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잇닿음(連)에서 인연(緣)으로: 연 Bar
Monologue :

어떤 인연은 참 얄궂더라, 꼭 우산 없는 날 내리는 소나기처럼.
문득 나타나 어깨를 흠뻑 적셔 놓고는 한순간에 사라지더라.
나는 추위에 몸을 덜덜 떨면서도
대뜸 찾아왔던 빗소리에 빗내음이 못내 그리워져서
한참을 그 자리에서, 다 풀려버린 신발끈 위로
뚝,
뚝,
흘러내리는 빗물을 하나 둘 세어 보곤 했지.
차갑게 젖어 너덜거리는 끈을 엉성하게 묶어 놓으면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다시 스르르 풀려 버리고…
…아, 그만큼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참 아픈 인연이고 인생이더라.
–
그래, 그렇게 애를 태워도 잡히지 않아 괴로웠던 것이 인연이었건만, 지친 삶의 버팀목이 되어 주던 것 또한 인연이었음은 실로 아이러니하다. 혈관이 온몸으로 피를 흘려 보내는 것처럼, 얼기설기 뒤얽힌 인연의 실에 흐르는 온정이 늘 나를 살아 숨쉬게 하였으니.
그러나 반대쪽 실을 움켜쥔 상대의 매듭에 얼마만큼의 정성이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어서, 가까워지려 당기는 순간 풀리거나 끊어질까 두려워하던 시절도 있었다.
걱정이 쌓일수록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일도 부담스러워졌다. 길게 보고 사람을 만나려는 천성이 있다. 이 때문인지 속 편히 마음을 터놓고 표현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 내 인연의 실은 그 길이가 유독 길어서, 진심을 실어 보내기도 전에 상대가 기다림에 지쳐 놓아버리지는 않을까 늘 불안해했다.
놓쳐버린 실을 누덕누덕 기워 만든, 작은 걱정인형의 머리칼은 날로 길어만 갔다.
자기 과시를 위한 피상적인 관계나, 겉모습만 보고 앞사람의 가치를 속단하려는 인물들에게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다. 진심을 내비치는 일이 점점 두려워졌다. 더불어 마음 한 켠에는 어떤 <편견>이 자리잡았다. 왁자지껄 웃고 떠들며, 시답잖은 이야기만 나누는 술자리의 연(緣)은 무의미하다고.
–

신촌 거리에는 술집이 참 많다. 나는 홀로 신촌의 저녁 열 시를 터벅터벅 걸으면서, 무심결에 이런 생각을 남기기도 했다.
골목 한복판에서 한껏 들뜬 목소리로
흔한 작별의 인사 ‘다음에 또 만나’를 뱉어내고서
어느덧 지친 기색으로 돌아서는 그대들 기억 속에
서로의 얼굴과 이름, 목소리 정도는 제대로 남아 있을지.
빈 잔에 무의미함을 가득 채워 목구멍 너머로 털어 넘기는 행위, 그리고
마른 입술을 가르고 나오는, 기약 없는 인사치레들이 씁쓸한 소주의 뒷맛처럼 나를 괴롭혀 왔다.
우리는 어디에서 진실된 결속을 찾을 수 있을까.
비에 젖은 신발끈은 어떻게 고쳐 묶을 것이며,
방치된 채 엉켜버린 관계는 어떻게 풀어 다듬을 것이며,
기나긴 인연의 실은 어떻게 단단히 매듭지을 것이며,
그리하여 비로소 서로 이어져 맞닿아(連) 온정을 나눌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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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고민을 안고 살아가던 과거의 나에게,
스물 둘의 나는 어느 날의 기억으로부터 찾은 답 하나를 전하려 펜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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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09. 19
그다지 순탄하게 흘러가는 날은 아니었다. 큰 맘 먹고 방문한 식당이 문을 닫았고, 다른 곳을 찾아갔더니 주문이 잘못 들어가 한참 기다려야 했다. 역시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구나- 하면서도, 이대로 간만의 외출을 마무리할 수 없다는 생각에 괜한 오기가 들어서. ‘어른들은 일이 잘 안 풀리고 생각 정리가 필요할 때 혼자 술을 마신다네, 아 그럼 나도 어른 흉내나 한 번 내볼까-’ 하여.
어슬렁어슬렁 신촌 거리를 누비다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연’이라는 이름의 작은 바(Bar)였다.

