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Be Green, Taste Green, Feel Green! in 보케 (bokeh)
초록이 좋다.
어지러이 피어나는 생명력이,
당연하단 듯 주어지는 마음의 안정이,
고개를 숙이면 느껴지는 기운이,
이런 건 나밖에 못 한다며 발산하는 그 자신감이.
파랑과 노랑의 ‘중간’ 빛, 그러나 ‘중간’ 특유의 불완전성에 머무르지만은 않는.
나에게 온 초록은 언제나 온전한 일 인분의 몫을 했다.
초록색 옷을 입은 날엔 기분이 좋아지는 거, 청운문학도서관을 둘러싼 무성한 나무를 내려다볼 때면 느껴지는 편안함. 또 바람에 살랑이는 잎사귀들이 주는 간질거림. 길 가다 보이는 올리브색 가방에 자꾸만 움직이는 시선, 사랑하는 이에게 네잎클로버 뜨개 키링을 선물해 주고 싶은 마음.
그리고 연희동 어딘가,
이곳은 그런 나의 마음들에 보답이라도 받듯 발견해 낸 초록의 공간이다.

BOKE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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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 어느 길거리, 조그맣지만 그 무엇보다도 확실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보케의 간판.
그 존재감의 출처는 불명확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중요한 건 오늘 날씨는 너무 좋고 나는 이곳에 왔으며 이상하리만치 들떴다는 사실이다.
0. Be Green!

건물 2층으로 올라가 좌측의 가게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사장님의 취향이 가득히 담긴 인테리어를 마주했다. 일렬로 진열된 귀여운 컵부터 벽면에 붙어 있는 그림과 그물 가방에 담긴 꽃, 문에 달린 풍경 그리고 여유로운 좌석 배치까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건 감각적인 공간을 부족하지 않게 채운 초록색이었다. 가게 곳곳에 놓인 크고 작은 화분, 창문 밖으로 우뚝 서 있는 나무는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편안함을 선사했다.

볕이 잘 드는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늘도 이번 연희동 나들이가 마음에 들었는지 탁상 위로는 쨍한 무지갯빛이 스며들어 왔다. 세상이 돕는 ‘보케 산책!’ 실패할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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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나의 탄생색은 올리브색이다. (그리고 이건 초록 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초록색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와 초록 사이에 어느 정도의 운명을 설정해 놓은 것도 같다. 좋아하는 걸 잘하는 건 운명적인 일이랬는데, 이건 잘하는 걸 넘어서 그냥 내가 된 거잖아? 초록이 나고 내가 초록인 거잖아, 그런 생각으로.
자연스레 짙은 녹색 옷도 즐겨 입게 됐다. 그런 옷을 입는 날이면 별거 안 해도 기분이 좋았다. 친구들과 찍은 사진 속 남아 있는 초록색이, 거울을 볼 때면 선명히 비치는 내 초록색이 좋았다.

그래서 보케에서는 나 역시 초록이 되고 싶었다. 녹빛으로 가득한 이 공간에 완전히 동화되기! 그런 생각으로 이곳을 찾은 내 선택은 나에게서 가장 가까운 곳에 초록을 덧입혀 주는 것이었다. 완두색 옷 입기, 탁한 초록색 가방 메기, 그런 것들. 나로서는 제일 쉬운 것을 했고 제일 쉽게 먹혔다. 나는 생각보다 더 빨리 이 자리에 스며들었다.
초록화 완료, 그럼 이제 뭘 해야 하지?
1. Taste Green!
내 초록색 후드티와 가방은 아직 내 입안까지는 적시지 못했다. 혼자 방문해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던 탓이 아닐지. 이제는 입안을 초록색으로 물들여 줄 차례였다.

초록색으로 물들이려면 초록이 필요한 건 당연지사, 그렇담 초록을 주문하러 가야겠지! ‘그린 오더’를 위해 향한 카운터에서도 초록색이 빛났다. 카운터 정면에 자리한 수많은 식물과 화분, 벽면 쪽에 걸려 있는 푸른 색감의 시폰 커튼. 사장님께서 공을 들이신 게 한눈에 보였다. 만든 사람이 정성을 다한 공간은 보는 사람까지도 흐뭇하게 만든다.

