 

‘10시 퇴근이 이렇게 행복한 거였다니.’

 

밤 10시가 이른 시간이라고 느끼는 자신이 제법 어른이 된 것 같다고 느끼는 O. 빨잠 앞 선물 꾸러미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손을 주욱 뻗어 보따리 밖으로 나와있는 스케치북을 집어 든다.

 

 

 

 

 

 

그리고 선물보따리 가장 안쪽에는 편지가 놓여있었다.

 

 

올 한 해를 살아낸 여러분에게.

 

 

안녕!
길 한복판에 요상한 물건이 놓여있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장소인 이 곳. 이 곳에서의 삶은 어때? 이 곳에서의 이 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찰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니? 그 사실을 꼭 기억하길 바라.

메리 크리스마스!🎄🎁

 

 

어디를 향하든, 무엇을 마주하든
연말의 이 선물 보따리를 기억하며 살아가길 바라며
산타가.

왕 잔치
AUTHOR PROFILE
왕 잔치

잔치의 시선으로 신촌의 장면과 사람, 장소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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