시끌벅적한 술자리는 좋아하지 않음에도, 칵테일 한 잔의 낭만 정도는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종종 든다.
그렇지 않았다면 ‘연’과의 소중한 인연 또한 맺을 수 없었을 터.
저녁 여덟 시쯤 되어 어둑해진 골목에서 ‘연’ 바는 유독 눈에 띄었다. 양옆으로 펼쳐진 회색조의 건물 사이에서, 선명한 붉은색 문틀과 초록빛 잔디가 시선을 끌었다. 원목 펜스에 걸린 넝쿨 장식이 그들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마치 테라스 한 켠을 그대로 옮겨 놓은 느낌의 가게. 펜스 안쪽으로는 수많은 빈 병들이 이곳의 존재감을 더하겠다는 듯 옹기종기 모여 반짝이고 있었다.
은은하게 새어 나오는 조명의 온기에 잠시 몸을 실었다. 가게 안쪽을 들여다보니 먼저 온 손님은 없었다. 부담 없이 들어와도 괜찮다는 말을 전하는 듯, 어딘가 차분하고 아늑한 기운을 느꼈다. 나는 조금 떨리는 마음을 숨겨둔 채 문을 열었다.

어두운 가게에 잔잔히 흐르는 음악 소리와 함께, 사장님은 반가운 인사로 나를 맞이해 주셨다. 처음 마주한 공간임에도, 신기할 만큼 편안한 느낌이었다. 커다란 기역(ㄱ)자 바테이블은 다양한 종류의 술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나는 안내해 주신 자리에 앉아 사장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다.
사장님은 메뉴판을 건네는 대신 대화를 시작하셨다. ‘혼술 초심자’라는 매력적인 정보는 진작에 들킨 모양이었다(조금 부끄러웠다). 칵테일을 마시러 왔다고 이야기하자, 취향을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니 곧바로 잔을 하나 준비해 주셨다.

Tip. ‘연’ 바는 위스키와 칵테일 위주의 술과 다양한 식사 안주를 판매하고 있다. 메뉴판에 적혀 있는 음료를 골라 주문할 수 있으나, 사장님께 취향을 말씀드리면 어울리는 술을 만들어 주시니 이 방법도 추천. 시그니처 안주는 된장라면과 제육볶음이다. 사장님의 선택으로 매일 달라지는 ‘오늘의 메뉴’도 기대하시라!

첫 잔의 이름은 ‘카카오 피즈’. 카카오 리큐르를 베이스로 한 칵테일이다. 레몬과 탄산수를 첨가해 리큐르의 단맛을 균형 있게 잡아 주었다. 표현하자면 카카오 초콜릿과 사이다의 독특한 조화. 한 모금 마시고 난 뒤 혀끝에 남는 달콤함이 인상적이다. 도수는 2-3도 정도로 술이 약한 사람도 가볍게 즐길 수 있다.
칵테일을 마시며 사장님과 대화를 조금 더 이어나갔다. 초면인 사람과의 대화는 나에게 늘 숙제와도 같은 일이었으나, 오늘만큼은 홀로 이곳을 찾은 기구한 사연을 털어 놓을 상대가 필요했기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묘한 즐거움이 찾아왔다. 몇 년 알고 지낸 사이인 마냥 허심탄회한 인생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늘어놓았다. 술기운 때문은 아니었으리라(이 정도 도수에 취하지는 않는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짧은 설움이나 낯선 공간을 마주한 어색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다른 손님들이 들어와서 자리를 잡았다. 나는 그들과 사장님이 나누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나지막이 끼어들어 보기도 하면서 온전히 그 시간을 즐겼다.
‘혼자’인 동시에 ‘함께’라는 생경한 감각이 좋았다. 나는 술자리에서의 대화 속에서 – 이 또한 술자리가 맞다면 – 부담감 대신 편안함을 느끼는 스스로를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새로운 자아를 발견했다는 생각에 즐거워했다.

