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가을

가을은 끝나가는 이들이 벌이는 잔치입니다.
나무들은 옷장에서 화려한 파티복을 꺼내 입습니다. 모든 것은 선명하고 뚜렷하게 빛나고, 세상은 온갖 빛깔과 바스락거리는 소리로 가득 찹니다.

그러나 나무들은 조만간 옷을 바닥에 훌훌 벗어 던진 후, 희끄무레한 이불을 덮고 깊은 잠에 빠져들 겁니다. 성미가 급한 이들은 벌써 잘 준비를 마쳤더군요. 낮은 결국 밤에게 패할 것이고, 지친 태양은 파리한 빛만 던지다 금방 퇴근할 겁니다. 싸늘한 공기는 외로운 이들을 달콤한 과거로 밀어 넣습니다. 열과 활기를 잃은 세계는 한동안 몽롱한 꿈 속에 빠져들겠지요.

11월의 어느날 밤, 버스에서 내린 저는 올해의 잔치가 벌써 끝나가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떨어진 플라타너스 잎들이 어수선하게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활짝 펴져 있었던 커다란 손바닥들은 바짝 오그라들어, 무심하게 지나치는 차들의 빛을 드문드문 받고 있었습니다.
신명나게 잔치를 즐긴 이들은 차분하고 조용하게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아쉽지만, 슬프지는 않았습니다.
이내 새로움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 것이고, 바쁘게 살아내다 보면 또 다른 잔치가 우리를 찾아올 테니까요.

발걸음을 옮겨, 조그만한 터널을 통과했습니다. 수천 번을 족히 오갔을 이 터널도 뭔가 다르게 느껴지더군요. 오토바이와 자전거들이 다시 달리기를 기대하며 각자의 주인을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미줄이 덮인 조명들이 직육면체의 공간을 은은한 빛으로 채웠습니다.

하지만 터널 반대쪽의 세상은 완전히 딴판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한 잔치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깜깜해야 할 하늘은 거리를 뒤덮은 불빛에 물들어 애매한 푸른빛을 띠었습니다. 사람들은 길을 따라 빠르게 흘러갔고, 옆으로 뻗은 골목들에서는 알콜 향이 나는 외침들이 들려왔습니다. 거대한 전광판은 광장을 시시각각 다른 색으로 물들였습니다.

질려버린 저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틈새에 잠시 몸을 숨겼습니다. 사람들과 버스들이 잠깐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숨어 있다가 타야 할 버스를 놓친게 한두번이 아닙니다.

불완전한 우리는 좁은 틈새로만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잘게 조각난 세상은 너무나 쉽게 변하고 스러지고 멀어집니다. 시작과 끝을 잇는 고리는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별과 죽음 뒤 찾아와야 할 또 다른 시작은, 저만치에서 소리만 들릴뿐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끝은 너무나 두려운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끝을 몰아내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욕망과 목적이라는 천쪼가리로 저 앞에서 입을 쫙 벌리고 서있는 끝을 애써 가려 보기도 했습니다. 영원한 것들을 찾아 헤맸고, 상상해 냈고, 숭배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끝내 변하고 마는 진리에 실망을 거듭했지만, 우리의 믿음은 끝을 쫓아내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듯 합니다. 잠들지 않는 도시는 화려하고 견고한 불빛들로 번들거립니다.

그러나 끝을 잃어버린 이들은 어딘가 피곤해 보입니다. 가로등 빛 아래 창백하게 빛나는 나무들은 쪽잠이 절실합니다. 간판 안에 박제된 단어들은 맹한 눈으로 거리를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이제는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돌아보며 아쉬워할 틈조차 주어지지 않습니다. 떨어진 낙엽들은 곧 빗자루에 쓸려 쓰레기봉투 안에 담기겠지요.
언젠가 우리도 잔치를 떠나 집에 가야 할 겁니다. 켜짐과 꺼짐밖에 모르는 전깃불 아래, 애써 무시해 왔던 끝은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느닷없이 찾아옵니다. 차가운 버스 창에 기댄 저는 무엇과 이별했는지 기억나지 않아 서글픔에 잠겼습니다.

다음날, 또다시 신촌을 찾은 저는 큰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습니다. 근엄한 얼굴에 다소곳한 자세가 인상적인 고양이 한 마리가 닫혀진 셔터 앞에 평화로이 앉아 있었습니다. 멀찍이 떨어져 카메라를 꺼내려 하자, 그 아이는 저에게 천천히 다가왔습니다.
쭈그려 앉아 한참동안 눈을 맞추었습니다. 부드럽게 윤기가 흐르는 잿빛 털을 만지고 싶어 손을 뻗었지만, 그것까지는 허락하지 않고 우아하게 자리를 떴습니다.
샛노랗게 불타는 그 아이의 눈에는 영원한 가을이, 끝나지만 끝나지 않는 잔치가 있었습니다. 만남은 짧았지만 기억은 끝까지 남을 겁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이야기를 남겨주세요.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