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일지_docx
오후 1시 46분

여름날의 찌든 더위가 여전히 내 몸속에 머물러 있는 건지, 아니면 나의 몸이 계절의 변화를 거부하는 건지,
오늘도 느릿하게 집 밖을 나선다.
문득 주변 풍경을 둘러본다.
변한 것은 달력의 숫자와 선선한 바람뿐.
푸르게 빛나는 나뭇잎과 잔잔하게 습기가 찬 건물 복도의 냄새, 역에 도착할 때마다 내뱉는 열차의 한숨,
차창 너머로 보이는 한강의 윤슬은 여전히 여름날의 아지랑이와 닮았다.
나 혼자 여름날의 나른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니구나.
안심이 된다.
오후 2시 17분

영등포구청역………당산…합정…홍대입구…신촌…이대역
작업실로 향하기 전, 근처 편의점에서 우유 한 팩을 산다.
시끌시끌한 소음의 미로 속을 헤치며 작업실이 있는 골목을 향해 간다.
골목 입구에서부터 나를 반기는 작은 꽃집, 햇빛에 반짝이는 화분들을 볼 때면
잠시나마 소음들로 인해 곤두서있던 내 신경이 푹 가라앉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 참 조용하고 편안하다.
드르륵 — 펑
작업실에 오자마자 만드는 라떼.
지속적인 커피값 지출을 막기 위해 시작한 일이 어느새 작업 시작 전 하나의 의식이 되었다.

따뜻한 에스프레소가 차가운 얼음을 만나며 반짝이는 소리
하얀 우유를 만나며 고동색에서 밝은 갈색으로 변해가는 모습
쌉싸름하고 부드러운 라떼를 마시며
작업실의 메마른 흙먼지와 촉촉하고 맑은 흙 내음을 맡고 있을 때면,
기발한 무언가를 떠올려야 한다는 압박도, 누군가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불안감도 잠시 잊고 그 순간을 즐길 수 있게 된다.
나에게 주는 작은 여유이자 사치다.
이 순간도, 이 장소도.
학교에서 4분 거리에 있다는 거리적 여유와 새 작업실의 깨끗함에서 오는 사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공간적 여유, 작은 냉장고와 커피팟이 마련되어 있다는 사치.
땅값이 비싼 서울에서 입체 작업을 허용하는 작업실은 많지 않다.
물감이 주 재료인 회화 작업과 달리, 흙 작업은 흙가루로 인해 장소 관리가 까다롭고, 습도조절로 인해 자칫하면 곰팡이가 생기기 쉽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이 작업실을 찾게 된 것도 천운이다.
오후 4시 58분

생각이란,
생각을 만들고, 또 다른 생각들이 축적되고 섞여 새로운 생각을 창조한다.
끊임없는 생각의 과정을 담아보겠다는 포부로 시작된 이 작업.
유동적인 생각의 특성을 담고자 가장 유동적인 매체인 흙을 선택했다.
흙 작업을 하면 할수록 이 매체의 특성이 경이롭다고 느낀다.
추상적인 발상을 실질적인 형상으로 구현할 수 있는 매체
평면적일 수도, 입체적일 수도 있는 매체
깨질 수도 있고 뭉개질 수도 있으며 부서질 수도 있는 매체
그렇게 형체를 잃더라도, 또다시 구축될 수 있는 매체
흙은 가장 애매하고 변화 무쌍한 매체이다.
이렇게 애매한 흙의 상태를 확고히 하는 것은 외부요인들이다.
바람이 습도를 가져간다든지, 가마 속 열기가 흙을 유리화 시켜 또 다른 상태로 만든다든지.
외부 요인에 의해 형태가 완고히 되는 것조차 흙은 여러모로 나를 닮은 듯하다.
기발하지도, 천재적이지도 않은 내가 장소에 의해 ‘예술가’라는 이름을 부여받았기에,
어쩌면 이 익숙함이 흙을 지속적으로 작업에 이용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오후 6시 23분
낮에 작업을 할 때면 작업실 내부로 잔잔히 비추는 햇살을 만끽하고 싶어 일부러 전등을 끄고 작업을 하곤 한다.
해는 생각보다 빠르게 진다.
햇빛이 직접적으로 작업실에 머무는 시간은 대략 30분 남짓.
그중, 내 자리에 머무는 시간은 단 8분.
그 8분 동안은 하던 일을 멈추고 가만히 앉아 스틸 장면 같은 작업실 풍경을 만끽한다.
해가 기우는 그 하루의 마지막 빛은 유독 강렬해, 손길이 닿는 모든 것을 빛나게 만든다.
반짝이며 빛나는 공기 중의 흙먼지
작업 표면에 맺힌 촉촉한 물기
그 촉촉한 흙 내음과 메마른 흙가루의 냄새
얼음이 녹아 밍밍해진 라떼
오후 10시 53분
무언가에 집중을 할 때면 시간이 응축되는 걸 느끼곤 한다.
문득 시계를 보니, 벌써 막차를 타야 하는 시간.
맥이 탁 끊긴 것 같은 찝찝함과 하던 일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정리를 시작한다.
흙이 마르지 않게 비닐로 덮어주고, 도구와 책상에 묻은 흙을 닦아주고, 손에 묻은 흙을 씻어주고, 전등을 끄고 문을 잠근다.
햇빛의 온기만 남은 작업실을 뒤로 한 채, 서둘러 밖으로 나선다.
비록 한적한 거리지만
낮에 시끌시끌했던 사람들의 소리가 벽돌 틈 사이로 베어 있는 건지,
저 멀리서 들리는 신촌의 진동인 건지,
조용하나 고요한 건 아니다.
문득 바닥을 본다.

이 길바닥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축적되고 깃들어 있을까.
바닥에 손을 대본다.
아직 식지 않은 여름날의 열기와 가을밤의 냉기가 동시에 느껴진다.
아스팔트에 스며든 온도를 느끼는 것도 잠시, 아, 열차…!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가까스로 탄 막차에 오르며, 그 아스팔트의 온도를 다시 떠올려본다.
내일이 오면 아스팔트에 여름은 옅어지고 가을은 짙어지겠지.
여름이 사라지는 게 아쉽지만, 나는 아직 미련이 남았지만 내년을 기약하며 이번 여름을 보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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