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여름, 열매: 해피앤피스커피클럽
1.
지글지글
아스팔트가 익어간다.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데워지는 소리가 들린다. 기다리던 여름이다. 기다렸다고 하는 게 맞을까? 오길 바랐지만, 또 오지 않길 바랐다. 올해 여름 계획은 2월부터 설레발을 치며 정해두었다. 한여름의 태양 아래 두 발이 모두 익기 전 신촌을 떠나는 것. – 여행간다는 말을 길게도 늘어놓았다. – 출발일이 한참 남았을 때는 설렘만 가득했는데 막상 출발일이 다가오니 과거의 내가 미워진다. 괜히 일을 벌려 마음의 짐을 만든다.
걱정으로 가득 찬 마음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커다란 걱정을 덮으려면 그에 맞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2.
날씨가 제법 선선해졌다. 온종일 화나 있던 날씨도 누그러들고, 시원하게 살랑이는 바람이 두 뺨을 스친다. 이제는 태양 아래서도 사탕처럼 금방 녹아버리진 않는다. 신촌으로 돌아왔다. 이번 방학은 신촌에 있는 시간보다 다른 곳에 있는 시간이 길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니 자취방에 홀로 있는 시간이 지독히도 싫어서 도망치듯 본가로 떠났다. 본가로 갔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외로움의 자리를 대신할 심심함과 무료함만 커질 뿐이었다. 그래서 다시 도망치듯 신촌으로 돌아왔다.
여름이 정말 미웠다. 너무나도 미웠다. 이유 모를 미움에서 비롯된 우울은 내 여름을 덮었다. 이번 여름이 왜 미웠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명확한 답은 없다. 실체 없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건 어려운 일이다. 못난 감정에 구태여 말을 보태고 싶지도 않다. 그러므로 나는 미움의 원인을 모두 날씨 탓으로 돌리고 싶다.
사랑하는 여름이 미운 건 다 무더위 탓이다.
조급한 내 마음에 불을 붙였으면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더위 때문이다.
그래도 여름을 잘 보내주려 한다.
작별 인사는 보내야 우리의 사이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별을 고하고자 한다.
3.

연희동에 위치한 해피앤피스커피클럽. 올해의 여름에 작별 인사를 보낼 공간이다. 한낮의 이별이라고 들어봤나? 이별하는 날인데 구름 한 점 없이 완벽한 날씨이다.

주문한 메뉴는 라즈베리소르베 레몬소다와 무화과 멜바 그리고 루이보스 티 한 잔. 석 잔의 디저트에 여름과 가을이 녹아있다.
레몬소다에서 여름의 새콤상큼함을 느끼고, 무화과에서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메뉴판이 새로 쓰여진다. 여름 메뉴들이 지워지고 가을 메뉴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여름이 지고있다. 이글거리는 여름빛이 하나둘 저물어가고 있다.
‘진짜 이별할 시간이야.’ 라고 답할 수 밖에.
여름과의 이별은 무화과를 닮았다. 무화과는 여름 끝자락부터 겨울이 찾아오는 시기 전까지 잠깐 볼 수 있다. 너무 이르면 아직 맛이 배지 않았고, 늦어버리면 무른 무화과를 먹어야 한다. 맛있는 무화과를 먹으려면 지금이 가장 적당한 시기이다. 우리의 이별은 잘 익은 무화과를 닮아있다. 적당한 시기에 아쉽지만, 미련없이 보내주려 한다. 자리에 앉아 뒤를 돌아보니 아직 여름의 색감이 남아있다. 다른 건 다 몰라도 여름의 색감만은 그리울 것 같긴 하다.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깔끔한 맛이 매력적인 루이보스 티, 무화과와 아이스크림이 어우러진 무화과 멜바 그리고 알록달록한 색감의 라즈베리소르베 레몬소다가 차례로 놓인다.
푸른 빛과 따뜻한 색감이 적절하게 모여있는 테이블은 다시 한번 여름을 그린다.
여름휴가 때 구매한 우리 여름이
무화과 멜바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위에 무화과가 올라가 있다. 무화과의 독특한 맛과 부드럽고 익숙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조화롭게 어울린다.
중요한 일이나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특별한 무언가에 우린 누군가의 이름을 붙이곤 한다. 평범한 날도 누군가의 생일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특별한 날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무화과 멜바의 ‘멜바’라는 단어 역시 어느 유명한 소프라노의 무대에 감동한 셰프가 그녀의 예명을 따 만든 것이다. 나 역시 이번 여름을 좀 더 특별하게 기억하기 위해 지갑에 여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나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여름 휴가 때 구매한 지갑에까지 부정적인 감정을 묻히고 싶지 않다. 여름 휴가의 설렘이 이따금씩 느껴지는 지갑에 여름이라는 이름을 붙여 기억하고자 한다.
밉지만 잊고 싶지 않은 여름이다.
싫지만 남겨진 추억이 가득한 이번 여름이다.
애증의 감정이 가장 무섭다. 증에서 애로 넘어가게 되면 답도 없다. 감정의 범람은 손쓸 새도 없이 일어난다. 증이 너무 크면 애로 변하기 쉽다. 더 이상 미워할 공간이 남아있지 않아 미움의 감정이 차고 넘쳐 애의 자리까지 침범한다. 마음씨 좋은 애는 흘러들어오는 감정을 바라만 보고 있진 않는다. 사랑으로 보듬어 줄진 몰라도.

라즈베리소르베 레몬소다는 마시자마자 여름이 그려지는 맛이다. 소르베의 서걱거리는 식감과 시원한 맛은 차가움으로 더워진 입 안 온도를 누른다. 혓바닥을 톡톡 쏘는 레몬소다의 상큼함은 여름을 한 입 베어 무는 것처럼 강렬하다. 예상했던 맛이었지만 기대 이상으로 마음에 든다.
아직 여름이 묻어있는 이 계절을 우린 뭐라고 불러야 할까.
쪼로록 —
이게 지난 여름 한 모금인가보다.
이 한 모금으로 남겨둔 미련은 다 삼켜버려야지.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어 입안에서 전부 녹여버려야지.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끔 말이야.
4.

이번 여름을 알차게 보내자고 생각했다. 잊지 못할 여름이 되었으면 했다. 그래서 유럽 여행도 다녀오고 부산 여행까지 야무지게 계획했다. 막상 다녀와 보니 남는 건 사진뿐이었고 여행 뒤의 일상은 별다를 것 없이 흘러갔다.
신촌의 자취방 에어컨은 쉴 새 없이 돌아갔고, 중요한 일이 아니고서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신촌은 지독하게 더웠고, 뜨거운 열기는 나의 모든 에너지를 다 빼앗아 갔다. 오죽하면 휴학 계획도 철회했다. 올여름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 같아 속상해서.
끈적하게 달라붙는 여름 공기처럼 무기력함은 내 여름에 지독하게 달라붙는다.
털어내고
또 털어 내보아도
더더더 —
열매가 익는 계절이 다가온다.
익을 대로 다 익어버린 여름 공기는 서서히 흩어진다.
옅어진다.
옅어진다.
옅어진다.
옅어진다.
옅어진다.
옅어진다.
옅어진다.
무기력함 역시 옅어진다.
우리 다신 없을, 여름을 보내자.
우리 다시 올, 여름을 보내주자.
여름의 모든 날이 완벽할 순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해피앤피스커피클럽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 134 1층
월, 수, 목, 금 11:00~20:00
토, 일 11:00~21:00
* 매주 화요일 정기휴무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이야기를 남겨주세요.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