디저트는 산도 네 종류가 있었다. 무화과 산도, 바나나 크럼블 산도, 샤인머스켓 산도 그리고 밤고구마 브륄레* 산도. 마침 밤고구마 브륄레 산도는 이날 처음으로 출시된 산도라고 한다. 밤고구마 브륄레 산도 첫날 시식의 영광, 놓칠 수 있겠는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무화과 산도와 샤인머스켓 산도 중 무엇을 먹을지 신명 나게 고민했건만, 생각한 시간이 무색하게 내 입은 밤고구마 브륄레 산도를 말하고 있었다. 계획을 한 박자 트는 건 오히려 기분 좋은 일이 되기도 한다.
사장님께서는 어울리는 음료로 플랫 화이트를 추천해 주셨지만, 목이 막히지 않도록 시원하게 마실 수 있는 음료를 고르고 싶었다.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치자 사장님께서는 다시 매실 에이드를 추천해 주셨다. 고구마 산도와 매실 에이드의 조합이라니! ‘텁시텁시(텁텁-시원-텁텁-시원)’의 정석이었다. 더 이상의 고민 없이 주문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 브륄레: 불에 탄, 구운, 그을린

잔잔한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 소리를 배경 삼아 창밖 나무의 움직임을 보면서 멍을 때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장님께서 음료와 디저트를 자리로 가져다주셨다. 대충 보아도 큼지막한 밤고구마 브륄레 산도와 빨간 체리가 올라간 매실 에이드에서는 자연의 향이 느껴졌다. 다디단 디저트지만 먹으면 건강해질 것만 같은 생김새랄까.
냅킨에 감싸 동봉된 포크를 조심스레 꺼냈다.

매실 에이드부터 가볍게 한 모금. 목구멍으로 넘기자마자 진하게 느껴지는 매실 향은 입맛을 돋우어 포크를 든 손을 산도 쪽으로 향하게 했다. 보드라운 빵과 크림, 달달한 설탕 조각과 담백한 고구마는 깔끔한 조화를 이루어 음료만으로는 어딘가 허전했던 부분을 채워 주었다. 고구마로 만든 산도도, 매실로 만든 에이드도 처음이라 반신반의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번 먹고 나서는 더 이상의 의심은 접어두고 그 맛을 즐겼다.

브륄레 코팅으로 덮여 있는 윗부분을 조금 먹자 나오는 아래쪽 밤고구마에서는 자연 본연의 맛이 느껴졌다. 좀 더 퍽퍽한 것이 오히려 매실 에이드와 썩 잘 어울렸다. 사장님표 추천이 괜히 있는 게 아닌가 보다. 밖으로 지나가는 버스와 승용차, 혼자 또는 둘셋 모여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저들은 다 어디로 가는 길일까’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매실 에이드에 올라가 있는 체리까지 꼭지를 떼어 야무지게 먹어 주었다.
참으로 평화로운 금요일 한낮이다.
2. Feel Green!
그릇과 잔을 비우고 난 후에는 가방에서 시집을 꺼냈다. 가게 가운데에는 여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커다란 테이블이 있지만, 가장자리로 들어오는 햇살이 너무 좋기도 했고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어 자리를 옮기진 않았다.

가져온 시집은 유진목의 『식물원』. 문예창작과에 다니는 친구가 언젠가의 약속 날에 나와 잘 어울린다며 선물해 준 시집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날에 선물을 해 주는 마음, 시집을 읽으며 나를 생각했을 그 마음. 또 날 만나기 전 내게 주려고 가방에 시집을 고이 넣어왔을 그 마음. 친구의 그런 일련의 마음들에는 따스한 온기가 담겨 있어 오늘 평화로운 나들이에 이 시집을 데려온 것도 같다.

