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27 (월) 푸름
나는 주인공이 아니더라. 분명 나랬는데.
주인공이 되려면 아무래도 훨씬 오래 걸리나 보다. 감히 그 말을 뱉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는.

우리의 현실은 낙원이 아니다.
꼴에 영문학도라고 순간 실낙원이 떠오른다. 우리는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낙원을 잃었을까.
내가 기계이기를 바랐던 적이 있다.
아니 사실 지금도 항상 내가 기계이기를 바란다.
먹지도, 쉬지도 않고 제 할 일을 해내는 기계가 부럽다.
종종 내가 느끼는 검은 감정들이 죽도록 싫을 때가 있다.
나태와 우울과 무기력은 허무와 고립과 도태를 낳는다.
이럴 때면 인간사에 대한 혐오가 내 마음에 핀다.
그렇다고 세상 부지런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도 않다.
하고싶은 것도, 하고 있는 것도 많은 대학생, 폭포 같은 열정의 주인으로 위장한 내가 좋아하는 일은 종일 멍 때리며 음악을 듣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인간인 내가 차라리 먹지 않아도, 감정을 느끼지 않아도, 힘들지 않아도 되는 기계이기를 바라는 생각이 과연 정상인가 생각한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나 과거를 되돌아보는데 끝도 없이 과거로 돌아가게 되어 결국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잘못된 게 아닌가.
아닐 수도 있겠다.
일과가 끝나고 거리의 불빛이 유독 밝게 빛나기 시작할 때, 신촌은 대학생들의 무리로 가득 찬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왔나 싶을 정도로 우르르 나온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추억을 쌓으러 간다. 이들은 버스커들의 공연 소리에 맞춰 웃음소리와 이야기 소리로 거리를 비춘다. 이들을 보며 지나가는 어른들은 말한다.
“청춘이다 청춘”

봄은 푸른가. 아닌 것 같은데.
“현재”를 영어로 present라고 한다. 어렸을 적 영어를 배울 때 선생님께서 우리의 지금은 선물과도 같은 것이기에 present는 현재와 선물이라는 뜻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설명 해주셨다. 실제로 그런 어원인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의 “선물”은 푸르지 않다. 우리의 “현재”는 한국의 봄 같다. 미세먼지 가득 낀.
활기찬 신촌의 거리를 보면 이들 중에도 내면에 외로움과 우울과 어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걸 청춘이라고 해도 되나.
색은 가시적이다. 내면의 감정이 어떤 색인지 형용할 수 있나. 그래서 겉으로는 활기차 보이는 우리를 푸르다 하는가 보다. 푸른 척하는 가식적인 내면을 묘사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
뒤집어 생각해보면 지금 내 내면이 아무리 어둡고 무거워도 우리의 푸름을 물들일 수 없다.
투명 필름을 하늘을 향해 들고 관통해 보면 무슨 색이 보이는가.
투명 필름은 하늘의 파란 물감으로 물든다.
색이 없는 이 마음이 청춘이라는 글자를 만나 푸르러지리라.
색이 없는 이 마음도 청춘이라고 부르며 함께 보듬어지리라.
즉 우리의 “현재”는 한국의 봄이 맞다.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불명확이 우리의 눈을 멀게 했을 뿐.
2시간은 걸리는 귀갓길 버스 안에서 읽은 이 시는 나의 자기혐오와 무기력과 공허를 노래한다. 마냥 아름답고 푸르다고만 하는, 힘이 나지 않는데 힘을 내라고 하는 시가 아니어서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가는 저 마음이 마치 내 마음 같아서.

누군가가 나와 같은 처지에 처해 있다는 사실로 위안을 얻는 것은 생각해보면 참으로 비겁하고 치사한 자기 위로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이 외롭고 어두운 세상에 나 말고 누군가가 혼자 고군분투하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나도 있으니 함께 밝혀보자고 말하고 싶지 않나.
이 시는 나에게 그런 위로를 건네 준다. 나만 이런 게 아니겠거니. 우리의 눈에 우리의 봄은 마냥 푸르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각자의 고뇌와 아픔이 우리를 성장시킨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내 자신이 향기롭지 못할지언정, 아름답지 못할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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