한참 대화를 나누고는, 앉은 자리에서 몸을 돌려 가게 안을 더 둘러보았다. 테이블 뒤쪽의 벽면은 연갈색 벽돌 타일로 꾸며져 있었다. 사장님이 손수 적으신 듯한 메뉴판을 발견했다. 매일같이 ’오늘의 메뉴‘를 고심한 흔적을 증명하듯 ‘크림커리리조또‘ 글씨 주위가 하얗게 번져 있다. 옆으로는 폴라로이드 사진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2020, 2021, 2022… ‘연’의 발자취를 따라가자 수많은 이들의 추억이 보인다. 저마다의 미소에서 사랑스러움이 묻어 나온다. 나는 그제서야 이 낯선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진 편안함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분명 정(情)이라는 것이 감돌고 있었다.

공간에 대한 호기심이 점점 커져 갔다. “이번에는 좀 더 센 걸로 주세요”, 호기롭게 두 번째 잔을 주문했다. 사장님은 가장 자신 있는 칵테일이라며 ‘김렛(Gimlet)’을 내어 주셨다. 김렛은 드라이 진을 베이스로, 라임 주스를 더해 상큼한 맛이 돋보이는 칵테일이다. 도수가 25도 정도로 상당히 높았음에도, 쓰거나 과하다는 느낌 없이 깔끔한 맛이었다. 마시는 내내 향긋한 라임 향이 감돌아 기분마저 상쾌해지는 칵테일이었다.
약간의 취기를 용기 삼아, 나는 사장님에게 가게에 대하여 궁금한 점을 이것저것 질문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사장님은 당신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신다며 흔쾌히 답해 주셨다. 에디터가 되기로 결심한 나의 첫 돌발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내용을 조금 담아 보았다.
인터뷰로부터 :

‘연’ 바의 박주영 대표는 3년 반 전 가게를 열고 현재까지 꾸준하게 운영해 왔다. 8년 간의 바텐더 생활을 그만두기 직전, 마지막 도전을 결심하고서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이 가게라고.
오랜 기간 바텐더로 일하면서, 그는 단 한번도 자신의 직업에 진정으로 만족감을 느낄 수 없었다고 말한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추구하는 바텐더라는 직업과 그 실상이 현실이라는 제약을 두고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모름지기 이윤을 추구해야 하는 비즈니스에서 수익과 고객 만족도는 양립하기 어려운 가치이다. 손님이 부담 없이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자는 사업 철학을 가진 박 대표와, 짧은 시간 내에 많이 파는 것이 목적이자 미덕인 ‘장삿일’은 결코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연’ 바에서 특유의 편안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혼자 방문했다고 하여 주눅들지 않아도 괜찮다. 손님에게 부담스럽게 눈치를 주는 일도 이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언제 찾아가도 편안하고 여유롭게 쉬어갈 수 있는 아늑한 공간. 정성이 담긴 술과 음식, 잠깐의 사색, 잠깐의 대화가 고단한 하루의 회복제가 되어 주는 공간 – 그것이 그가 지향하고 사랑하는 ‘연’ 바의 모습이기에.