가장 마음에 드는 시는 첫 번째로 등장하는 시였다.
종려나무가 있었다.
그는 이 땅에 살면서 많은 일을 겪었고, 그중에 어떤 시간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시간에 그는 자주 고개를 숙였고, 남몰래 주먹을 쥐었고, 그러다 하품을 하였고, 이대로 끝이 난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그는 지루함을 견디며 종려나무 사이를 옮겨 다녔다.
다른 것이 아닌 그는 종려나무인 것이 좋았다. 길고 가느다란 잎과 뾰족한 끝이. 찌르기 전에 꺾이는 무력함이. 천천히 말라가는 목숨이. 때로 휩쓸리는 삶이. 여럿이 모여 있으면 징그럽기도 한 것이 좋았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도 그는 어깨를 움직여 그것을 흔들어 보았다. 그러면 사람들은 바람이 부는 줄 알았다. 그는 사람들을 속이며 계속해서 종려나무 사이를 옮겨 다녔다. 어떤 사람은 종려나무 아래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어떤 사람은 휘파람을 불었고, 어떤 사람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체로 그가 거기에 있는지도 몰랐다.
마찬가지로 그는 불면에 시달렸다. 뒤척이다 뒤척이다 가까스로 잎사귀를 모으고 잠이 들었다. 그럴 때 함께 밤을 지샌 바다도 그랬다. 뒤척이다 뒤척이다 나중에는 돌아누울 힘도 없어 보였다. 그는 바다에 있을 때보다 산에 있을 때 자신을 건강하게 여겼다. 다시 한번 떠나기에 앞서 깊은숨을 쉬었다. 그는 잠자코 서서 바다의 종려나무에서 산의 종려나무로, 낮의 종려나무와 밤의 종려나무 사이를 옮겨 다녔다.

다른 것이 아닌 그는 종려나무인 것이 좋았다. 길고 가느다란 잎과 뾰족한 끝이. 찌르기 전에 꺾이는 무력함이. 천천히 말라가는 목숨이. 때로 휩쓸리는 삶이. 여럿이 모여 있으면 징그럽기도 한 것이 좋았다.
종려나무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우리네 삶의 모습이기도 하지 않을까. 길고 가느다란 생, 뾰족하게 찔러오는 역경들. 그런 것들에 때때로 꺾이는 무력함. 살아간다기보다는 어쩌면 천천히 죽어가는 것. 평화와 안정 사이 종종 끼어 있는 고통 하나에 이리저리 휩쓸려 버리는 삶. 그런 사람들의 군집에 징글징글하다는 인상을 받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 나가는 것, 고통 사이사이를 옮겨 다니며 틈새의 행복을 찾을 줄 아는 것. 달콤한 바람이 불어오지 않을 때도 힘을 내 움직여 삶에 변화를 주는 것, 그러면 내 몸과 머리가 알아서 달콤한 바람을 찾게 되는 것.
종려나무가 좋은 것처럼, 우리네 삶도 그래서 좋은 것 아닐까. 어쨌거나 ‘그럼에도’를 자꾸만 붙이게 되는 것, 작은 것에 기대고 기대하는 것, 그래서 순간순간을 사랑할 줄 알게 되는 것. 사는 이유는 거창한 게 아니라 다 그런 것들.
초록빛 종려나무에 담겨 있는 인생을 읽으며 시집과 노트를 덮었다. 이제는 눈앞의 나무들이 조금 다르게 보이는 것도 같다. 초록은 위대하구나, 내 생각보다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있어.
보케 문을 열고 나와 계단을 내려오며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 그랬던가. 영화 <소울>을 보고 나와 하늘을 바라보면 이전과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될 거라고. 나에겐 <보케>가 그랬다. 내가 사랑하는 초록에 대해 더 많은 인상을 준 공간, 더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준 공간. 가게를 나와 하늘을 바라보면 가장 먼저 보이는 나무에 다른 의미를 심게 되었다.
초록을 닮은 보케, 초록을 담은 보케.
보케 (bokeh)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 116 2층 좌측
월-금 11:00~20:00, 19:40 라스트 오더
토-일 12:00~21:00, 20:40 라스트 오더
* 인스타그램 스토리로 종종 임시 휴무일이 공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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