한편 ‘연’이라는 이름에는 중의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다. 박 대표는 자식을 낳는다면 이름을 ‘연’ 자 돌림으로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곳이 그로부터 처음 ‘연’이라는 이름을 받게 된 것은, 위치 선정부터 자잘한 인테리어까지, 그의 손길이 들어가지 않은 곳 하나 없는 자식 같은 가게이기 때문이다. 한자로는 ‘잇닿을 연’(連)을 쓰는데, 가게를 찾아온 사람들과 잇닿으며 인연(因緣)을 맺는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3년 반 동안 꾸준하게 일을 이어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인연’이었다고 말한다. 개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닥쳐온 ‘코로나19’라는 위기. ‘영업 시간 제한’이라는 난관은 늦은 시간에 운영되는 공간 특성상 큰 타격이었다. 그럼에도 변함없이 가게를 찾아와 준 손님들 덕분에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고.
가게 오픈일인 5월 10일이 있는 주는 ‘연’ 바의 정기 MT 주간이기도 하다. 어려운 시기를 함께 걸어온 단골 손님들과 매년 열고 있는 특별한 잔치. 큰 행사 외에도 가끔씩 테니스 모임이나 소소한 이벤트가 열리기도 한다. 술, 그리고 작은 공간이 계기가 되어 모인 인연이 얼마나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는지 알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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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가게에 있으면서 느낀 게, 내가 아무리 잡으려고 해 봤자 잡히지 않는 연이 있고, 그냥 편안하게 있어도 잡히는 연이 있어요. 너무 억지로 잡으려 하다 보면 내가 힘들더라고. 계속 찾아오는 사람들은 나랑 잇닿아질 연인 거고…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사장님은 우연한 만남을 통한 인연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러한 연이 있었기에 지금의 ‘연’ 바가 있고 자기 자신이 있는 것이라며. 꼭 누군가의 생각과 닮아 있는 말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연을 맺고 이어가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겠다만, 그럼에도 인연의 가치를 잊고 방치하거나 놓아버려서는 안 될 일이다. 다정한 사람과의 인연, 오래된 공간과의 인연 – 무수한 인연의 실이 모여 ‘나’라는 존재를 이루고, 그 안에 흐르는 정이 온기가 되어 따스함 속에 살아가도록 하고 있으니.

“‘연’ 바는 제가 제 2의 인생을 살게 해 준 공간이에요.”
그 한 마디가 전하는 커다란 울림. ‘연’은 사장님의 도전과 청춘, 인생이 담긴 공간이다. 그런 소중한 공간을 찾아와 주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장님은 언제나 진심을 다한다. 좋은 재료를 쓰고, 서비스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하는 것. 매일 같은 시간에 가게의 하루를 시작하고, 손님이 없는 날에도 마감 시간까지 활짝 문을 열어 두는 것. 고객과의 약속을 소중히 하자는 사장님만의 철학이다. 관계라는 것은 어쩌면 상대보다 한 발 먼저 나의 진심을 전하려는 태도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지. 나는 조금 생각에 잠겨 지난 날들을 되돌아보았다.
어느덧 막차 시간이 되어 사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가게를 나섰다. 몇 발자국 옮기니 아쉬운 마음에 절로 시선이 뒤를 향했다. 아마도 조금 전 손가락에 걸린 인연 한 조각이 잡아당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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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 소중함을 아는 자의 곁에 좋은 인연이 머무르기 마련이다. 그들은 이익을 재어 가며 행동하기보다, 먼저 순수한 진심을 전하며 관계에 신뢰를 더하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노력을 당연시하지 않고 감사히 여기며, 꾸준히 곁을 지켜 주는 인연들을 아끼고 소중히 대하는 것이 단단한 결속의 기반이 되지 않을까.
언제 어디서 마주할지 모르는 것이 인연이다. 그러니 장소나 상황의 무의미성을 함부로 정의하여 <편견> 속에 본인을 가두지 말 것. 잇닿음의 의미를 발견하는 주체는 결국 나 자신이기에. 불필요한 가식은 덜어내고, 진심을 다하여 사람을 대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언젠가 내가 전하는 정의 깊이를 알아보고, 조금 더 가까이 오라며 실을 당겨 주는 인연이 찾아올지 모르니.
그럼에도 아픈 인연에 지쳐 고단한 날이라면,
잠시나마 마음의 짐을 놓아 둘 다정한 공간을 원한다면,
잇닿음이 모여 온기를 전하는 작은 아지트를 찾아
그대 발걸음을 옮겨 이곳으로.

연 (Yeon Bar)
서울 마포구 신촌로12다길 25 1층
월-토 19:00-03:00
*매주 일요일 정기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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